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메테우스>는 이상한 영화다. 비판적인 사람들조차 흩어놓은 퍼즐을 찾아 조각을 배열하게 만들고 그 뒤의 의도를 들여다보게 만든다. 아니, 텅 비어 있을지라도 거기에 살펴볼 만한 뭔가가 있다고 믿게 만든다. 이 모든 효과를 유발하는 것만으로도 사실 대단한 영화일 것이다. 다소 실망스러웠지만 나 역시 몇번은 더 보고 싶어졌다. 몇몇 장면과 대사들이 외계의 점액질처럼 들러붙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엘리자베스 쇼가 자리했던 영화의 중심을 바꿔보고 싶었다. 일단 데이빗의 관점으로.
영화에 두번이나 등장하는 쇼팽의 15번째 전주곡, 보통 <빗방울>이라 부르는 곡은 인간보다 우월하고 죽지도 않는 데다 심지어 자유의지, 요컨대 욕망까지 가진 이 ‘로봇’의 테마처럼 흐른다. 연인 조르주 상드에 대한 애정과 쇼팽 자신의 악화된 여러 상황적 우울이 더해진 이 곡이야말로 ‘지나치게’ 인간 같은 사이보그를 위한 곡 같다. 그렇다면 따뜻하고도 슬픈, 모순적인 인상이 중요할 것이다. 데이빗은 실패한 피조물인가, 아니면 질문과 의지를 품고 성장한 피조물인가. 인간에게 그는 무서운 존재일까, 안타까운 존재일까. 어쩌면 리들리 스콧은 우리가 ‘창조주의 관점’에서 인간을 살펴보길 바랐던 건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