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터/액트리스]
[윤제문] 내겐 너무 귀여운 아저씨
2012-07-05
글 : 주성철
사진 : 오계옥
<나는 공무원이다>의 윤제문

바야흐로 윤제문 전성시대다. 연희단거리패와 76극단의 선 굵은 연극배우로 시작해 <남극일기>(2005)를 비롯해 <열혈남아>(2006)와 <우아한 세계>(2006) 그리고 <비열한 거리>(2006) 등 이른바 ‘조폭 아저씨’로 이름을 날리던 그가 어느덧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의 ‘가리온’과 <더킹 투하츠>의 ‘김봉구’를 거치며 동네 아줌마나 꼬마들도 그 이름을 아는 ‘연예인’이 됐다. 그가 <이웃집 남자>(2010)에 이어 다시 한번 주연을 맡았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자유로운 캐릭터의 변신과 배우로서의 성장 궤적 자체가 경이롭다. 그에게는 단순한 눈빛과 표정만으로도 작품 전체의 정서를 휘감아드는 카리스마가 있다. 그 카리스마는 갈수록 친근한 맛을 더해가고 있다. 그런 그가 <나는 공무원이다>의 정감 넘치는 ‘아저씨’로 변신했다. 베이스 기타를 든 가리온, 구청장님의 눈치를 보는 김봉구랄까, 어쨌건 참 귀엽다.

<나는 공무원이다>의 윤제문은 아주 깔끔한 남자다. 마포구청 환경과 생활공해팀의 ‘한대희’ 주임. 7급 9호봉을 받고 있으며 파워포인트를 잘 다뤄 각종 보고서에 관한 한 능수능란하여 동기들보다 승진이 빠를 것으로 예상된다. 여자친구는 있다 없다 하고 홍대 상권의 번영을 일찌감치 예견하여 허름하나마 자신의 집도 장만했다. 밀려드는 민원에도 언제나 평정심을 유지할뿐더러 지상 최고의 직업이 공무원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언제나 칼퇴근하며 ‘유재석, 강호동과 보낸 10년’의 시간, 전혀 지루할 틈이 없다. 도대체 동료들은 왜 허구한 날 힘들다는 타령인가. 세상에 이렇게 멋진 직업이 또 어디 있다고! 지금껏 영화나 드라마의 윤제문이 어딘가 미스터리하고 쉬이 가늠하기 힘든 캐릭터였다면 이 얼마나 단순명쾌한 모습인가. 여전히 그가 화를 낼 때는 누군가가 그에게 맞을 것 같고, 무표정일 때는 다른 꼼수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렇기 때문에 윤제문을 바라보는 재미는 더욱 배가된다. 어쨌건 그런 그가 만족스런 공무원 생활을 위협하는 예상치 못한 위기에 맞닥뜨린다. 바로 어린 친구들의 밴드에 베이스 파트로 가담하게 된 것. 그렇게 윤제문은 가장 귀여운 남자로 다시 태어난다.

정감과 상실을 연주하다

여자 아이돌 그룹 2NE1을 좋아하긴 하지만, 그리고 상식백과사전을 달달 왼 까닭에 세계 3대 기타리스트가 누군지도 알지만, 평생 음악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던 한대희가 밴드 내 불화로 키보드 미선(송하윤)과 드럼 영진(서현정), 그리고 보컬 민기(성준)만 남은 밴드 ‘삼삼은구’에 베이스로 긴급 투입된다. 부동산 계약 과정에서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갈 곳 없어진 밴드 멤버들을 지하에 머물게 해준 것이 화근이었다. 동료 공무원(유승목)의 반응은 당연히 “미쳤어?”다. 그래 누가 봐도 미친 짓이다. 어쨌건 그렇게 그는 삼삼은구의 멤버가 된다. 송강호가 연기한 <반칙왕>(2000)의 또 다른 버전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의욕이 앞선 나머지 따라가지 않는 손을 책과 머리로 커버하려 든다. 음악을 하는 데도 ‘공무원 습성’을 발휘하게 되는 것. 그로 인해 ‘사대주의 쩌는 서양 록덕후’ 혹은 ‘아는 척만 안 하면 참 좋은 아저씨’ 같은 얘기도 듣지만 어쨌건 열심히 배운다. 오랜 친구였던 유재석, 강호동과도 작별을 고했다. 왜? 베이스 기타가 재밌으니까.

TV 예능프로그램에서 클래식 기타를 연주하며 의외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던 윤제문은 실제로 악기들을 꽤 준수하게 연주한다. 그저 “대금 소리가 좋아서” 군대 가기 전에 대금을 배웠고, 클래식 기타도 “너무 좋아 보여서” 고등학교 다닐 때 익혔다. 그 시기 좋아했던 건 서양 록그룹이 아니라 바로 ‘들국화’다. 그렇게 불현듯 익힌 것치고는 포기하지 않고 꽤 열심히 배웠다. 그런 게 그의 성격이다. <인류멸망보고서>의 <멋진 신세계> 에피소드에서 방송 토론 프로그램 패널로 나와(그가 주병진을 닮았다고 생각한 임필성 감독은 ‘주제문’이라는 역할을 부여했다) 퉁소를 연주하는 장면도 직접 해낸 것이다. 그렇게 윤제문은 예정된 삶을 쭉 살아갈 것 같던 남자가 음악에 빠져드는 모습에 매력을 느꼈다. “모처럼 정감 가는 캐릭터를 만났다”는 게 한대희를 연기한 이유다.

과거 IMF가 터졌을 때 공공근로사업을 한 적은 있지만 주변에 공무원 친구도, 음악 하는 친구도 없는 그가 한대희를 연기하며 떠올렸던 건 옛날 자신의 집에 세들어 살던 한 형이다. 그래, 그는 ‘엄친아’까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주인집 아들’이었다.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서만 30년 넘게 살았다. “백수 형이었는데 늘 집에만 있었다. 정말 아무 일도 안 하고 TV에서 하는 야구만 보는 형이었는데, 머리는 파마를 해서 집에만 있어도 헤어스타일만큼은 늘 정성껏 관리했다. 그런데도 어쩜 그리 평화로워 보이는지. (웃음)”

동시에 젊은 친구들처럼 헤어스타일을 매만지고 어울리지 않는 티셔츠를 입고 변화에 들뜬 한대희의 모습만 보여주는 것이라면 윤제문의 매력이 100% 살아나지 못했을 것이다. 무대에 서기로 한 날, 폭설이 내려 모든 공무원이 총동원되고 그는 어떡해야 할지 망설인다. 어쩌면 밴드의 꿈은 스쳐지나가는 망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손은 베이스 기타의 피크를 잡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도장을 찍고 파워포인트를 작성하는 데 더 어울리는지도 모른다. 한바탕 소동이 지나가고 난 뒤 옛 멤버들을 다시 마주했을 때의 그 표정, 말하자면 윤제문만이 보여줄 수 있는 그 모호한 표정은 정말 압권이다. “한번 해봤으면 됐지” 하는 그 무언의 상실감 가득한 표정. 구자홍 감독은 그 상황에서 한대희가 마음속으로 내뱉었을 법한 그 말을 윤제문에게서 듣고는 무릎을 쳤다.

미묘하고 소소한 변주의 힘

그저 ‘인상 더러운’ 충무로의 대표적인 ‘조폭 아저씨’였던 윤제문이 지금에 이른 데는 <차우>(2009)의 포수 ‘만배’와 <이웃집 남자>의 부동산업자 ‘상수’를 빼놓을 수 없다. 이전과 별 다름없는 사납고 냉정한 얼굴로 능청스런 코믹 연기를 보여준 <차우>는 그에게도 ‘팬’이 생겼음을 알려줬고, <이웃집 남자>는 한 남자의 흥망성쇠를 통해 그의 연기 스펙트럼이 얼마나 폭넓은지 실감하게 해줬다. 흥미로운 건 대사를 지우고 보면 언제나 그의 모습이 비슷하다는 데 있다. 특별히 코믹한 표정을 짓지도 감정을 폭발시키지도 않는다. 언제나 느릿느릿 말하고 상대방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다. ‘평정심의 대가’란 표현은 한대희에게도 어울리고 윤제문에게도 딱 들어맞는다.

지금의 윤제문이 모두가 알아보는 ‘연예인’이 된 데는 세편의 드라마의 공이 크다. 성질 고약한 재벌 2세로 나와 함께 연기한 김희애의 극찬을 받았던 <마이더스>, 조선 제일의 백정이면서 형사 사건의 검시관으로 세종(한석규)의 총애를 받는 가리온을 연기한 <뿌리 깊은 나무>, 그리고 엄청난 자금력으로 전세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다국적 군사복합체의 회장 김봉구를 연기한 <더킹 투하츠>. 특히 능청스런 웃음 뒤에 서늘한 기운이 서린 가리온은 윤제문의 또 다른 발견이라 부를 만했다. “영화 <그림자 살인>에서도 1인2역을 했는데, 가리온은 보다 입체적인 캐릭터였다. 내면의 변화를 스스로도 감지하기 힘든 비밀스런 인물이라는 게 중요하다. 그 어떤 일도 할 각오가 돼 있는 인물”이라는 게 그의 얘기다.

실제로 드라마를 통해 얻게 된 인기를 실감하고 있는 요즘이다. “지나가다가 ‘어?’ 하면서 적당히 얼굴 알아봐주는 사람들은 많았는데 누군가가 정확하게 ‘윤제문’이라고 이름을 불러주며 알아봐준 것이 <뿌리 깊은 나무>였다. 가리온한테 아주머니 팬들이 꽤 있더라. (웃음) 얼마 전에는 동네에 나갔다가 꼬마들이 ‘김봉구다!’ 그러기에 신기해서 ‘나를 알아?’ 하고 물어본 적도 있다. (웃음)” 최근 1, 2년간의 급작스런 변화에 대해 한대희처럼 대응하며 살고픈 것이 그의 바람이다. 어떤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의 대가로 살겠다는 건 ‘공무원 한대희’에게나 ‘배우 윤제문’에게나 똑같이 중요하다. 지금의 윤제문은 유준상, 황정민, 유해진 등과 함께 캐스팅된 강우석 감독의 <전설의 주먹>에서 한물간 건달로 변신하기 위해 서울액션스쿨에서 굵은 땀방울을 흘리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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