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부터 영화를 볼 때마다 그 영화에 대한 전체적인 인상과 주인공의 얼굴에서 받는 느낌이 일치하는 경험을 종종 하곤 했다. <대부>에서 돈 콜레오네를 연기한 말론 브랜도의 깊게 음영진 눈그늘과 고집스레 툭 불거진 아랫볼이 미국사회의 급속한 변화 이면의 어두운 욕망과 피로, 그리고 적대적 사회와 맞대응하면서도 그 사회를 폭력적으로 닮아가는 자의 고집과 권태를 드러낸다면 <올드보이>에서 오대수를 연기한 최민식 선배의 마치 메두사를 연상케 하는 갈기머리와 도려내어질 듯 퀭한 눈은 자신도 알지 못하는 운명의 굴레에 갇혀 절뚝절뚝 비극의 심장으로 걸어가는 오이디푸스의 고독한 표정과 닮아 있다.
며칠 전 우연히 다시 꺼내 보게 된 이와이 슌지 감독의 <하나와 앨리스>의 아오이 유우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여고생에게 바라는 모든 긍정적인 미소를 그 자그마한 얼굴에 모두 갖고 있는 아리스는 제발 그 미소를 머금은 채 그 나이 그대로 멈춰주길 바랄 정도로 아찔하게 사랑스럽다. 아빠/엄마와의 관계에 대한 조금 더 속깊은 이해, 친구 하나와의 조금 더 속깊은 우정, 소나기 같던 풋사랑에 거리를 둘 줄 아는 여유, 마지막 장면의 발레 동작과 같은 세상을 향한 날갯짓 등 겉으로 드러난 설정으로 이 영화를 성장영화라고 본다면 감독의 음험한(?) 진짜 의도를 놓치는 것이다.
이와이 슌지 감독은 오히려 아리스가 나이를 먹고 성장하면서 하나와 사소한 이유로 헤어지고, 부모를 지겨워하게 되고, 남자들의 구애에 끌려다니고 그리고 발레를 그만두게 될까봐, 그래서 결국 그 미소를 잃게 될까봐, 안타까운 심정으로 이 영화를 만든 듯 보인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 토끼굴 속 이상한 나라에 빠진 앨리스처럼 3월 토끼에게도, 모자 장수에게도, 담배 피우는 누에벌레에게도 늘 상냥한 미소를 잃지 않는 앨리스로 남아주기를, 그래서 우리 모두 가끔씩 그 미소 안에서 쉴 수 있도록….
이 매력적인 반동성에 생생한 얼굴을 부여한 이는 물론 아리스 역의 아오이 유우다. 그녀는 뭔가를 하려다 자꾸 머뭇거리고 친구와 얘기할 때도 건성으로 딴 데를 쳐다보다가 누가 물어봐도 딱히 할 말이 없으면 얼버무린다. 여고생들의 모습 그대로다. 카메라는 어떤 순수한 경외감을 가지고 이런 딴짓을 끈질기게 응시한다. 등장인물들이 뭔가를 해야 한다는 목적의식으로 눈을 반짝거리게 하지 않는 일, 역설적이게도 이런 시선이 그들을 살아 펄떡이는 인물로 만들어낸다.
채광을 충분히 활용하는 이와이 슌지 감독의 영화답게 이 영화 또한 빛과 피사체를 굳이 구분하려 하지 않는다. 그 어울림이 마치 가장 근사한 순간인 양 가장 탐미적인 장면들에 할당된다. 영원히 반복되는 자연의 빛이 반듯한 이마와 환한 미소를 가진 소녀의 미소와 만날 때 아름다운 생명력을 지속적인 찰나로 기억하려는 <하나와 앨리스>의 표정이 만들어지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