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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아파트를 가지고 싶었던 여자
2012-04-19
글 : 박해천 (디자인 연구자)
<화차> 차경선의 내면에 자리잡은 모델하우스 경관

날것의 폭력이 지배하는 무법의 폐기물 매립지, 여자는 그곳에 ‘쓰레기’로 내동댕이쳐졌다. 우여곡절 끝에 탈출하긴 했지만 여전히 그녀는 쫓기는 몸이었다. 사채업자들이 언제 다시 들이닥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불안과 공포는 그녀의 일상을 잠식했고, 밤마다 악몽의 연속이었다. 머리끄덩이를 잡힌 채 질질 끌려가다가 식은땀을 흘리며 꿈에서 깨어나곤 했다. 여자는 거처만 알아낼 수 있다면 자신을 빚쟁이로 만든 아버지를 정말 죽일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자살 유혹에 시달리던 시점, 여자는 뜻밖의 만남 덕분에 삶에 대한 의지를 되찾을 수 있었다. 화장품 회사에 입사한 그녀는 그 회사의 계열사인 건설업체의 모델하우스로 견학을 갔고, 구원의 손길과도 같은 하나의 장면과 마주쳤다. 그것은 분양을 앞둔 아파트 모델하우스의 거실 풍경이었다. 젊은 중산층의 눈높이에 맞춰 차분하고 단아하게 정리된 중형 평형대의 공간, 그곳에 놓인 모든 사물들은 봄 햇살을 닮은 조명 아래서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행복이라니. 그것은 여자가 IMF 외환위기 이후 단 한번도 체감해보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여자는 잠시 주방의 식탁 의자에 앉아 흰색 가죽 소파와 벽걸이 텔레비전이 놓인 거실을 바라보았다. 그래, 이 자리라면 다시 행복해질 수 있을 거야. 여자는 확신했다. 그녀는 휴대폰카메라로 거실 풍경을 찍었고, 그 사진을 액자에 담아 침대 머리맡에 두었다.

이후 여자는 사진을 볼 때마다 다짐했다. 언젠가는 그 공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야 말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걸림돌이 있었다. 그녀의 인격이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던 ‘차경선’이라는 이름은 욕망의 대리인으로 부적격 판정을 받은 지 오래였다. 여자는 다른 이름이 필요했다. 여자는 용의주도하게 살인을 저질렀고, 자신이 죽인 ‘강선영’이 되었다.

변신의 결과가 성공적이었던 것일까? 때마침 한 남자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여자가 아파트를 원한 것처럼, 남자는 사랑을 원했다. 여자가 원하는 아파트는 실물로 존재하는 지상의 아파트였고, 남자가 원하는 사랑은 첫눈에 반하는 낭만적인 사랑이었다. 다행히도 남자는 여자가 원하는 것을 사줄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여자는 사랑과 아파트가 등가로 교환될 수 있다고 믿었다. 액자 속의 사진을 남자와 함께 찍은 사진으로 바꾸면서, 이전 사진을 버리지 않았던 이유였다. 여자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성실히 연인의 배역을 수행했다. 남자는 자신이 꿈꾸던 사랑의 환상이 실현되자 한없이 행복해했다.

이제 그녀가 아파트를 선사받을 차례였다. 남자는 프러포즈를 했고, 그녀는 희미하게 번지는 미소로 화답했다. 남자의 아버지가 반대하고 나섰지만, 아들의 결심을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혼 일정이 잡히자, 남자는 여자가 선택한 신도시의 아파트를 구입했고, 여자는 새집을 꾸밀 준비를 시작했다. 외견상, 남자와 여자간의 거래는 그렇게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는 듯 보였다. 그러니까 전화 한통이 걸려오기 전까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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