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머니에 손 넣으면 혼나는데. (웃음) 집사람이 거만해 보인다고 조심하라고 하더라고.” 농담처럼 던진 말이지만 사서 할 만한 걱정 같다. <도가니>로 단숨에 명품조연으로 등극한 배우 장광.
그는 장애아동을 성폭행하는 쌍둥이 형 교장과 동생 행정실장으로 분해 악마의 가면을 벗겨냈고, 같은 듯 다른 두 악마의 얼굴은 대중의 기억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을 잔영을 남겼다. 하지만 여기 그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한 선인이 반전을 꾀하고 있다. <광해, 왕이 된 남자>(이하 <광해>)에서 광해군의 가게무샤를 아버지의 마음으로 보살피는 내시조 내관이다. 우직한 무표정과 은은한 미소 속에 비극과 희극을 아울러야 하는 인물을 맡아 그는 또 한번 자신의 최고 무기가 목소리만은 아님을 증명한다. 연기 좀 하는 성우가 아니라 목소리 좋은 배우임이 여실하다. 거기다 <내가 살인범이다> <음치클리닉> <26년>도 대기 중이다. 예순에 변신의 재미에 폭 빠진 배우 장광을 만났다.
-<도가니>의 교장과 행정실장을 기억하는 관객이 많은 탓에 <광해>의 조 내관 역을 따내기가 쉽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첫 미팅 때 제가 생각한 조 내관 역을 준비해갔는데 감독님이 생각하신 것과 좀 달랐어요. 거의 떨어진 거나 마찬가지였죠. 근데 잠이 안 오더라고요. 고민 끝에 다시 연락을 했더니, 오디션을 다시 보게 해달라고 할 정도의 열정이라면 안심하고 맡겨도 되겠다고 생각을 하셨대요.
-전작과 완전히 상반되는 역할이라 더 끌리셨을 것 같습니다.
=진짜 행운이었죠. 예능의 힘이 아닌가 싶기도 해요.
-실제로 제작사에서도 예능에 출연한 모습을 보고 우려를 덜었다고 했습니다.
=그랬을 거예요. <음치클리닉> 팀에서 연락이 왔을 때도 어떻게 저를 불렀냐고 물었더니 예능 프로에서 보고 연락했다고 하더라고요. 거기서도 분량은 많지 않지만 재밌는 역할을 맡았어요. 박하선씨와 함께 저도 마지막에는 음치에서 탈출해서 가족 앞에서 제대로 된 노래를 부르게 될 겁니다.
-<광해>의 완성본을 본 소감은 어떻습니까.
=아직 한번 반밖에 못 봤어요. 반은 뭐냐면, 시사회 때 행사를 끝내고 중간에 들어가서 봤거든요. 그러니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본 건 없다고 봐야죠. 다른 배우들도 그렇겠지만 처음 볼 때는 자기 위주로 보게 되니까요. 그래서 작품에 대한 소감을 말씀드리긴 어렵고, 제 연기만 본다면 아직 1년차 신인 같아요. 이병헌씨 연기를 보고 제 연기를 보니 제가 시선의 각도나 타이밍을 처리하는 데 미숙한 게 느껴지더라고요.
-첫 등장이 간결하고도 임팩트가 있어서 조 내관의 존재감을 확실하게 각인시킵니다. 하선이 처음으로 궁에 들어온 날 혼자 편전에서 까불고 있으면 조 내관이 어둠 속에서 스윽 모습을 드러내는데, 거의 코믹호러였습니다.
=그런 장면이 있으면 배우로서는 아주 고맙죠. 근데 보기보다 촬영은 까다로웠어요. 조명의 각도나 포인트 때문에 의외로 굉장히 여러 번 찍은 장면이에요.
-대사가 없어도 항상 하선의 옆을 지켜야 하는 역인지라 촬영 회차도 많았을 텐데, 테이크까지 많이 가는 날이면 상당히 고단했을 것 같습니다.
=회차로만 따지면 이병헌씨 다음이 저였을 거예요. 근데 추창민 감독님 스타일이 기분 상하지 않고 다시 한번 꼭 가게 만드는 스타일이에요. 컷마다 모니터를 꼭 시키거든요. 같이 보면서 이런 느낌을 넣었으면 좋겠고 저건 뺐으면 좋겠다고 얘기한 다음에 그래요. 나는 지금 찍은 것도 괜찮다. 당신이 괜찮다고 느끼면 오케이하겠다. 그러면 오케이할 배우가 없죠. (웃음)
-가장 테이크 수가 많았던 장면은 어느 장면입니까.
=마지막에 하선에게 울면서 도망가라고 하는 장면 있잖아요. 처음에는 이병헌씨 위주로 쭉 찍었는데 그동안 제가 옆에서 대사를 계속 쳐줬거든요. 그러고 나서 제쪽으로 카메라가 오니까 감정이 다 메말라 있더라고. 힘들게 찍었던 기억이 나요.
-주로 화면에 잡히는 건 하선의 리액션이고 조 내관은 목소리로 감정을 전달하는 장면이라 성우로서의 기량을 활용하기에 좋은 장면이라 생각했습니다.
=사실은 감독님이 오디션 때 요구했던 게 바로 그 장면이었어요. 성우 때 하던 것처럼 만들어갔더니 너무 드라이하다고 하시더라고요. 오디오로만 들려줄 수 있는 표현보다는 진정성이 더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심지어는 매끄럽지 않아도 된다, 하선이 너무 안타까운 마음에 대사를 씹거나 더듬거려도 좋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준비할 때도 제일 고민이 많았던 장면이에요.
-제작진의 말에 따르면 선생님이 배우로서 지닌 좋은 점 중 하나가 성우 경력이 길고 연극을 했던 만큼 기본기는 있으나 ‘쪼’(몸에 박힌 연기 스타일을 가리키는 현장 용어)는 없다는 것입니다.
=성우 연기를 할 때는 제 딸도 그래요. 아빠한테도 ‘쪼’가 있다고. 근데 영화에서는 몸도 같이 쓰니까 ‘쪼’가 축소돼 보이는 것 같아요. 실은 <도가니> 때도 제가 성우로서 가졌던 소리를 눌러야 했어요. 행정실장은 교장보다 교육을 못 받은 캐릭터로 설정했는데, 감독님이 무식한 연기를 할 때조차 소리가 너무 좋다는 거예요. 이번에도 그럴까봐 걱정했는데, 이병헌씨나 류승룡씨가 워낙에 소리들이 좋아서 제가 묻히더라고요. (웃음)
-배우마다 캐릭터를 만들어가는 순서가 다른데, 아무래도 소리와 관련된 부분부터 먼저 접근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그렇죠. <26년>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 역을 준비하면서도 그런 부분에 주안점을 두게 되더라고요. 예를 들면 말하면서 입을 다물었다 떼는 습관 같은 것. 또 간간이 웃으실 때가 있는데, 굉장히 편안하게 웃으세요. 그게 오히려 그분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는 분노를 살 수도 있는…. (웃음)
-공개된 스틸을 보니 비주얼 싱크로율도 기대가 됩니다. 드라마 <삼김시대>에서도 전두환 역을 맡은 적이 있었습니다.
=뭐, 생긴 걸 어떻게 할 수는 없고요. (웃음) <제4공화국> 때 고석만 PD를 만났어요. 거기서는 별 두개 단 소장 역할이었는데 전두환 역을 맡았던 배우와 대화하는 장면이 있었거든요. 컷을 왔다갔다하면서 찍고 있는데 양쪽 다 전두환 같아서 안되겠다며 저보고 실내지만 모자를 쓰라고 하더라고요. 그분이 <삼김시대>를 연출할 때 저를 전두환 역으로 불러주셨죠.
-<26년>에서는 또 어떤 무표정 연기를 보여줄지 궁금합니다.
=제가 아직 카메라 앞에서 미숙한 부분이 많기 때문에 표정을 능수능란하게 변화시키진 못하는 것 같고요. 어떤 컷에서 어떤 마음으로 연기를 했으면 좋겠다는 감독님들의 설명에 따르는 편이에요. 그때 표면적인 표정을 바꾸려고 하기보다는 느낌을 따라가다 보니 그런 모습이 나오는 것 같아요.
-극단 ‘제작극회’에서 활동하다가 성우 일을 시작했는데 이유가 돈이 아니라 연기를 배우기 위해서였습니다.
=그전에 동국대 출신들이 많이 모여 있던 ‘맥토’에 있다가 ‘제작극회’로 옮겼는데, 거기에 성우 출신 배우들이 많았어요. 대사 공부에 욕심을 내서 공채를 봤죠. 2, 3년 정도 공부한 다음에 돌아가려고 했는데 그만큼 해서는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게 없더라고요. 최소한 10년은 해야 ‘말을 한다’고 할 수 있었어요. 거기다 결혼까지 하고 나니 돌아가기가 더 힘들어졌죠. 그래도 끈은 놓지 말자 싶어서 2, 3년에 한번씩 작은 역할로라도 무대에 올랐어요.
-PD들이 게리 올드먼처럼 어려운 배우들은 주로 선생님께 맡겼다고 들었습니다.
=아까 말했던 ‘쪼’가 별로 없다는 점을 좋게들 봐주신 것 같아요. ‘쪼’가 있으면 변신이 잘 안되잖아요. 근데 저는 같은 배우의 이전 캐릭터에 대한 걸 좀 떨쳐버리고 새로운 역할에 충실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생각해보면 이상한 역할들을 많이 했어요. <배트맨2>의 펭귄맨이나 <공각기동대>의 경찰서장 역 같은….
-<도가니>에서 80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오디션에 합격하셨지만, 그전에 수많은 오디션을 봤습니다. 당시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던 선생님에게는 영화가 비단 꿈이 아니라 절박한 생계문제이기도 했을 것 같습니다.
=경제적으로는 절박했지만 영화로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왜냐하면 된다는 보장이 전혀 없었으니까. (웃음) 나는 나대로의 배우니까 주어지는 일에 최선을 다하자는 거였고, 크리스천으로 말하자면 나머지는 하느님이 하신 일 같아요. 남들은 하던 일도 손 놓을 이 나이에 새로운 도약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야말로 기적 같은 일이죠.
-배우로서 갖고 있는 계획이 궁금합니다.
=우리는 하루 뒤의 일도 알지 못하잖아요. 그러니 언제까지 주연배우가 되겠다, 그런 계획도 없고요. 겸손을 잃지 않으며 사는 게 더 중요한 것 같아요. 사람이란 게 조그만 틈바구니만 주어지면 바로 교만이 나오게 돼 있거든요. 그걸 제일 조심하려고 해요.
-예전에 <씨네21>과 인터뷰에서 김기덕 감독의 영화에 출연해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만약 출연한다면 어떤 연기에 도전해보고 싶으십니까.
=노인을 인간으로서 적나라하게 보여줄 수 있는 감독이 있다면 김기덕 감독님이 아닐까 싶어요. 예를 들어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라는 영화에 대사가 한줄도 없는 캐릭터가 있어요. 어항에서 물고기를 꺼내서 손에 이렇게 쥐고 있다가 한손으로 눈을 파면서 그걸 사시로 무표정하게 바라보는데, 아,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요. 엑스트라로라도 그런 울림을 줄 수 있는 연기를 할 수 있다면 행운일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