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주의 두 번째 영화 <건축학개론>에 대해 쓰려고 한다. 다들 재미있게 보지만 내 주변에선 남성 관객에 비해 상대적으로 뜨뜻미지근한 여성들의 반응이 좀 흥미로웠다. 남성은 여성의 판타지에 대해, 여성은 남성의 판타지에 대해 늘 야박하게 군다. <건축학개론>의 경우엔, 그 영화에서 주연을 맡은 한가인의 드라마 출연작 <해를 품는 달>과는 정반대의 환상을 품고 있다. 특정할 수는 없으나 몇몇 사석에서 만난 여성들은 이 영화, <건축학개론>의 남성 판타지적 속성에 대해 다소 비판적이었다. 그녀들이 리얼리스트라서 그런 건 아닐 것이다. 남자들은 <해를 품은 달>에 대해 비슷한 감정을 품고 있다.
일부 여성들이 제기하는 <건축학개론>에 대한 반론의 근거는 이렇다. 첫사랑 여인이 15년 뒤에 남자를 찾아온다는 설정은 말이 안된다는 것이다. 남자들은 그렇게 생각할지 몰라도 그건 여자를 몰라서 그렇다는 요지다. 여성들이 지적하는 또 다른 비현실적 설정은 어른이 된 승민(엄태웅)과 서연(한가인)이 서로 마음을 섞은 뒤에도 끝내 동침하는 장면을 보여주지 않는 것인데, 이는 앞서 말한 첫사랑의 여인이 찾아오는 근본설정과 비슷한 맥락으로 엮여 있다. 아마도 서구 영화에서라면 결말을 앞둔 이 대목에선 틀림없이 동침하는 장면이 들어갔을 것이다. 우리 문화권의 판타지에선 구체적인 육체적 섞임이 감정의 균일성을 깬다. 남녀간의 육체적 관계는 사랑이라는 모호한 이름의 감정이 일단 도달하는 첫 기착지인데 그들의 욕망은 한없이 연기되어야 하기 때문에 나는 이 장면에서 굳이 육체관계 묘사가 누락됐다고 본다. 이 장면에서의 생략은 관객의 상상에 맡기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판타지를 위해 그게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뭐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 영화에서의 남성적 판타지와 그 밖의 것에 대해 써보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마침 내 책상에는 대리언 리더의 <여자에겐 보내지 않은 편지가 있다>라는 책이 있었다. 정신분석학적 필터로 남녀관계를 살핀 이 책에서 많은 것들을 빌려와 이 영화에서의 남성 판타지가 가리키는 우리 안의 모습에 대해 쓰려고 한다. 먼저, 첫사랑이었던 남자를 여자가 찾아온다는 설정에 대해 여자들은 절대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남자와 여자의 연애 서사는 다르다. 남자들은 여자들을 대할 때 일정한 목적론적 서사가 있다. 솔직히 말하면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그 여자와 자고 싶다는 욕망의 다른 표현일 때가 많다. 그 서사가 달성됐을 때 남자는 여자에게서 멀어진다. 그전까지 그녀와 나누고 싶어했다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이 육체관계를 맺고 나면 좀 차분해진다. 남성의 사랑을 특징짓는 불연속성은 남자들이 한 여자와 관계가 끝난 뒤 얼마나 쉽게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지를 보면 짐작할 수 있다. 남자의 사랑은 늘 변화한다. 소유욕과 의심 사이에서 동요하며 때로는 증오로 갈아탄다.
이 죽일 놈의 남성 판타지
대학 1학년생 시절의 남녀주인공과 삼십대 중반이 된 남녀주인공의 일화들을 교대로 오가는 <건축학개론>에서 남자주인공 승민의 변화를 통해 이를 짐작해볼 수 있다. 대학 시절의 승민(이제훈)은 연애에 서툴다. 음악과의 서연(수지)에게 한눈에 반해 그녀에게 잘해주면서도 자기 욕망을 드러내지 못한다. 자신의 이상적 이미지를 그녀에게 투사한 승민이 그녀와 제멋대로 결별하는 것은 그녀가 승민의 건축과 선배인 잘사는 바람둥이에게 술에 취한 채 집에 실려 들어가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서연과 선배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가운데 그는 그녀가 그렇게 행동했다는 데 대한 실망과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에 대한 자기 위로 사이에서 그녀를 증오하는 길을 택한다. 젊은 승민은 젊은 서연에게 결별을 선언한다. 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표면적으로는 마찬가지인 것 같다. 어른이 되어 건축가가 된 승민에게 집을 지어달라고 의뢰하는 고객의 신분으로 찾아온 서연은 그가 처음에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또는 그런 척하는) 것에 당황한다. 서연은 그와 조심스럽게 과거의 감정을 되살리려고 시도하지만 승민의 약혼자이자 직장 후배와 동석한 자리에서 승민이 약혼자로부터 승민의 첫사랑에 대해 아느냐는, 승민의 말로는 ‘썅년’이었다고 하는 그녀의 존재를 아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이로써 과거의 감정을 되살리려는 가냘픈 희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어른 서연의 마음은 식는다. 다음 장면에서 서연은 승민에게 선물하려던 넥타이를 병상의 아버지에게 선물한다.
비교적 낭만적인 톤으로 채색되어서 그렇지 과거의 승민이나 현재의 승민이나 나쁜 놈인 것만은 확실하다. 남자 입장에서 말하면 청년 승민과 어른 승민은 둘 다 제대로 사랑할 능력이 없다. 대학생 승민의 서연에 대한 구애는 뭔가 진전된 단계를 향한 달뜬 욕망과 사소한 좌절의 서사다. 건축학개론 첫 시간에 승민은 서연이 자신과 같은 동네에 산다는 것을 알게 된다. 교수가 학생들에게 자신이 사는 집과 학교 사이의 경로를 지도 위에 표시해보라고 했을 때 승민은 서연이 사인펜을 그은 지점을 그대로 포개 그으면서 설렘을 느낀다(이 숏은 매우 에로틱하다). 서연을 동네에서 만나 건축학개론 수업 숙제인 동네사진 촬영을 함께하면서 승민은 서연이 거침없이 빈집에 들어가 노는 것을 보고 놀란다. 나중에 다시 만났을 때 서연은 그 빈집을 깨끗이 청소해놓고 꽃 화분까지 갖다놓았다. 거침없이 침입하고 점령하며 거기서 살 것처럼 구는 서연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승민은 자신이 그녀의 가짜 집의 손님이라는 것에, 어쩌면 미래의 파트너가 될 수도 있다는 것에 흥분한다. 거기에는 승민 입장에서 그녀가 발신하는 어떤 허락의 느낌, 또는 착각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연은 결코 자신의 마음을 내색하지 않는다. 그녀가 자신이 꿈꾸는 집의 이미지나 앞으로 살게 될 생활의 터전이 정릉의 허름한 한옥이 아니라 강남의 아파트나 교외의 별장이라는 것을 밝힐 때 승민은 자그마한 좌절을 느낀다. 그때 승민은 서연의 짝이 자신이 아니라 그녀가 호감이 있다고 밝힌 같은 과의 선배일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품는다. 이런 식으로 승민의 달뜬 구애의 심정과 좌절은 이어진다. 승민이 처음으로 시골의 인적 없는 버스정류장에서 자신에게 기대어 자고 있는 서연에게 뽀뽀를 했을 때 서연이 그걸 모르는 척 깨어나 오줌이 마렵다고, 볼일 보는 동안 망 봐달라고 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서연의 입장을 추론해보면 서연은 그런 승민의 마음을 다 읽고 있다. 여자가 남자에게 수수께끼 같은 인물로 남으려는 것은 남자를 욕망하는 자신의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자 남자가 너무 많이 아는 것을 막음으로써 자신에 대한 남자의 욕망이 지속되게끔 하려는 시도이다. 이게 흔히 내숭이라고 부르는 여자들의 마음의 일부일 텐데 승민은 그걸 알지 못하거나 알더라도 참을 수 없다. 대다수 남자들이 그렇듯이 말이다. 서연의 연애 서사에선 자신의 앞으로의 삶에 대한 속물적 목표만큼이나 승민에 대한 욕망이 컸을 것이다. 승민은 서연에게 아버지를 대신할 수도 있는 존재이다. 아버지가 자신을 보살펴주었듯이 승민도 그렇게 하며 아버지가 자신의 피아노 전공에 자부심을 품고 있듯이 승민도 서연의 음악 전공 배경에 존경을 품고 있다. 이제까지의 익숙한 삶을 거스르며 그녀는 다른 삶을 살고 싶어 하지만 그녀가 강남 상류층 누군가와 결혼한 뒤 이혼하고 다시 고향에 돌아가려는 것처럼 그녀에게 승민은 처음부터 아버지를 대신해 안착할 수 있는 사랑의 대상이었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서연의 연애 서사는 승민과는 다른 것이다. 나이 든 승민이 젊은 날의 서연을 ‘썅년’이라고 여기며 지워내는 척했던 것과는 달리 서연은 지워내지 않았을 것이다. 승민의 존재가 함축하는 삶의 꼴, 정릉의 오래된 삶의 흔적과 함께 있을 때 어울리는 그와의 연애는 현실에서 좌절되었을지라도 그녀 혼자만의 삶에서 자기만의 서사로 완성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게 내가 짐작하는, 여성 관객이 <건축학개론>의 첫 도입부의 만남을 남성적 판타지라고 폄하하는 이유이다. 여자들은 남자들만큼 즉자적이지 않으며 남자들이 보이는 사랑의 불연속성에 비해 훨씬 영속적인 사랑의 감정을 갖고 있다. 서연이 환상 속의 인물인 것은, 그녀가 자기만의 연애 서사를 홀로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굳이 나이 든 자신의 모습으로 다시 첫사랑 남자를 찾아가 그 서사를 현실 속에서 완성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현실 속의 여자라면 그런 식으로 연애 서사를 마무리짓지 않을 것이다. 스무살의 풋풋하게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라 적당히 마모된 삼십대 여성의 모습으로, 그것도 결혼에 실패한 것과 속물적 계산이 어그러진 것에 좌절하면서 술에 취해 어른이 된 첫사랑 남자 앞에서 육두문자를 해대는 그런 여자로 서사를 이어서 꾸려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돈을 많이 벌었으나 적당히 불행해졌고 이로써 그녀를 욕망했다가 좌절한 어른 승민은 적당한 만족감을 얻은 만큼이나 더해지는 죄책감으로 그녀의 집을 최대한 예술적으로 완성해준다. 그리고 가벼운 입맞춤을 하고 좋은 마음을 간직한 채 서로의 갈 길을 간다. 이게 이 영화에서의 남성적 판타지의 허구라는 건 아닐까 짐작하게 된다. 여성 입장에서 사랑의 연속성은 그 상대가 응답하지 않는 한 유지된다. 굳이 상대를 찾아가 확인할 이유가 없다. 확인하려는 건 남성적 시각이다. 남자라면 끝까지 물으려 들지 모른다. 남자에게 사랑이란 앎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고 앎으로써 상대를 접수했다고 느끼고 몸과 마음을 안다고 여기는 순간 남자의 마음은 상대에게서 멀어진다. 그럼으로써 남자는 사랑의 영속성을 깬다.
첫사랑은 맥거핀일 뿐
이런 관점에서 보면 <건축학개론>이 남자와 여자에 대해, 남자와 여자의 사랑에 대해 보여주고 있는 것은 예상보다 적다. 그것은 주로 남성적 사랑의 판타지에 집중돼 있기 때문에 남녀관계의 묘사를 통한 우리 인생의 소묘라고 보기엔 다소 균형이 맞지 않고 비대칭적이다. 그게 다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건축학개론>을 꼭 첫사랑에 대한 얘기라고만 보지는 않았다. 첫사랑 소재는 우리의 마음을 스토리에 붙잡아두는 맥거핀이고 그것 이상으로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게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저렇게 따지고 보면 이들 남녀의 주관적인 환상은 실패했다. 영화 후반부, 다 지은 집의 이층에 올라간 서연이 담을 돌아 풀밭에 누워 있는 승민의 곁에 누워서 살짝 입을 맞출 때, 젊은 시절의 뽀뽀 장면과 대구를 이루는 이 장면만으로 그들의 실패한 환상에 대한 짧은 영화적 위무는 성공한 것으로 생각한다. 나는 여기서 어차피 그게 남자의 환상이든, 여자의 환상이든, 모든 환상은 실패하게 돼 있다는 식으로 받아들였다. 환상이 사랑의 완성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면 그건 어차피 실패하게 돼 있다. 모든 환상은 실패를 예정하고 있기 때문에 환상이다. 이 후반부의 뽀뽀 장면은 그 실패한 환상에 대한 적절한 수위의 영화적 보상이다. 우리 삶에서 환상의 대가는 그 정도로 충분한 것이다.
대신 영화는 다른 것도 보여준다. 그 환상이 지나간 자리에서 우리는 녹슬어 남아 있는 삶의 자취를 본다. 그 삶의 자취는 우리의 실패한 환상만큼이나 누추한 것이다. 그렇다고 이 누추한 자리를 부숴버릴 수는 없다. 영화에서 남녀주인공 젊은이들이 자신의 욕망을 이루는 데 실패했다면 그건 자신의 삶의 자취를 지워버리려 했기 때문이다. 제주도 출신의 서연은 서울에서 살고 싶어 하고 그것도 강남 번화가에서 살고 싶어 한다. 대학 신입생 때 그녀의 바람은 강남은 강남이되 초라한 다세대 주택 지하방에서 사는 것으로 낙착되었다. 그녀가 지상으로 나오고자 했을 때 아마 일시적으로는 성공했겠지만 결국 그 삶의 형태를 이어가지는 못한다. 그녀는 이혼녀가 되어 제주도의 낡은 집을 개보수한다. 승민은 그런 서연을 한때나마 욕망하면서 자신의 가짜 게스 티셔츠와 초라한 집과 어머니가 운영하는 순대국밥집을 부끄러워하지만 비교적 유복해 보이는 약혼녀와 결혼을 해서 뉴욕에서 살 시기가 임박해서도 결국은 그 자신의 삶의 패턴을 바꿀 마음은 없어 보인다. 자기 부모로부터의 경제적 도움을 받아들이라는 약혼녀의 채근을 그는 물리친다. 재개발되는 집 보상비용을 어머니가 결혼비용으로 내놓을 때 어른 승민은 울컥하며 이 집 대신 아파트로 이사가라며 어머니에게 묻는다. “이 집이 지겹지도 않아?” 어머니는 대답한다. “집이 지겨운 게 어딨어. 집은 그냥 집이지.” 환상은 환상이고 삶은 삶이다. 또는 환상이 사라지는 곳에 삶이 남는다. <건축학개론>이 진짜 마음을 건드리는 게 있다면 그 명제라고 생각한다. 그럼으로써 단단해지는 삶에의 긍정이 남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