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직업적 위기의식을 느꼈는데 그건 정치 때문이었다. 1년 내내 정치가 화두가 될 거라는 사실이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뜻밖의 상황은 ‘나꼼수’ 열풍이었다. 이 변종 방송에 힘입어 정치가 엔터테인먼트화하는 분위기가 뚜렷했기에 다른 엔터테인먼트는 대중의 관심 바깥으로 나가떨어지지 않을까 걱정했다는 얘기다. 게다가 정치 자체가 스타시스템을 중심으로 한 흥행전략을 주 노선으로 삼은 지는 오래되지 않았나. 어쨌거나 <씨네21>의 ‘밥줄’은 영화인 까닭에 사람들이 온통 정치에만 신경을 쓰고 영화를 나 몰라라 한다면 어떡하나 하는 우려가 있었다(눈치 빠른 이들이라면 이번 우리의 지면 개편에서 이런 점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기우였다. 극장은 사람들로 들어차 있고 TV는 여전히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으며 프로야구장은 뜨겁다. 영화진흥위원회의 통계에 따르면 심지어 총선이 있었던 4월 극장 관객 수는 1197만명을 기록해 지난해보다 59.2%나 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한국영화도 전례없는 호황을 누리고 있다. <댄싱퀸>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 <건축학개론> 등 400만명을 동원한 영화가 3편이나 나왔다. 350만명 이상이 본 <부러진 화살>이나 100만 관객을 넘긴 <간기남> <시체가 돌아왔다> <은교>처럼 다소 흥행성이 떨어진다고 평가된 영화들도 좋은 성적을 올렸다. 여기에 240만명의 <화차>, 170만명의 <러브픽션>, 160만명의 <하울링>, 100만명의 <점박이: 한반도의 공룡 3D> <원더풀 라디오>까지 넣으면 한국영화는 최근 들어 최고의 흥행을 기록한 듯 보인다. 실제로 1/4분기 전체 영화관객은 4천만명 선으로 지난해보다 600만명가량 늘었는데, 이 늘어난 600만명 중 500만명이 한국영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정도면 직업적 안도감을 가질 만도 한데 좀 이상하다. 2012년 초반 한국영화가 다른 해에 비해 유난히 뛰어났다거나 특별히 대중친화적이었다고 판단할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나는 관객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극장에 간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콕 집어 말하기는 그렇지만 몇몇 영화의 경우 예년 같으면 기껏해야 30만명이나 들까말까한 내용이었는데도 100만 관객이 든 것이다. 여기서 다시 한번 비약하자면, 그 이유는 혹시 정치라는 엔터테인먼트가 실패한 탓 아닐까. 사람들은 슈퍼히어로물이나 잘 짜인 반전드라마를 기대했는데 결과는 막장 드라마나 삼류 코미디였던 게 아닐까. 민주통합당의 잇단 헛발질, 통합진보당의 어이없는 작태(유일하게 자명하면서 다행스런 사실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NL파의 30년 권세가 무너질 것이라는 점이다)를 보고 있노라면 사람들이 왜 극장의 동굴로 숨으려 하는지 짐작하게 된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정치권, 특히 야권에 감사하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동시에 그들을 다 엎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