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터/액트리스]
[김동욱] 서른살의 성인식
2012-06-07
글 : 이주현
사진 : 최성열
<후궁: 제왕의 첩> 김동욱

샛노란 니트를 입고 카페 의자에 앉아 있는 김동욱을 보고 누가 서른이란 나이를 읽어낼 수 있을까. 차가운 냇물에서 막 건져낸 것 같은 말간 얼굴엔 세월의 흔적조차 새겨져 있지 않았다. <발레교습소>로 데뷔한 이후 8년이 흘렀는데도 변함없는 얼굴. 물론 10초면 여자를 홀릴 수 있는 꽃미남 하림(<커피프린스 1호점>)의 사근사근함이나 푸들 머리를 한 스키점프 선수 흥철(<국가대표>)의 귀여운 깐죽거림도 찾아볼 수 없었다. 헐렁하게 망가지기 일쑤였던 인물들(<반가운 살인자> <로맨틱 헤븐>)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성격. 홑꺼풀의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얘기하는 것만 여전했지, 김동욱은 꽤 낯선 분위기를 풍기며 서 있었다. 그는 아직 <후궁: 제왕의 첩>(이하 <후궁>)의 성원대군에 머물러 있는 듯 보였다. 화연(조여정)에게 첫눈에 반하지만 왕의 여자이자 형의 여자가 되고 만 그녀를 끝내 잊지 못하는 남자. 탐하지 말아야 할 것을 탐한 남자. 그가 성원대군이다. 김동욱은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성원대군에 빠져들었다. “무언가 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마구 생겼다.” 김동욱은 <후궁>으로 혹독하게 성인식을 치른 것 같았다. 그의 유년기는 <후궁>을 만나며 막을 내렸다.

-<후궁> 개봉을 앞두고 몇몇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했는데요. 예능울렁증이란 말이 무색하게 침착하게 잘 적응하던데요.
=마음 단단히 먹고 나갔어요. 시키는 거 안 빼고 다 해야지 생각하고 열심히 했고요. 그런데 아직도 예능이 편하지 않은 건 사실이에요. 가끔은 상대방이 무슨 질문을 했는지 멍해지기도 하고.

-망설임 없이 <후궁>을 선택했다죠.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어떤 강렬함을 받았나요.
=시나리오를 쭉 읽으면서 이 작품을 놓치면 엄청 후회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잘되겠다는 확신과는 다른 차원이에요. ‘너무 어렵다,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보다는 일단 무조건 해야 한다 싶었어요.

-시나리오를 접할 당시의 심리상태도 중요하잖아요. <후궁>을 접할 당시 마음의 상태는 어땠나요.
=<후궁> 외에도 읽고 있던 시나리오들이 많이 있었어요. 그리고 개인적으론 많이 지쳐 있었고요. 쉬지 않고 작품을 해오면서 연기를 처음 하고 연기에 대해 처음 고민하던 때의 열정적인 모습이 점점 시들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그때 <후궁> 시나리오를 받았는데, 미안한 얘기지만 그전에 보고 있던 작품들은 싹 잊히면서 ‘그래 이거야’ 그랬어요.

-김대승 감독님은 성원대군이라는 인물을 맡기면서 어떤 당부의 말씀을 하던가요.
=제가 많이 힘들어했어요. 어려워하고. 그래서인지 힘을 많이 주셨어요. 끊임없이 캐릭터에 대해 같이 고민하고 같이 풀어나갔어요. 감독님과 생각을 나누다보면 거기서 또 창의적인 생각이 떠올라요. 그러면서도 감독님이 절대로 놓치고 가지 말아야 할 한 가지가 있다고 하셨는데, 역시나 성원은 화연을 너무나 사랑한다는 거죠. 모든 고민의 이면엔, 여리고 유약하고 억눌린 삶을 살던 성원이란 인간이 화연을 얼마나 절실하게 사랑하는가, 그것을 어떻게 절절하게 보여주는가 하는 게 있었어요.

-치밀하게 계산하고 분석하며 연기하는 방식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인터뷰를 본 기억이 있어요. 그런데 <후궁>에선 계산과 분석이 필요했을 것 같아요.
=예전엔 심할 정도로 계산적이었어요. 애드리브도 결코 현장에서 생각나는 대로 한 적이 없을 정도로. 대본에 모든 행동과 표정을 다 써갔어요. <커피프린스 1호점>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그랬는데, <커피프린스 1호점> 작업하면서 많이 바뀌었어요. 분석하고 계산하는 게 큰 도움이 될 때도 있는데 때로는 너무 제 발목을 강하게 잡더라고요. 사실 가장 좋은 건 그걸 적절하게 잘 활용하는 거죠. 그래서 전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고 싶지 않아요. 본능적으로 충동적으로 연기하는 게 필요할 때도 있고, 그런 모습이 나오길 바라는 순간도 있죠. 반대로 분석을 잘하지 않으면 안되는 경우도 있고요. <후궁>은, 연기하기 전에는 철저하게 고민하고 분석하고 현장에 가서는 그걸 토대로 부디 내 충동이, 내 감정이 그 이상 나와주길 기대하면서 연기했어요.

-정사 신을 찍을 때는 몸과 마음과 머리가 따로 놀아야 해서 힘들었을 것 같아요.
=힘들어요. 따로 노는 것처럼 보이면 안되잖아요. 약속된 합을 맞추면서 정해진 시간 안에 감정을 보여줘야 하고 상대방의 연기를 또 받아야 하고…. 아주아주 힘들고 격렬한 감정 신과 액션 신을 합쳐놓은 신인 거죠. 김대승 감독님은 촬영하면서 “동욱씨 어땠어요?” 하고 OK 사인을 내기 전에 꼭 물어보세요. 모니터로 연기 안 보시거든요. 현장에서 직접 배우의 눈과 호흡을 보세요. 그런데 제가 뭘 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고 말한 적이 몇번 있어요. 그럼 OK라고 넘어가세요. 저도 제가 어떻게 연기했는지 기억이 안 나는 순간들이 있었어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연기를 해야 했을 때 부자연스럽지는 않았나요.
=낯선 사람 앞에서, 낯선 환경에서 알몸이라는 부담과 어색함은 아주 잠깐이고요. 그건 정말 처음 벗었을 때 딱 거기까지만이에요. 그리고 행동의 제약이란 건 사실 기술적인 부분이에요. 촬영의 문제, 우리가 맞춘 호흡의 문제. 노출 신을 어떻게 촬영할지 이야기하면서 그런 건 이미 공유된 상태인 거죠. 내가 벗고 있다고 해서 어떻게 보여질까 부담스러워하고 행동에 제약받은 적은 많지 않아요.

-상대 배우에게 친밀감을 조성하려고 먼저 다가가는 편인가요.
=낯가림이 심한 성격인데 깨려고 많이 노력하고 있어요. 이번 작품에선 제가 막내이기도 했고요.

-애교도 많고 사교적인 성격일 거라 생각했어요.
=낯가리는 정도를 떠나 상대 배우와 눈도 안 마주칠 정도였어요. 작품을 계속하면서 이러면 안되는구나 싶더라고요. 상대 배우들이 너무 힘들어했어요. 그리고 제가 남자들하고 작품을 많이 했거든요. 남자들끼리는 진짜 잘 지내요. 그런데 여자분들과 만나면 말도 안 하고 인사도 안 하고 그랬어요. 심지어 어떤 상대 여배우한테선 자기가 뭐 잘못한 거 있냐고, 자기한테 화난 거 있냐는 얘기도 들었어요. 그 이후론 여배우들한테 말 많이 하고 먼저 장난도 치고 농담도 걸고 그랬던 것 같아요.

-학창 시절에 동성뿐 아니라 이성에게도 인기가 많았을 것 같은데요.
=글쎄, 그걸 제 입으로 얘기하기는 뭣하고요. (웃음) 남자들하고 어울리는 걸 훨씬 좋아했어요. 중학생 때는 여자친구가 있었는데, 여자친구의 친구들하곤 인사도 안 했어요. ‘굳이 하고 싶은 말도 없는데 말을 만들어서 할 필요가 있나. 내가 왜 이 친구들한테 친한 척 말을 걸어야 하지?’ 그랬으니까. 남자들이랑 어울려 다니면서 운동하고 그런 게 재밌었어요. 그런데 여자친구는 또 있었던 거 보면 신기하고.

-배우가 되고 나서 방황한 때가 있나요.
=<후궁> 하기 전까지 그랬던 거 같아요. 한 1년쯤. <국가대표> 끝내고 심했어요. 지난해 특히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많이 지치고 힘든 상태였어요. 진지하게 ‘정말로 그만두고 싶다, 진짜 그만할까’라고 생각할 정도로. 정확히 뭐가 힘들다, 이런 것도 없었어요. ‘이거 하나만 해결되면 안 힘들 텐데’가 아니었기 때문에 더 힘든 거 있잖아요.

-<후궁>을 만나고 변했나요.
=<후궁>을 할 때는 이 한 작품밖에 안 했는데, 그런데도 벅찼어요. <후궁>이 자극이 됐던 거 같아요. 다시 잘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고, 다시 한번 불사를 수 있겠구나 하는 마음이 생겼어요.

-차기작은 정해졌나요.
=아직은 결정한 거 없어요.

-요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생각들은 뭔가요.
=이것저것 너무 많아요. 자유롭게 어딘가 돌아다니고도 싶고, 연애도 하고 싶고, <후궁> 생각도 하고, 다음 작품은 뭘 하게 될까 싶기도 하고. 요즘 특히 생각이 많아요.

<씨네21> SNS (me2day.net/cine21road, www.facebook.com/cine21)를 통해 받은 독자들의 질문

-예전엔 독립영화나 단편영화를 많이 했는데 그때의 느낌과 상업영화나 드라마를 찍을 때의 느낌은 어떻게 다른지 궁금합니다. (밀크티_미투데이)
=작업환경이 많이 다르고요. 단편영화, 저예산영화들은 워낙 부족한 여건에서 이루어지다 보니 안타까운 것도 있지만 그만큼 서로가 더 끈끈해지고 헝그리 정신이 강해져요. 상업영화는 각자의 분야에서 뛰어난 실력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작업을 하다보니 서로에 대한 배려나 책임감이 강한 것 같고요. 전 둘 다 너무 재밌어요. 계속 왔다갔다하고 싶어요. 독립영화를 찍다보면 상업영화 찍는 것에 감사함을 느끼게 돼요.

-본인이 가장 섹시해 보일 때는 언제인가요. (tareicat_미투데이)
=글쎄요. 샤워하고 나왔을 때가 대부분이지 않나요. 깔끔하게 샤워하고 나와서 거울 봤을 때. 부기가 쫙 빠졌을 때.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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