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어른들 손에 이끌려 대학로에 <남자충동>이라는 연극을 보러간 적이 있다. 끓어오르는 에너지를 토해내는 배우들 사이에서 웬 희한한 아저씨가 눈에 들어왔다. 머리에 비해 왜소한 몸이 단연 돋보였는데, 그보다 사투리와 표준어 사이에 애매하게 다리를 걸친 말투나 시퍼런 식칼을 들고 엉거주춤하게 무대 위를 누비는 몸놀림은 더 이상야릇했다. 알고 보니 <올드보이>에서 오대수에게 앞니를 왕창 뽑히고 ‘손모가지’까지 헌납하셨던 그분이었다. 전혀 전형적이지 못한 그 아저씨는 이듬해 <주먹이 운다> <달콤한 인생> <친절한 금자씨>로 3연타를 날리며 한국의 작가 감독들의 키플레이어가 됐고, 지금껏 무려 50여편에서 주•조단역으로 등장하며 높은 승률을 기록해왔다. 올해는 <도둑들>로 지난해 <조선명탐정: 각시투구꽃의 비밀>에 이어 2연타 홈런을 날린 참이다. 그에 비하면 그 뒤를 이을 <공모자들>의 경재와 <미운 오리 새끼>의 아버지는 소박한 직구 승부를 보여준다. 경재는 스릴러, 아버지는 부성 드라마의 공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다른 배우였다면 자칫 심심했을 이 선택은 그러나 오달수의 것이기에 꽤 삼삼하다. 연신 “아쉽다”는 그의 겸손도 잘 가려들어야 좋다. 여전히, 그리고 여실히, 그의 “애매모호”한 타법은 진화 중이다.
-8월30일에 <공모자들>과 <미운 오리 새끼>가 동시에 개봉합니다. 2005년에도 <주먹이 운다>와 <달콤한 인생>으로 같은 일이 벌어졌던 기억이 납니다.
=박쥐처럼 왔다갔다 해야죠. (웃음) 양쪽 모두 배려하기 어려운 상황이 생기기도 하니까 배우에게 그리 좋은 일은 아닙니다. 운이 안 좋은 거죠.
-그사이 <도둑들>은 무려 1200만명을 넘었습니다.
=한국 관객에게 엄청 감사한 일이에요. 간만에 나온 1천만 영화기도 하고.
-지난해 <조선명탐정: 각시투구꽃의 비밀>에서 개장수로 활약한 뒤 작품 수가 크게 늘었습니다. 출연작의 폭도 작가 감독들의 영화에서 다양한 장르의 상업영화로 넓어졌고요. 변화를 체감하십니까.
=잘 모르겠어요. <조선명탐정: 각시투구꽃의 비밀>이 출연 분량이 제일 많은 영화기는 했지만, 역할에서 크고 작음은 있을 수 없죠. 아닌가, 있을 수도 있나? 그렇다 해도 제가 거기에 맞춰 쉽게 변하는 스타일이 아니라서요.
-<공모자들>에서 장기매매에 가담하는 출장외과의 경재는 오달수라는 친근한 배우가 없었더라면 징글징글하기만 한 인물이 됐을 것 같습니다.
=사람이 남의 배를 갈라 장기를 꺼내서 팔아먹을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징글징글한 거죠. 센 거죠. 그리고 그게 다라면 그런 역할은 하면 안되죠. 근데 다행히도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나중에 밝혀지니까요. 그게 얼마나 타당해 보일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언젠가 ‘악역도 연민이 느껴지게 연기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경재는 관객에게 영규(임창정)가 얼마나 불쌍한 놈인지 일러주는 해설자 같습니다. 웃음기는 빠졌고요.
=그러다 힘이 들어간 것 같아요. 제가 나오지 않는 장면이나 다른 인물들과의 조화를 생각하다보니 장르의 틀에 갇혔던 거죠. 가능하다면 힘을 빼려고 하는 게 연기잖아요. 그래야 믿음이 가니까. 근데 이번에는 힘을 빼는 과정이 부족했던 것 같아요.
-감독님이 테이크를 많이 가는 스타일이었다고요. 연극은 일회성에 모든 것을 거는데, 영화는 반복성을 요구하잖아요. 애드리브의 폭이 넓은 배우로서는 테이크가 늘어날수록 곤혹스럽지 않은지요.
=테이크를 많이 가면 더 좋아지는 배우가 있고 더 나빠지는 배우가 있는데, 저는 후자인 것 같아요. 제 스스로 신선하다고 느껴야 잘 나오나봐요. 감독님들도 주로 두 번째나 세 번째 테이크를 많이 쓰더라고요.
-경재 덕분에 생애 첫 베드신을 아주 혹독하게 치렀다는 기사가 많이 있던데, 베드 신으로 얻은 것과 잃은 것이 있다면요.
=얻은 건 민망함, 잃은 건 편집된 장면들? 감독님이 찍어놓고 나서 수위가 너무 높다고 판단했나봐요. 한번은 상대가 중국 배우였는데 이 친구가 촬영 내내 뭘 홀짝홀짝 마시는 거예요. 알고 봤더니 술이더라고. 자기도 힘들고 민망하니까 술의 힘을 빌렸던 모양인데, 밤샘 촬영이었으니까 밤새도록 마셨다는 뜻 아냐. 그거 진짜 힘들거든요. 내가 해봐서 알지. (웃음)
-<미운 오리 새끼>의 곽경택 감독님과는 술자리가 아닌 현장에서 만나니 어땠습니까.
=평소에도 그렇지만 현장에서도 시원시원하시더라고요.
-곽 감독님의 단편 <영창이야기>를 본 기억 때문에 <미운 오리 새끼>도 흔쾌히 승낙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군대를 안 갔다왔어요. 신체검사 당시 2년 정도 치료를 요하는 진단서가 나와서 면제받았죠. 군대를 안 가본 사람으로서 신기하고 충격적인 단편이었어요. <미운 오리 새끼>도 그 연장선상에 있는 영화니까 주저하지 않았죠.
-<도둑들>과 겹치는 바람에 맡은 분량을 3회차에 몰아 찍으셨죠. 촉박한 일정 속에서 독재정권에 맞서 싸우다가 고문당해 정신을 놓아버린 인물 안에 들어갔다 나온 걸 생각하면 놀랍습니다.
=심리적인 문제가 있는 역할일수록 내 마음이 그쪽으로 많이 가 있어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어요. 역할에 푹 빠져 사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그런 작업이 필요한 역할이 있거든요. 그럴 때는 깊숙하게 들어가줘야 하는데.
-‘연기한다’ 대신 ‘각(覺)한다’는 표현을 씁니다.
=사는 것 자체가 깨닫는 과정이듯이 연기도 각하는 과정이라는 뜻으로 한 말이에요.
-아들 낙만이가 그럽니다. ‘육방(6개월 방위) 생활 육개월 동안 깨달은 사실은 이 세상에는 나보다 훨씬 억울한 사람들이 많다는 거다.’ 돌이켜보면 억울한 캐릭터를 주로 맡아왔습니다.
=억울한 일이 많았던 인생은 아닌데, 그렇게 보이나봐요. (웃음) 한편으로는 관객이 그런 인물들을 보고 싶어 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웃을 일이 드문 시대에 웃음을 주니까요. 낙만이 아버지는 좀 다르지만.
-<도둑들>의 앤드류는 진짜 영국 왕자 이름에서 따온 건가요.
=감독님이 그러대요. 나는 잘….
-‘가오가 없어서’ 오히려 ‘가오가 사는’ 도둑이었습니다.
=도둑‘들’ 중 하나니까, 있는 듯 없는 듯 연기했죠. 제 기억에 오래 남아 있을 캐릭터예요.
-어떤 면이 특히 맘에 들었습니까.
=헤어가…. 이국적이라고 해야 하나. <올드보이>에서 최민식 선배가 했던 스타일이랑 비슷하기도 한데, 여튼 헤어가 제일…. (웃음)
-중국어 연기에도 특유의 억양이 묻어 있습니다. 김윤석씨에 따르면 “마카오 박이 쓰는 중국어는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쓰는 중국어고, 앤드류가 쓰는 중국어는 밤 10시부터 새벽 5시까지 쓰는 중국어”라고요.
=그랬다면 다행인데, 촬영에 임했던 제 태도를 떠올려보자면 중국어만 나오면 졸아서 외운 대로 충실하게 하는 데 급급했던 것 같아요. 말하고 표정하고 같이 가야 하는데.
-몸동작의 리듬도 독특하잖아요. 배우의 아우라의 구성성분 중 하나가 그 배우만의 운율임을 느끼게 합니다. 봉준호 감독은 심지어 <괴물>이 움직이는 방식에 아이디어를 준 모델 중 한명이었다고 밝혔던데요.
=그런 말을 했어요? 칭찬이네. 제가 몸을 적극적으로 쓰는 편은 아닌데. 아마도 연극 무대에서 표정으로 모든 걸 보여줄 수 없으니까 감정을 표현하는 또 다른 방법을 찾았던 게 그런 식으로 나온 게 아닐까요. 그래서 한때 잠깐 마임도 배웠었는데, 내가 생각한 대로 딴사람이 느끼게 하기가 참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관념을 몸으로 표현해낼 수 있다면, 그게 최고의 경지겠죠.
-관객과 통했다고 느꼈던 작품을 꼽는다면요.
=<올드보이> 때 감독님 디렉션이 ‘애매모호하게’였거든요. 저는 그게 무슨 뜻인지 너무 잘 알겠더라고요. 이쪽도 저쪽도 아닌 연긴데, 관객도 그런 것들을 읽어낼 때 참 놀랍죠.
-너무 애매모호한 주문인데요.
=아닌데. 얼마나 명쾌한 주문인데. (웃음)
-요즘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한국영화는 오달수가 나오는 영화와 안 나오는 영화로 나뉜다.’
=억울한 역을 많이 맡는 것보다 이런 말 들을 때 진짜 억울해요. 무슨 말이냐면, 언젠가 뉴스에 제 얘기가 나왔는데 마지막에 기자가 기자정신을 발휘해서 저와 같은 현상이 충무로 배우의 기근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생각은 좀 접어줬으면 좋겠다는 거죠. 특정 시기에 제 영화가 몰려 있어서 그렇지, 1년에 쏟아지는 한국영화가 얼마나 많고 좋은 배우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영화를 시작한 지 올해로 만 10년째입니다.
=연극까지 합치면 20년이 넘었으니 배우로서 중간 점검을 할 때가 됐네요. 그동안 너무 정신없이 달려왔어요. 좋은 지적 감사.
-하반기 라인업에 <자칼이 온다>와 <12월23일>(가제)도 대기 중입니다.
=<자칼이 온다>에서는 자칼을 잡으러 내려온 서울 형사들의 초조한 마음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태평한 시골 형사로 나와서 좀 코믹할 거고, <12월23일>에서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아버지와 한방에 사는 방장으로 나오는데 전체적으로 가슴 따뜻하고 슬픈 이야기가 될 겁니다.
-가끔 촬영없는 날에는 뭐 하면서 숨 돌리세요.
=(술잔을 기울이는 듯 손목을 까딱까딱하며 미소)
-어디선가 나이 들수록 술은 못 이기겠다고 한 말씀이 기억나네요.
=술은 이기려고 하면 안돼요. 그러다 더 큰일나요.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