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x&talk]
[황조윤] 캐릭터보단 내러티브다
2012-09-21
글 : 이화정
사진 : 오계옥
<광해, 왕이 된 남자> 황조윤 작가

“10년째 <올드보이> 작가로 불리고 있다.” 황조윤 작가는 <광해, 왕이 된 남자>(이하 <광해>)가 그 ‘지겨운’ 수식에 변주를 줄 거라고 믿는다. <올드보이>가 대표작이지만 그는 <야수와 미녀>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언니가 간다> 같은 드라마, 로맨틱코미디에도 정통한 전천후 작가다. 물질적 제약에서 자유로운 ‘표준’ 시나리오작가의 설 자리에 대해 고민해온 황조윤 작가. 그의 충무로 적응기를 들어본다.

-완성된 <광해>는 작가 입장에서 어땠나.
=작품을 하다보면 화면과 글의 이질감을 많이 느낀다. <올드보이> 때도 박찬욱 감독님이 각색을 많이 해서 온전히 감독 색깔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이번엔 그게 없었다. <광해>는 2010년 초에 CJ 기획팀에서 제안한 작품이었는데 처음엔 사극을 안 해봤고, <왕자와 거지> 컨셉도 익숙해서 과연 변별점을 주는 게 가능할까 고민됐었다. 두어달은 미적거리면서 간을 봤는데 결과적으로 대본보다 더 잘 나온 느낌이 들더라. 작가 생활에 보람이 들더라.

-경쟁력이 있다고 판단한 지점과 방향은 무엇이었나.
=신분이 바뀐 설정에만 함몰되면 <왕자와 거지>를 못 벗어난다. 그런데 왕자가 된 거지가 욕망이 생긴다면, 그래서 그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로 이야기를 끌어가면 달라지겠더라. 그 선택을 통해서 인간 욕망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주제가 무거운데 코믹하게 풀어나간 건 의외였다.
=기획 때부터 진중함과 코믹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했다. 문제의식이나 방향은 가지고 가되 아예 웃기게 가자는 쪽으로 기울었다.

-광해 혹은 하선이 중심이 되고 서브 캐릭터들이 보완하는 구조다. 다양한 캐릭터로 각 장면의 재미를 추구하는 요즘 트렌드와 다르다.
=개인적으로 캐릭터 위주의 작품들에 재미를 못 느낀다. 내러티브가 확실한 드라마가 있는 작품이 나오는 게 고무적인 것 같다. 판을 잘 깔아놓고 캐릭터를 앉히면 코믹이 되고 감동이 된다. 이게 정석이다. 물론 상투적이고 뻔하다는 이야기도 듣는다. 캐릭터 위주의 작품 소구층이 많아지는 데 대한 인정은 해야 한다고 본다. 인정 안 하면 내쪽에서 도태된다.

-덕분에 집필 때는 장면이나 캐릭터의 부각이 약하다는 판단도 없지 않았을 것 같다.
=작품을 할 때마다 그런 소릴 듣는다. 왜 더 세게 안 하냐고. 나는 나름 다 했다고 한 건데 말이다. (웃음) 예를 들어 <광해>의 ‘매화틀’ 장면은 기획팀에서 나온 에피소드였다. 재차 이야기가 나와서 결국 넣은 장면이다. 끝까지 가는 스타일이 아니다. 왠지 너무 막가는 것 같고, 과장된 슬랩스틱 코미디 같고 그럴 땐 어느 선에서 정지하게 된다. 제작사 입장에선 분명 그런 장면에서 더 터뜨리기를, 캐릭터를 더 부각시키기를 바라는데도 말이다. <광해>가 잘되면 ‘신 내에서 무조건 웃긴 거 기대 말아라’, ‘세번 웃기고 두번 울리는 이런 도식도 생각하지 마라’. ‘그래도 영화가 웃길 수 있고 감동을 줄 수 있다’고 주장할 근거가 생길 것 같다.

-2000년대 중반에 박정우, 김대우, 김희재 등과 함께 이른바 스타 시나리오작가로 분류됐었다. 그런데 한동안 영화계를 떠났었다. <광해>는 오랜만의 영화 작업이다.
=2007년부터 3년간 놀았다. 한국영화 버블기라고 했던 2002년에서 2006년경, 오더를 받아 쓴 영화가 다 영화화됐다. 쉽더라. 쓰면 다 영화화됐다. 그러다보니 개인적으로 욕심이 생겼다. 제작사로부터 컨셉 영화를 받아 공장같이 쓰지 말고, 내가 하고 싶은 영화를 써서 납품을 하자고 생각한 거다. 그 당시 작가들이 그런 생각들을 많이 했다. 탈고하고 넘겨주면 감독의 것이 되는 건 당연하지만, 거기서 오는 괴리감이 너무 컸다. 열심히 하는데 타이틀도 안 주고 돈도 많이 안 줬다. 그럴 수 없는 게 풀이 넓지 않은 거다. 시나리오작가는 영화판에서 공고히 틀을 잡고 있는 직업이 아니었다. 괜찮은 작가는 수입이 보장되는 드라마쪽으로 나가거나 또 일부는 연출쪽으로 나가기도 했다. 그런 분위기에서 나도 생각이 많아진 거다.

-소위 잘나가는 작가인데도 그런 고민에선 자유롭지 않았나보다.
=고백하자면 난 정체성이 없다. 신학을 하다가 대학교 2학년 때 목회는 내 길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늦게 제대하고 IMF 끝나고 나니 뭘 해야 할지 고민되더라. 시나리오 교육원 다니다가 적성에 맞기에 작가 일을 했다. 재능이 있다고 하더라. 진득하게 시간을 두고 개발하거나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쓰는 게 아니라 제안이 들어오면 받아들였다. 처음에 고생을 안 하고 일하다보니 나중에 정체성에 혼란이 온 거다. 지금은 그래도 해답이 보인다. 내 별명이 ‘끝판왕’이다. 스타트는 힘이 달리지만, 나한테 오면 80%는 나온다더라. 스스로 창작자라기보단 기술자라는 생각이 강하다. 창의적이라기보다 아이디어에 구조를 주고 살을 붙여서 마무리하는 것이 강점인 거다. 물론 여전히 내 속에 있는 아이템으로 더 좋은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고 포기하지 않았지만, 거기 너무 매이지는 말자는 생각이다.

-원래 하고 싶은 영화는 어떤 거였나.
=어찌하다보니 로맨틱코미디를 많이 했지만 취향은 스릴러다. 공모전 데뷔도 스릴러로 했고 습작은 70~80%가 스릴러다. 습작하면서 훈련했던 것들이 다른 장르를 할 때도 첨가된다. 데뷔작이었던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도 멜로지만 남자를 찾아가는 스릴러적인 컨셉이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스릴러를 좀 썼는데 잘 안됐다. 그러다보니 빚을 너무 많이 져서 더이상은 안되겠다 싶더라. 들어오는 걸 잡기 시작했고 드라마와도 인연이 닿았다.

-불발되긴 했지만 사전제작 드라마 <에이전트 제로>(2006)에도 참여했었다. 김희재, 전철홍 작가도 뭉쳤는데 그땐 작가들의 권리를 확장한 새로운 프로젝트를 구상하는 게 아닐까 짐작했다.
=원대한 목표가 아니라 기회가 있으면 한다 정도였다. 드라마도 그 기회 중 하나였다.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나름대로 영화계에서 경력을 쌓았는데, 돌아보니 내 또래 회사원이면 과장 정도인데 난 그런 여유나 경제적 여건이 없더라. 내가 이 정도니 시작하는 이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줄 수 있겠나. 안정적으로 영화를 하고 싶었고 그걸 뒷받침해줄 생활구조를 만들어야 했다. tvN의 <일년에 열두남자>가 비록 흥행은 안됐지만 경제적으론 큰 도움이 됐다. 1년에 드라마 한편씩 하고 그 사이사이는 마음 맞는 제작사와 영화를 하는 게 하나의 방법이겠더라.

-종합편성채널이나 케이블TV의 확대로 확실히 작가들의 파이가 넓어졌다.
=창구가 많아졌다. 다들 거품이라고 한다. 2000년대 중반 영화판처럼 다른 상황이 닥칠 거고 어떤 식으로든 정리가 될 거다. 그럼에도 작가들은 글을 쓸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니 좋다. 드라마의 가장 큰 장점은 영화와 수입구조가 다르다는 거다. 영화의 경우, 많이 받는 스타 작가의 경우 한편에 1억원에 계약하는 경우도 있다. 많은 금액처럼 보이지만, 영화는 변수가 너무 많다. 1년 쓸지, 3년 쓸지 혹은 엎어질지 가늠을 할 수 없는 거다. 계약금만 받고 수십번 고치다가 끝나는 경우도 많다. 영화는 여전히 너무 열악하다.

-시나리오작가 표준계약서 작업이 한창인데 어떤 의미인가.
=시나리오작가가 창작자임을 인정해달라는 거다. 크리에이티브에 대한 지분은 따로 인정되어야 한다. 지금까지는 집필 작업에 대한 대가도 제대로 인정되지 않는 게 현실이다. 작가 아이템인 경우, 제작사 아이템인 경우, 작가 아이템인데 제작사가 아이템 단계에서 참여한 경우와 같이 다양한 케이스에서 창작자로서 권리를 세분화하는 거다.

-얼마나 진행된 건가.
=초안 작성만 1년 넘게 했다. 각 단체가 모여서 초안을 만들었고, 지금은 수정하는 일에 참여하고 있다. 작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달라 세부사항을 협의하고 있는데 올해 말쯤 공표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알다시피 몇년 전 한 작가의 죽음이 발단이 됐고, 지금은 여러 단체에서 의지를 가지고 참여하고 있다. 무엇보다 CJ 같은 대기업에서 관여자로 테이블에 나와주는 게 중요하다.

-당장의 계획은 무엇인가. <광해> 이후에 작품 의뢰가 많아졌다.
=<올드보이> 쓰고 나서와 상황이 비슷하다. <팔란티어>는 원작이 있는 작품이고 초고까진 썼다. 게임세계와 현실세계를 왔다갔다하는 욕심나는 프로젝트라 좀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하려고 한다. 지금은 박광현 감독의 <권법>을 각색 중이다. 워낙 방대한 분량이라 많이 수정해야 하지 않을까 고민이 많았는데, 감독님 생각이 뚜렷하시더라. 11월까지는 이 작업을 할 것 같다. 더 멀리, 나이가 들어서는 작가집단을 만들고 싶다. 모두가 콘텐츠가 필요하다고 하면서 만드는 수고는 개인의 몫으로만 돌리고 있다.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 현장에서 전문적으로 스토리를 만드는 사람들을 양성하고 싶은 게 큰 꿈이다.

-작가로서 고수하는 원칙이 생겼다면.
=이 생활에 함정이 있다. 많은 작가들이 데뷔한 건 10년 전인데 필모그래피는 1∼2개인 경우가 많다. 작가를 하려는 사람들에게 자기 무장을 하라는 의미에서 말하자면, 공모전 같은 곳에서 일단 스타트를 하고 나면 아이템은 얼마든지 들어온다. 기회를 얼마나 잡을 수 있느냐는 각자의 몫이다. 작가 타이틀만 가지고 있을 거냐 작품 타이틀을 늘릴 거냐에 대해서 잘 생각해봐야 한다. 영화는 결국 감독이 맞다고 본다. 시나리오 작업과 영화가 화면이 돼서 나오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다. 내가 쓴 대본이 영화에 나오네, 빠졌네 딴죽 걸면 안된다. 결국 그런 쪽에서 작가들의 비애를 따지지 말고 시나리오 내에서 권리를 가지는 걸 현실화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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