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게으르고 한가한 자세로 텔레비전 뉴스를 보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경기도 부천시에서 일어난 어떤 좀도둑의 범죄행각이 단신으로 보도되고 있었습니다. 중대하기보다는 황당무계하다는 이유로 그날의 단신으로 채택되었을 이 사건을 접한 날, 저는 그만 더 황당무계한 상황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이 사건이 저에게 무언가 영화에 관한 단상을 줄지도 모른다는 느낌에 빠져버렸던 것입니다. 저의 머릿속은 마치 단관 개봉관의 극장처럼 하루 종일 그 사건이 상영되고 또 상영되었습니다. 사태는 급기야 불어나더니, 올해 초에 인상적으로 보았던 어느 영화 한편까지 불러들이게 됩니다. 처음 볼 때는 의심스러웠으나 두 번째 볼 때는 신기했고 세 번째 볼 때는 탄복하게 된 라스트 신을 지닌 그 영화가 앞선 사건과 뒤엉키며 머릿속은 이제 동시상영관이 되어갔습니다. 그러니 무언가라도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지금 이것이 저의 올해 첫 번째 흥미로운 영화 체험이었다고 전하려는 것입니다. 부디 이 체험이 새롭고 아찔한 영화 생각으로 합체하고 변태하기를 스스로 바라면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말씀드린 그 허술한 범죄극의 내용부터 밝혀야겠지요. 어떤 중년의 여인이 빵집에 빵을 사러 들어옵니다. 이 여인은 9만8천원어치의 빵을 계산대 앞에 가져간 다음 1만원권 열장을 손에 쥐고 계산을 요구합니다. 당시 가게에 손님이 많아 바빴기 때문인지 혹은 그것조차 이 여인의 계략의 일종이었는지 알기란 어렵지만 여하간에 점원은 10만원을 받기도 전에 이미 거스름돈으로 건네줄 2천원을 손에 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점원과 여인은 동시에 서로의 돈을 건네려 합니다. 자, 그때 사건이 일어납니다.
여인은 순간 점원의 눈을 다른 곳으로 유도하는 동시에 속사포처럼 말을 붙여 정신을 흩뜨려놓은 다음, 순식간에 손에 들고 있던 10만원을 손 안에 숨깁니다. 점원은 돈을 받았다고 착각하고 이렇게 계산은 어처구니없이 끝납니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것이 아닙니다. 가게 안을 잠시 서성이던 여인은 잠시 뒤 계산대 앞으로 돌아와, 마음이 바뀌어서 빵을 사지 않겠다, 9만8천원을 환불해달라고 합니다. 점원은 요구대로 돈을 내줍니다. 믿기지 않지만 이런 방법으로 이 여인은 하루에 세건을 성공시켰고 30만원을 가져갔다고 합니다. 도대체 이런 마술 같은 일이 일어나다니요. 아니나 다를까, CCTV를 판독한 한 마술 전문가는 그 여인의 손 기술이 마술사가 돈이나 카드를 조작하여 숨기는 기술, 즉 “머니-매니풀레이션”이라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이건 마술입니다. 때문에 이 사건은 일명 ‘마술 절도녀’ 사건으로 이름 지어졌습니다.
초기 영화사의 저 유명한 감독 조르주 멜리에스가 마술사 출신이라는 사실을 우린 알고 있습니다. 뤼미에르 역시 영화의 마술성과 함께 말해지곤 합니다. “동시대인들은 뤼미에르를 마술가로 여겼지 리얼리스트로 여기지 않았다”(토마스 엘새서)라고도 합니다. 둘은 영화가 착시의, 착각의 예술이라는 변치 않을 사실을 입증해줄 기원자들입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 영화의 기원에 있어 마술사와 마술이 중요한 몫을 했다는 점 때문에 이 사건에 거꾸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아니며 거기까지 거슬러 올라가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다만 사건 자체를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는 데 더 관심이 있습니다.
이상하게도 이 사건을 전하는 뉴스들은 하나같이 ‘마술의 손 기술이 범죄에 쓰였고 그것은 현란했다’라는 점에만 주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히려 반문하고 싶습니다. 정말 그것이 핵심일까요, 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물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저 여인의 머니-매니풀레이션 이라는 기술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최종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습니까, 라고 말입니다.
좀도둑의 듣보잡 영화, 뇌에서 교묘히 상영되다
이 사건의 핵심은 그러므로 손 기술이 아니라 뇌 기술이며 손 조작이 아니라 뇌 조작입니다. 그리고 더 핵심은 이 뇌 조작이 단순한 눈속임을 넘어 ‘이미지’의 주입과 저장과 활동과 혹은 오작동을 통해 가능했다는 사실입니다. 계산이라는 실제 행위가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계산이라는 이미지가 발생한 것입니다. 그것은 저 여인이 점원의 뇌에 주입하고 투사하고 활동시킨 그녀의 이미지 연출법에 의해 가능했습니다. 물론 이건 마술의 일종에도 적용되겠습니다만 만약 이와 같은 유사한 체험을 안겨주는 매체나 예술이 있다면 그건 또 무엇이겠습니까. 가령 이미지의 조작과 조정과 연출과 연쇄와 활동과 지속으로서의 그것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짐작하셨겠지만 저는 지금 어느 좀도둑에게서 듣보잡 영화 한편이 막 연출되었고 한 점원의 뇌에서 그것이 교묘하게 상영되었음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제목도 없고 가치도 없지만 일면 영화의 경험을 껴안은 채로 당사자들의 뇌에서 상영된 그 수상한 영화 말입니다. 그러므로 저 여인은 나쁜 범죄자이며 뛰어난 마술사이고 동시에 본능적인 영화감독입니다.
우스꽝스러운 과장이라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사태야 우스꽝스럽고 비도덕적이지만 그 작동에 대한 생각은 신중하고 모험적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늘 말해져왔거나 시도되어온 영화의 중요한 일면이기 때문입니다. 현세와 전생을 오가며 어느 쪽이 어느 쪽을 투사하는 것인지 궁금하게 만들었던 영화 <엉클 분미>의 감독 아 핏차퐁 위라세타쿤은 문득 이 영화의 영감에 관하여 말하다가 “명상 자체가 곧 영화 만들기”라는 말과 함께 “우리의 뇌는 최고의 카메라이며 영사기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걸 적절하게 작동시키는 방법을 찾을 수만 있다면 말이지요”라고 고백합니다. 혹은 그렇게 뇌가 저절로 카메라와 영사기가 될 수 있다고 믿는 아핏차퐁이 “저 사람의 머릿속이 정말 궁금하다”라며 가리킨 감독은 홍상수입니다. 홍상수는 우리의 뇌를 훔칩니다. 그의 영화를 본다는 건 때로 우리의 뇌가 너무 왕성해지는 자극을 받는 바람에 오히려 정신줄을 놓는다는 뜻입니다. <북촌방향>에서 술집 여주인이 눈앞에 있는 손님을 향해 평소와 다르게 “오빠”라고 호칭을 바꿔 부르자, 그 순간 그 인물의 존재감과 앞에 있는 사람과의 관계와 그들 장면 앞에 펼쳐졌던 다른 장면들과의 관계가 순식간에 얽히고 흔들려서 우리는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았습니까.
혹은 그런 홍상수 영화에 관한 가장 뛰어난 논평자이자 동반자인 허문영이 ‘아덴만의 여명’, 즉 영화 같다고 칭해진 한국 정부의 살육 작전을 두고 “김선일 사건, 연평도 사건으로 집약되는 현실의 불안과 두려움을 달래주는 국가적 반격의 시뮬라크르”라고 지적하는 동시에 “그 자체가 액션영화가 아니라 그 사건에 관한 시청각적 정보를 우리가 액션영화의 틀로 받아들였다거나, 우리의 뇌가 그것을 액션영화로 재상영했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이라고 마침내 통찰력있게 설명해낼 때, 우린 저 먼바다에서 벌어진 살육이 우리의 뇌에서는 어떻게 한편의 액션영화로 변모하는지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질들뢰즈는 더 간단히 자기 식대로 말했습니다. “뇌는 스크린이다.” 그리고 덧붙이지 않았습니까. “스크린, 다시 말해서 우리 자신은 창조적인 뇌일 수 있는 만큼이나 백치의 결함있는 뇌일 수도 있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부천의 어느 빵집에서 벌어졌던 그같은 뇌의 체험과 영화의 체험에 관하여 저는 저의 영화적 이해로써 일단락지어 보고자 합니다. 사실 알고 보니 마술 절도녀가 연출한 이 영화는 그녀가 잡히기 전까지 전국 각지에서 100회 이상 순회 상영하였으며 회당 대략 수10만원의 상영료를 챙겼고 도합 2700만원이라는 흥행 수익을 냈다고 하니 그 백치의 뇌(영화)는 한두 사람의 무지 때문에 생긴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마술 절도녀의 흥행 신화를 가능하게 한 요소들이 있었을 겁니다. 그건 무엇이었을까요.
물론입니다. 역시 첫 번째는 ‘시선’의 활용입니다. CCTV 안의 그녀가 1만원권 열장을 차례로 착착 세거나 혹은 톡톡 건드리는 것을 보십시오. 그녀는 그때 영화적으로 무엇을 바라는 것일까요. 시선이 발생하기를 바라는 것일 겁니다. 관객(점원)의 시선이 그 열장의 1만원권에 고정되기를 바라고 있으며 그의 눈이 돈을 보고 그의 뇌가 돈을 알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영화에서의 시선이란 종종 앎이라는 문제 혹은 착각으로 이어지니까요. 마술 절도녀가 영화사의 중요한 시선의 역사를 알지는 못했겠지만 그녀는 이미 뇌를 촉진하는 시선의 기능을 몸소 터득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때 저 시선이 무언가 의미를 동반하는 표현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더 중요해 보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시선을 잡아둘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저는 여기서 그 표현법으로 이른바 제유법이 쓰였다고 생각합니다. 제유법이란 “사물의 한 부분으로 전체를 표현하는 비유법”이며 왕관을 보자 왕을 떠올리고 왕의 권력까지 떠올리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시선을 휘어잡아 점원의 인식을 돈에 잠시 묶어둘 때, 점원은 단지 10만원이라는 ‘돈’을 보았을 뿐이지만 그 돈을 봄으로써 결국 ‘10만원을 지불하다’라는 전체의 착각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이런 유사한 경험을 고백한 철학자가 있습니다. 자크 랑시에르는 니콜라스 레이의 <그들은 밤에 산다>의 한숏을 논평하는 것이 필생의 꿈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가 논평을 꿈꿨던 그 숏은 그 영화에 애초부터 없는 것이었고 그의 상상일 뿐이었습니다. 그때 그의 착각을 불러온 제일의 이유로 그는 그 영화에서 얻은 어떤 제유법의 경험을 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랑시에르의 어려운 분석을 더 따라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일부를 보고도 전부를 알았다고 생각되는 이 상황의 돈의 제유를 이해하기만 하면 될 것입니다.
마침내 결정적인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그건 청각적 요소, 말의 사용입니다. 이것이 이 범죄의 내러티브를 더욱더 공고히 하고 있습니다. 마술사들이 관객의 시선을 뺏기 위해 가장 손쉽게 하는 술수가 잡담과 수다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마술 절도녀는 범죄 행각 내내 쉬지 않고 말을 시켜서 점원의 혼을 빼놓았다고 합니다. 공회전하는 말이 가세하여 시선이 짜놓은 내러티브를 인정케 하는 것입니다. 그건 영화적 마술이 가장 잘하는 것이기도 한데, 어떤 영화는 시각과 청각의 조화 그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둘의 부조화로서 영화적 효과를 극대화한다는 사실을 우린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애초에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머니-매니풀레이션이라는 그 기술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최종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습니까, 라고 말입니다. 머니-매니풀레이션이라는 이 영화의 기술은 혼자 기능하지 않고 반드시 다른 것들과 함께 가동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현실에 등장한 한편의 기이한 영화가 마침내 그런 식으로 상영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영화란 늘 시청각의 감응을 재배열합니다. 우리의 뇌도 늘 시청각의 감응을 재배열합니다. 마술 절도녀가 연출하고 관객인 점원이 인지한 신종 영화의 전말이란 그런 것입니다. 점원은 10만원이라는 돈을 받은 것이 아니라 10만원이라는 이미지를 받은 것이고 10만원의 이미지라는 활동하는 영화를 건네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도덕적으로 나쁜 영화라도 이미 그건 성사되었고 상영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저는 이 영화의 활동에 대한 이러한 이해가, 제가 말하려는 다음 영화에 관한 진정한 이해를 위해서도 필수적이라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인간-매니풀레이션’ 기술로 우리를 조작한 다르덴 형제
다르덴 형제의 <자전거 탄 소년>. 마술 절도녀와의 동시상영작이라 말씀드렸던 바로 그 영화입니다. <로나의 침묵>까지 다르덴 형제 영화의 미학은 크게 변한 바가 없습니다(적어도 제가 본 <약속>부터는 그렇습니다). 동시에 그들은 한 가지 곤궁을 겪어야 했는데 이제는 그들의 영화도 매너리즘에 빠진 게 아니냐는 일각에서의 질타였습니다. 그런데 <자전거 탄 소년>으로 다르덴 형제는 전에 없이 다른 영화적 방식을 도모한 것 같습니다. 놀랄 정도로 말입니다.
변화란 무엇일까요. 그들이 처음으로 따뜻한 동화를 만들었다는 그 사실일까요. 그럴 수 있습니다. 또는 많은 이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그들 영화에 처음으로 음악이 본격 사용됐다는 점일까요. 그것도 얼마간은 맞을 겁니다. 그런데 당장 눈에 보이는 그런 것들이 다르덴 형제 영화의 가장 큰 변화일까 생각해보면 그다지 결정적이라는 생각이 영 들지 않습니다. 혹은 말해지지 않은 중요한 무언가가 더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말하는 라스트 신으로 생각을 한번 돌려보면 어떨까요. 영화의 가장 육중한 감동이 서린 장면, 그렇다면 거기에 무언가 결정적인 변화가 도사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요.
먼저, 다르덴 형제 영화의 리얼리즘에 관해 잠깐 우회적으로 말해야 할 겁니다. 이때 그들의 리얼리즘이란 소재적으로 비슷한 켄 로치나 로랑 캉테의 리얼리즘과는 다른 것이라 생각됩니다. 켄 로치의 리얼리즘이란 극의 리얼리즘입니다. 켄 로치는 극화된 세계 안에 살고 있는 인물의 이야기를 최대한 리얼하게 그리려는 영화적 목표를 갖고 있습니다. 로랑 캉테의 리얼리즘이란 상황의 리얼리즘 혹은 중계의 리얼리즘이라고 부를 만한 것입니다. <클래스>가 확실히 그 점을 보여줍니다. 그는 교실 안 풍경이라는 상황을 마치 중계하듯이 리얼하게 포착합니다. 여러 대의 카메라로 숏과 리버스 숏과 인서트를 오가며 전체를 꼼꼼하게 조망하려 합니다.
다르덴 형제의 리얼리즘이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리얼리즘은 카메라에 한계를 부과하고 고스란히 인정하는 리얼리즘입니다. 그들은 카메라 한대에 핸드헬드를 써서 인물을 쫓으며 (로랑 캉테라면 포착하고야 말) 그 나머지 풍경과 상황은 수시로 놓쳐버립니다. 그걸 보충하기 위한 숏과 리버스 숏과 인서트 등도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세계를 그럴싸하게 담아 보여주겠다는 인상을 애당초 포기하고 있으며, 그 보완으로써 필요한 시각적 보완 장치들도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태도입니다. 그들의 리얼리즘은 오로지 인물과 카메라 사이의 물리적 거리감이 팽팽하게 느껴지는 그런 것입니다. 이때 영화가 스스로 정서적 효과를 높이는 방법은 그 인물과 카메라의 일대일의 ‘물리적 전압’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로써 그들이 저항감이라고 말하는 대상과의 그 마찰력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떠한 다른 조작도 기술도 거의 쓰지 않으려는 이 감독들의 미학입니다. 저는 그런 그들의 리얼리즘을 마찰의 리얼리즘이라고 불러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하게도 이 마찰의 리얼리즘의 핵심은 지금까지는 적어도 그 어떤 영화적 조작이나 장치를 허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자전거 탄 소년>에서 바뀐 것 같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자문해보겠습니다. <자전거 탄 소년>의 라스트 신도 그와 같은 리얼리즘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인가요.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영화를 다시 보며 이 라스트 신에서 놀란 것은 시릴이 일어났다는 점 때문이 아니라 시릴을 쓰러뜨리고 일으키는 그 방식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어떤 새로운 조작이 있습니다. 부디 오해가 없기를 바라는 것은, 여기서 제가 조작이라 쓰는 표현은 그들의 영화가 사기꾼의 영화가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럴싸하게 꾸며냄’이라는 사전적 용어 그대로, 어떤 가치 훼손의 뜻 없이, 무언가 다른 인공적 영화 화법을 도입했음을 말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시릴은 사만다의 심부름으로 바비큐 파티에 필요한 숯을 사러 갔다가 그만 신문 판매상 부자(父子)를 만나게 됩니다. 영화를 본 당신이라면 시릴이 동네 나쁜 형의 꾐에 빠져 한때 그들 부자를 방망이로 때려눕히고 돈을 갈취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겁니다. 물론 법적으로는 용서 받은 다음입니다. 하지만 이 장면에서 시릴을 본 상점주인 아들은 분을 참지 못하고 시릴을 쫓아가 때리고 시릴은 도망가고 그러다 숲의 나무 위로 시릴이 올라갔을 때 상점주인 아들은 시릴에게 돌을 던집니다. 한번 던지고 두 번째 돌을 던졌을 때 시릴이 별안간 그 돌에 맞아 퍽 하고 땅바닥으로 추락합니다. 자, 이때의 솔직한 심정을 당신께 질문하고 싶습니다. 시릴이 그렇게 추락하여 땅바닥에 누워 있을 때 그걸 본 당신도 역시 저처럼 소년의 죽음을 떠올린 것 아니었습니까. 말하자면, 그때 이미 ‘저 소년은 단지 돌에 맞았을 뿐 잠시 뒤에 깨어날 것이다’ 하고 알아차린 사람은 몇이나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저의 궁금증은 이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시릴의 상태에 관하여 아직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상황이 아니었습니까. 엄밀히 말해 시릴은 그때 돌에 맞아 ‘쓰러진 것’이지 ‘죽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시릴이 죽었다고 미리 생각한 것일까요. 무엇을 근거로 말입니까. 왜 우리의 뇌는 먼저 움직이고 확신하여 시릴의 죽음이라는 판단을 먼저 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그러니까 우리는 착각을 했던 것이고 그 착각이 이 라스트 신의 역점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과정 때문에 우리의 그 착각이 생긴 것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이 반전이 사실 처음에는 좀 의심스러웠습니다. 억지로 신적인 것을 개입시키기거나 잠시 뒤에 뒤집힐 반전에 두배의 감동을 느끼기를 바라는 다르덴 형제의 꼼수로 느껴졌습니다. 그것이 처음에는 쇼크 효과로 보였고 다르덴 형제 영화 미학의 위험한 수신호라고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마술 절도녀와의 영화를 함께 생각해보니 다르게 볼 수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이것이 ‘마술 절도녀의 영화’를 <자전거 탄 소년>에 앞서 말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저는 우선 <자전거 탄 소년>의 이 라스트 신을 ‘인간-매니풀레이션’ 기술이 작동한 장면이라고 부르려 합니다. 마술 절도녀의 그 기술이 머니-매니풀레이션 아니었습니까. 머니-매니풀레이션이 돈으로 우리를 조작하였다면 다르덴 형제의 영화는 지금 저 시릴로 우리를 조작하고 있습니다. 마술 절도녀가 머니-매니풀레이션이라는 기술로 점원에게 돈을 받았다는 착각을 심어주었다면 이 장면에서 다르덴 형제는 인간-매니풀레이션으로 우리에게 시릴이 죽었다는 착각을 심어주었습니다. 당연히도 여기에는 앞선 경우와 마찬가지로 인간-매니풀레이션과 함께 작동하는 몇 가지 요인이 더 있는 것 같습니다. 먼저 시릴의 추락입니다. 즉 육체의 추락입니다. 시릴의 몸이 땅바닥으로 고꾸라지면서 영화적으로 무엇이 발생했는지 우리는 묻지 않아도 앞선 경험으로 알 수 있습니다. 돈에 꽂혔던 점원의 그 시선처럼 시릴의 추락을 따라 여기서는 깜짝 놀란 시선이 발생합니다.
그러니 실은 두 번째 단계도 유사합니다. 제유법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지적하겠습니다. 시릴의 추락하는 몸을 따라, 그리고 쓰러져 있는 시릴을 두번이나 보여줌으로써, 즉 ‘추락과 쓰러짐’이라는 사태의 일부분으로써 이 장면은 시릴의 죽음이라는 전체를 착각하도록 우리를 유도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때 신문판매상의 부자는 어떤 대화를 나누게 되는 것입니까. “저 아이가 죽었다면…”이라는 대화를 나눕니다. 그 부자의 말들이 마침내 ‘시릴은 죽었다’는 내러티브를 그 순간까지 공고히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귀를 혼선에 빠뜨리는 청각적 정보들입니다. 물론입니다만 이 장면의 압권은 그 모든 걸 걷어 치우고 사만다의 사운드(전화벨 소리)가 시릴을 일으킨다는 데 있을 겁니다. 가짜 청각의 정보를 진짜 청각의 정보가 밀어내고 소년을 일으키는 것 말입니다.
리얼리티에 관한 동화
우리는 앞서 마술 절도녀의 영화를 예제로 지금 <자전거 탄 소년>의 마지막 장면을 설명해본 것입니다. <자전거 탄 소년>의 라스트 신에 관한 감상들은 대개 차이없이 부활과 면죄와 구원과 기적 등등의 낱말로 추려집니다. 하지만 그런 감정들을 받아들이기 전에 뇌의 조작과 착각이라는 영화적 과정이 먼저 작동하였음을 깨달아야만 한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다르덴 형제의 숨겨진 가장 큰 변화점입니다. 그러니 <자전거 탄 소년>에서 가장 크게 주목해야 할 궁극적 변화 지점이란 무엇이겠습니까. 그건 그들의 완강한 물리적 활동으로서의 영화에 뇌의 활동으로서의 부분적 개입이 영화의 정점을 통해 허용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위해 그들은 지금까지 손대지 않았던 뇌의 조작을 그리고 활동을 허용한 것일까요. 저는 오히려 이것이 리얼리티의 약화가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서 리얼리티 감각을 강화하기 위해서라고 느낍니다. 문제는 언제나 리얼리즘이 아니라 리얼리티 아니겠습니까. 이 장면의 경험으로 적어도 우린 한 가지를 확실히 알게 된 것입니다. 확실한 건 없다는 확실함 말입니다. 소년은 죽은 줄 알았지만 쓰러졌던 것이고 일어났습니다. 그러니 앞으로 어떤 일이 다시 일어나도 그건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 이 영화가 알려준 삶의 리얼리티의 확실성입니다. 그렇다면 저 멀리 자전거를 타고 프레임을 벗어난 소년이 사만다를 향해 가다가 다시 한번 후유증으로 쓰러질 것인지, 사만다에게 잘 돌아갈 것인지, 우린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게 이 영화의 진짜 리얼리티이기 때문입니다.
다르덴 형제가 다큐에서 출발한 감독들이라는 사실을 저는 기억하고자 합니다. 고다르는 연극과 극영화의 차이를 말하기 위해 연극에서 사람이 죽으면 극이 끝나고 그가 다시 살아난다고 관객이 당연히 믿지만, 극영화에서 사람이 죽으면 때로 그는 그 죽음으로 남는다고 했습니다. 이 말에 대한 저항적 인용인지 혹은 우연한 조응인지 알 수 없으나 다큐 감독 김동원은 극영화와 다큐의 차이를 지으며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면 그게 극영화이고 사람이 죽었을 때 정말 죽는 것이라면 그게 다큐라며 극영화와 다큐의 차이를 말한 적이 있습니다. 삶에서 죽음은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단 하나의 진실에 가까운 리얼리티이기 때문에 그런 말을 했을 겁니다. 다르덴 형제 영화 중 가장 순진해 보이는 이 영화의 에필로그에 이렇게 다큐적 세계관이 뇌의 활동 이후에 새겨져 있습니다. 결국 이 장면의 조작은 그 삶의 리얼리티를 역설하기 위한 조작으로 보입니다. 그러니 제 생각에 <자전거 탄 소년>은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한 소년의 동화라기보다는 한편의 영화가 어떻게 삶의 리얼리티를 순간 체험케 되는가를 질문으로 삼은, 리얼리티에 관한 동화처럼 보입니다.
세계에는 무수한 영화의 계열들이 존재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뇌를 조작하고 활동시키는 것으로 보이는, 그러나 외양적으로는 전혀 무관해 보이는 두편의 영화를 한 계열 안에서 말해보고자 했습니다. ‘마술 절도녀’와 <자전거 탄 소년>의 계열화 말입니다. 물론 마술 절도녀 사건은 실화일 뿐 실제 영화가 아닙니다. 그러나 제게 두개의 양상은 서로의 거울이자 서로의 영화적 현실로 보입니다. 그것이 바로 마술 절도녀를 예제로 놓고 <자전거 탄 소년>을 겹치면서, 동일한 분석법으로 두 영화의 몸통을 거치면서, 그럼에도 다른 결론에 이르려고 애쓴 이유입니다. 이것을 영화에 관한 두 가지 우화라고까지 말씀드리고 싶어집니다. 하나는 현실에서 어처구니없이 상영되었고 또 하나는 영화에서 기어이 현실성을 강화하려고 등장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술 절도녀는 감옥으로 갔고 다르덴의 영화는 우리를 감동으로 이끌었다는 차이가 있을 겁니다. 마침내 하나는 ‘현실 안에서의 영화(마술 절도녀의 영화)’이고 또 하나는 ‘영화 안에서의 현실(<자전거 탄 소년>)’인 것입니다.
“예술은 현실의 반영이 아니다. 반영이라는 현실이다.” 고다르는 그 명제를 믿는다고 강고하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줄곧 이 문장을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지금 이 순간의 저에게는 현실의 반영과 반영이라는 현실, 그 둘 다 중요해 보입니다. 조금 비틀어도 그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가령 <자전거 탄 소년>을 현실의 반영으로 놓고 마술 절도녀의 영화를 반영이라는 현실로 놓고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반대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위대한 영화평론가의 질문, 영화란 무엇인가 하는 그 대전제가 저는 늘 힘겨웠습니다. 그래서 종종 그걸 뒤집어 비추어서 ‘무엇이 영화인가’ 물어보고 싶어집니다. 그 예로서 뇌를 활동시키는 영화의 어떤 계열에 관하여 잠깐 탐색해보았습니다. 그저 이렇게 한번 질문해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무엇이 영화입니까, 아니 무엇들이 영화입니까, 어떻게 서로 영화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