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건축가다. 대학 시절엔 정릉에서 살았다. 그리고 제주도 해안가에 주택을 설계했다. 이렇게 써놓으면 <건축학개론>이 마치 나를 소재로 한 것(이라고 내가 주장하는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누구라도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자기 이야기인 것 같은 느낌을 받을 것이다. 그렇지, 나도 스펠링 잘못된 영어 글씨가 새겨진 옷 입고 다닌 적 있어. 그때 그 휴대용 CD플레이어는 지금 어디에 처박혀 있지? 삐삐 없었을 땐 어떻게 살았는지 몰라. 얼굴은 뺀질뺀질한데 입은 쓰레기통이었던, 하지만 마음만은 푸근했던 그 친구는 지금 어디서 뭐하나. 그리고 그때 그 여자, 혹은 그 남자….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누구나 “이거 내 이야기 아냐?”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승민의 대학 시절 여자친구, ‘썅년’이 누구였을지 궁금해하는 서연의 대사, “근데 왜 그게 나 같지?”처럼.
이렇게 저인망처럼 많은 이의 삶을 거두어 담는 효과는 어디에서 왔을까? 우선 고증이다. 불과 십 몇년 전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 ‘고증’이란 개념을 적용한다는 것이 이상하지만, 오히려 시대가 멀지 않기 때문에 더 어려울 수도 있다. 중요한 소품의 하나인 CD플레이어에 붙어 있는 엠보싱된 서연의 이름이라든지 혹은 H.O.T 스타일의 배기팬츠 같은 것들이 그런 예다. 하지만 딱히 그런 개별적 요소의 문제만은 아니다. 디테일에 대한 보기 드물게 전방위적인 집념이 이 영화를 탄탄하게 만든다. 나는 두 주인공이 아파트에 올라 내려다보는 개포동의 풍경에서, 감독이 1990년대 중반 이후에 지어진 건물을 하나하나 확인해서 컴퓨터작업으로 지웠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건축 또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이 영화의 중요한 요소다. 현역 건축가로서 내게 가장 흥미로웠던 대목은 애초 신축으로 가려고 했다가 증축 및 레노베이션으로 변경되는 대목이다. 이건 생각보다 큰 사고의 전환을 필요로 한다. 사람에 대해서, 건축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의 삶에 대해서. 지워버린 뒤 새로 짓기보다 남겨두고 보듬고 거기에 새살을 덧붙이는 그 과정 자체가 이 영화의 줄거리 아닌가. 주인공들이 그 이전과 이후 마치 다른 사람처럼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관객은 알았으리라.
내가 건축가로서 영화 매체에 글을 쓰는 이유도 결국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다. 건축이 배경으로, 혹은 소품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와 내용적으로 단단하게 결합되어 있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이것은 나아가 보편적으로 창작에서 부분과 전체가 맺는 관계에 대한 관심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처럼 온갖 유명한 건축이 수도 없이 등장하지만 그냥 환상적인 배경 이상의 역할이 없는 영화에 대해 내가 글을 쓸 일은 없다.
<건축학개론>은 ‘건축에 대한’ 영화인가? 그보다는 소재와 주제를 유기적으로 치밀하게 결합한, 잘 만든 영화라는 사실이 더 중요할 것이다. 이건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창작의 질에 대한 이야기다. 생각보다 이런 영화는 흔치 않은 것 같다. 좋은 건축이 별로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