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맨은 처음으로 내게 하늘을 나는 꿈을 꾸게 해준 영웅이지만, 그의 옷차림만은 늘 못마땅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힘이 세고 빠르며 거기에 잘생긴 얼굴과 부드럽고 신사다운 매력까지 겸비한 불사신인 그가 어째서 쫄쫄이까지 입어야 한단 말인가!- 그의 활동배경이 되는 1930년대에는 아직 스판덱스가 발명되지 않았으니 소재는 아마도 나일론이었을 것이다- 그건 일종의 모함으로까지 느껴졌다. 그를 창조한 작가가 그의 비범한 능력과 외모를 선망하면서도 질투한 나머지 그에게 우스꽝스러운 복장을 입힌 것이 아닐까, 하는….
어쨌든 슈퍼맨이 딱 달라붙는 복장의 영웅 이미지를 워낙 강하게 정착해놓아서인지 배트맨을 처음 봤을 때 별다른 거부감이 일지 않았다(배트맨의 검정 쫄쫄이가 그다지 싫지 않았던 건 내 마음속에서 배트맨은 ‘나쁜 X’의 이미지가 강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마침내 영화 <스파이더맨>이 나왔을 때, 나는 드디어 쫄쫄이가 몇 십년 만에 제 주인을 만났다는 생각을 했다.
세상의 수많은 영웅 중 스파이더맨에게 유독 정이 가는 건 스판덱스가 가장 잘 어울리며 꼭 필요한 인간적 영웅이기 때문이다. 그의 스판덱스 복장은 위협적이거나 과시적이지 않은 데다가 무엇보다 그것을 선택하기까지 고등학생인 피터 파커가 했을 순진한 발상이 좋다. ‘스판은 강하고 질기고 신축성이 좋고, 가벼워서 활동하기 편하고, 옷 속에 껴입고 다닐 수도 있고. 더러운 것도 잘 묻지 않아. 그러니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소재야.’ 얼마나 나름대로는 의욕적이고 진지하면서도 발랄하고 겸손한 발상인가. 그는 망토나 벨트조차 걸치지 않고 총이나 칼 한 자루 지니지 않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스판 복장을 하고는 도시의 빌딩을 수도 없이 타고 넘는다. 악당을 추격할 때도 하늘을 날거나 순간이동을 하거나 혹은 크게 점프하는 능력이 없어서 혹은 그렇게 해줄 첨단장비가 없어 맨몸으로 수십번 거미줄을 발사시켜 ‘사지육신’의 힘을 다 써서 구름사다리를 타듯 이동한다. 무기 한방으로 악당을 처단하기보다는 여기저기를 왔다갔다 바삐 오가며- 악당이 한번 움직일 때 본인은 대여섯번쯤은 움직여서- 거미줄로 꽁꽁 묶은 다음, 악당이 자기 무기나 힘으로 자멸하게 만든다. 세상에 이처럼 비폭력적으로, 거기에다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며 열심히 쉴새없이 싸우는 영웅이 또 있을까? 스판덱스는 그의 그러한 비폭력적이고 활동량 많은 액션 스타일을 잘 대변하는 복장이다. 아, 세상의 정의 구현을 위해 아무 불평없이 그 민망한 스판 의상을 입는 캐릭터라니, 게다가 그 질기고 신축성 좋은 소재가 매번 찢어지고 구멍 나고 너덜너덜해지도록 열심히 싸우는 캐릭터라니. 어찌 스파이더맨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