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게 피는 꽃이 아름답다. <나이트폴> 홍보차 방한한 임달화는 이제 우리에게 익숙하고 매력적인 중견배우로 거듭났다. 주윤발의 캐릭터를 넘겨받기엔 어딘지 모자랐던 <첩혈가두>(1990)의 느끼한 킬러나 B급 에로영화에서 간간이 얼굴을 비치던 시절의 흔적은 이제 찾아볼 수 없다. 어느새 두기봉 사단이 낳은 최고의 스타가 되더니 급기야 <도둑들>로 1천만 배우의 반열에까지 오른 배우. 그는 한국에서 ‘꽃중년’이라 불린다는 말에 환한 미소를 짓다가(‘화중년’이라는 표현이 얼마나 멋지냐는 말과 함께) 이내 자신감 넘치는 미소로 대답한다. 하지만 “나는 아직 활짝 피지 않았다. 이제 막 꽃잎이 펴지려고 하는 순간이다. 10년 뒤를 지켜봐 달라”며 활짝 웃었다. 쑥스러운 얼굴 한편에 기쁨을 감추지 않고 이내 당당히 ‘꽃노년’까지 욕심내는 소년 같은 남자. 그저 그런 배우에서 홍콩의 오늘을 가장 잘 담아내고 있다는 평을 듣기까지, 배우 임달화를 만나 지켜온 연기에 대한 철학과 애정 어린 고백을 들었다.
-<나이트폴>에서는 이제까지의 경찰과는 많이 다른 느낌이다.
=그게 지금 현재 홍콩 경찰의 진짜 모습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경찰은 깔끔한 제복에 단결된 정신으로 무장한 모습으로 그려졌고, 나 역시 그런 역할을 맡았었다. 하지만 요즘은 홍콩 경찰의 90%가 정신적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다. 예전에는 광둥어를 사용하는 광둥인들만 상대하면 됐지만 요즘은 파키스탄, 네덜란드, 미국까지 전세계 범죄인들이 홍콩으로 흘러들어오고 있다. 말은 안 통하는데 업무는 늘고 통제는 어려워지고. <나이트폴>은 그런 홍콩 경찰의 오늘이 반영된 영화다. 홍콩 경찰들 사이에서 반응이 좋았다고 들었다.
-영화는 홍콩이 반환되기 20여년 전을 회상하기도 한다. 영국 경찰들이 용의자의 머리를 발로 차는 등 강압적으로 그려지고 작품 전반에 흐르는 불안한 분위기는 홍콩 반환 시절의 정서를 환기시킨다.
=아마 1992년경에 홍콩에 경찰법이 개정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이전에는 이 영화처럼 폭력적이고 무자비한 취조가 다반사였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1960~70년대엔 전세계 경찰이 다 그렇지 않았을까. 영화 속 임 반장은 정서적으로 그런 시대에 머물러 있는 인물이다. 자기만의 방식을 고수하는. 그런데 그게 시대와 맞지 않기 때문에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는 거다.
-특별히 어떤 지점이 경찰들의 공감을 이끌어냈다고 생각하나.
=<나이트폴>의 원제는 ‘진상’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사건의 진상을 파헤쳐가는 이야기란 의미지만 나는 좀 다르게 봤다. 나에게는 그게 경찰이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처한 진짜 현실이란 의미로 읽혔다. 일에 치여 제대로 가족을 돌볼 시간도 없는 슬픈 현실. 아버지로서 임 반장이 겪는 고통이 훨씬 중요한 거 아닐까. 경찰인 임 반장이 일 때문에 돌보지 못했던 딸아이를 돌봐야 한다는 답을 찾아내는 것, 그것이 이 영화의 진짜 ‘진상’이다.
-결말이 약간 달라졌다고 들었는데 그것 때문인가.
=내가 이 이야기에서 공감한 부분은 가족애인데 감독은 그걸 이해 못하더라고. 싱글이라서 그런가? (웃음) 원래 엔딩은 범인 역의 장가휘가 뛰어내리고 사건을 해결한 임 반장이 기쁜 미소를 짓는 거였다. 하지만 그건 절대로 싫었다. 아버지 입장에서는 그 순간 눈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려 4주에 걸쳐 감독을 설득했고 마지막엔 내가 어떻게 연기하든 내버려두고 카메라만 설치해 달라고 요구했다. 일단 찍고 나서 직접 보면서 이 장면이 왜 필요한지 설명해주겠다는 말과 함께.
-엔딩에서는 울음 뒤에 짧은 미소를 보여주지 않나.
=그게 핵심이다! 울음 끝에 보이는 짧은 미소. 그 미소는 일과 자신의 세계밖에 몰랐던 임 반장이 가족이라는 해답을 찾은 순간에 나온 기쁨의 미소다. 사건을 해결해서 나오는 미소와는 전혀 다르다. <나이트폴>은 <올드보이>만큼 훌륭하진 않을지 몰라도 그런 지점에서 비슷한 감정을 공유하고 있다. 한 사회의 단면이나 현실적인 부분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지금쪽이 훨씬 의미있는 결말이 아닐까. 4주간의 설득 끝에 얻어낸 엔딩이라 더 기쁘고 뿌듯하다. 물론 감독의 입장도 이해한다. 그는 아직 아빠가 아니니까. (웃음)
-워낙에 딸 바보로 유명한데, 딸을 얻은 뒤의 인생관이랄까, 영화에 대한 태도에 변화가 있었나.
=물론이다. 인생관 자체가 달라졌다. 딸에게 제일 처음 보여준 영화가 <PTU>였는데 싸우는 장면은 다 컷하고 보여줬다. 경찰은 정직하고 반듯하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두 번째는 <세월신투>였는데 다 보고 난 딸아이가 “나도 저렇게 때릴 거예요?”라고 물어보더라.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꼭 안아줬다. 우리 딸은 <세월신투> 같은 영화를 많이 찍길 바란다. 하긴 <흑사회> 같은 영화를 딸에게 보여줄 순 없지 않겠나? (웃음)
-그럼 이제 예전처럼 말끔한 제복의 경찰 역할은 다시 보기 힘든 건가.
=<PTU>에 나왔던 제복 같은 걸 말하는 건가? 그건 97년 홍콩반환 전에 입던 제복이다. 그 시절 홍콩 경찰의 단결력은 대단했다. 시절이 변했으니 이제는 힘들지 않을까. 일부러 피해가는 건 아니지만 세상이 계속 변하고 있으니 똑같은 경찰 역을 하더라도 시대에 따라 늘 새로운 모습의 경찰을 보여주는 게 자연스러운 거라 생각한다. 배우는 영화 안에서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또 다른 생활을 하는 거니까.
-혹시 딸에게 배우를 시킬 의향이 있나.
=없다. 너무 힘들다. 그냥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한다. 아, 아내처럼 모델을 한다면 그건 괜찮다. (웃음)
-그러고 보니 <세월신투>에서는 상당히 보수적인 아버지로 나왔다.
=개인적으로 <세월신투>는 소중한 영화다. 지금껏 출연한 수십편의 영화들 중 실제 내 모습에 가장 가까운 캐릭터를 연기한 작품이 바로 <세월신투>다. 어렸을 때 봤던 아버지를 그대로 따라 연기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가 11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그때까지의 기억을 다 끄집어내 연기했다. 나중에 딸아이가 컸을 때 할아버지가 보고 싶으면 이 영화를 보라고 하고 싶다. 배우로서 보람있고 소중한 순간은 이런 연기를 남겼을 때다.
-늘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역할을 연구하는 것 같다.
=관찰하는 걸 좋아한다. 이젠 그걸 머릿속에 담아두는 게 습관이 돼버렸다. 그림이나 사진, 여행, 그리고 연기까지 모두 비슷한 작업이다. 촬영이 없더라도 현장에 나가서 다른 배우들의 연기를 보면 배우고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사소한 디테일과 습관, 연기의 리듬이나 호흡 같은 것들, 예를 들어 (벌떡 일어나 의자를 엉덩이에 단 채로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장면을 직접 보여주며) <도둑들>에서 오달수씨가 보여준 코미디는 정말 재미있었다. 예니콜의 요상하게 선 다리 포즈도 일품이고. 언젠가 내가 할 수도 있으니 미리 보고 익혀두는 거다. 배우라면 어딜 가든 연구와 관찰이 필요하니까.
-연기를 하면서 가장 보람된 순간은 언제인가.
=돈? 흥행? (웃음) 그것도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배우에게 가장 소중한 보물은 좋은 동료들이다. <도둑들>의 경우엔 씹던껌 역의 김해숙씨와 함께 연기할 수 있어 영광이었다. 내게 돌아온 꽃중년의 영예는 모두 김해숙씨에게 돌려드리고 싶다. 너무너무 연기를 잘했다. 나도 계속 잘하면 다음에는 ‘꽃노년’이라 불러줄 건가? (웃음)
-이번에 호흡을 맞춘 장가휘와 많은 작품을 했다. 팡호청의 <엑소더스>에서도 경찰과 용의자로서 비슷한 관계를 보여주었다.
=그렇다. <엑소더스>에서도 비슷하게 나왔었다. 그때 장가휘는 더 이상한 사람이었다. (웃음) 장가휘와는 이젠 따로 리허설이 필요없을 정도라고나 할까. 애초에 카메라만 설치해놓고 둘이 알아서 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더 리얼하고 제대로 나왔다. (웃음) 예전에 그는 주성치 영화에 자주 나왔었는데 실제 모습이 어떠냐고 묻는다면 주성치 영화 속 모습이 실제 그의 모습과 많이 닮았다.
-<나이트폴>의 옹핑 케이블카 장면이 정말 박진감 넘치고 리얼하다. 찍으면서 다치진 않았나.
=(이마에 다친 상처를 보여주며 손사래를 친 뒤) 실제 케이블카에 갇혀서 4일, 스튜디오에서 3일간 찍었다. 영화를 보고 나면 다들 그 케이블카를 타기 무서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싸우지만 않으면 안전하니 걱정 말고 타시길. (웃음) 사실 그곳에서 보는 풍광이 무척 아름다우니 꼭 한번 타보길 바란다.
-연출에는 욕심이 없나.
=언젠가는. 한국에 좋은 배우가 많으니 욕심이 난다. 예를 들면… 원빈? 폭발력이 대단한 배우다. 영화를 안 찍은 지 좀 되지 않았나? 아쉽다. 원빈씨, 기회가 되면 꼭 같이 한번 작업해요!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