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이병헌이 연기 잘하는 배우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잘생긴 스타지만 연기도 잘한다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김지운의 영화를 통해 완성된 페르소나는 특히 거북살스러웠다. 촉촉한 눈망울로 관객을 대하며 자기 자신을 연민하는 듯한, <달콤한 인생>과 <악마를 보았다>에서의 복수를 집행하는 인물도 그렇고 순도 높은 악을 응결해 머금고 있는 듯한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에서의 악인도 마찬가지다. 아름다운 무늬를 지닌 뱀을 보는 것 같았다. 뱀이지만 아름다운 뱀이다, 이러면 안되는가라고 시위하는 듯한 나르시시즘이 이물감을 주었다.
<광해, 왕이 된 남자>를 보면서 잠시 잊고 있었던 이병헌의 다른 색깔이 떠올랐다. 겉은 단단해 보이지만 어딘가 모르게 연약하고 치명적인 실수로 자신을 망치면서도 그걸 감당하지 못하는 <공동경비구역 JSA>의 이수혁, 시골학교에 갓 부임한 잘생긴 선생으로 나온 <내 마음의 풍금>에서의 순진한 행동밖에 할 수 없는 젊은이의 서투르지만 공감이 가는 내면을 연기하는 그가 생각났다. 냉탕과 온탕을 오가듯이 정극 드라마와 희극을 오가는 톱니바퀴 흐름의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 이병헌은 장면의 연결고리에 의존하지 않고도 스스로 흐름을 잡아간다. 천민 광대 하선으로 진짜 왕 광해의 대역을 맡아야 하는 캐릭터의 자리에 서서 그는 그때그때 순간에 따라 위엄있는 왕의 가면을 쓰고 단색조로 연기하는 모습과 팔색조로 다양한 감정을 드러내는 광대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는 사람이 놀랄만큼 자연스럽게 오간다. 이 역할에선 자신을 연민할 틈이 적다.
추창민은 이병헌의 광해/하선을 중심에 놓고 영리한 시각적 키워드를 던져놓는다. 그를 보좌하는 대신 허균은 하선에게 광해 역을 주문하면서 궁 안에서는 사방에 보는 눈이 있다고 협박한다. 광해를 연기하는 첫날 밤 드넓은 왕의 집무실에서 하선이 왕 행세를 하면서 집무실을 놀이터처럼 걸어다니며 낄낄댈 때 보이지 않는 어둠속에서 무표정한 조 내관이 모습을 스윽 드러낸다. 누군가 보고 있다는 서스펜스를 깔아놓으면서 관객을 자연스레 조 내관의 입장에 데려다놓은 이 연출적 전략은 단번에 이야기의 이입고리를 낚아챈다. 중인환시 상황에서 매화틀에 배변을 해야 하는 왕의 처지를 희극적으로 그린, 이어지는 장면도 일찌감치 하선과 관객의 감정적 동일시를 묶어놓는 데 성공한다. 언제 암살당할지 모른다는 공포와 불안에 시달리는 진짜 왕 광해와 달리 하선은 왕 역할에 적응해야 하는 과정을 즐긴다. 볼일을 다 보고 나서 궁중 나인들이 ‘경하드리옵니다’라고 합창을 할 때 “뭘 경하까지…”라고 중얼거리며 쑥스러워하는데 하선의 표정은 흡족하다. 방금 시원하게 배변을 마쳤기 때문이다. 가장 내밀한 일상적 행위까지 관찰당해야 하는 왕의 스트레스를 배변을 통해 물리적, 심리적으로 벗어던진다.
신경쇠약 직전의 광해
진짜 광해는 다르다. 영화가 시작할 때 진짜 광해 임금은 자신의 밥상에 올라온 음식을 뜨다가 변색한 은수저를 보고 궁 안을 발칵 뒤집어 놓는다. 그는 신경쇠약 직전의 왕이다. 영화 속에 잠깐 대사가 나오긴 하지만 임진왜란 당시 조선 역사상 최악의 왕이었던 부친 선조가 저 멀리 함경도까지 피난 간 사이에 광해는 세자의 몸으로 의병을 조직해 왜군과 맞서 싸우고 광해의 대중적 인기를 시기한 선조가 전쟁통에도 툭하면 왕의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쇼를 벌이면 며칠 동안 선조의 거처 앞에서 밤을 새우며 왕위 이양을 하려는 결정을 철회해달라고 피곤한 응대를 해야 했던, 용기와 인내를 갖춘 인물이었다. 이 영화의 시선에 따르면 광해는 서자 출신으로 왕에 오른 뒤 조선의 권력 시스템으로부터 너무 많은 심리적 잔매를 얻어맞아 기진맥진해 있는 왕이다. 그랬던 진짜 광해가 총애하는 상궁의 치마폭에서 약에 중독돼 사경을 헤매고 있는 동안 그의 역할 대역으로 차출된 가짜 왕 하선은 왕의 역할놀이를 하며 자신을 감시하는 권력 시스템을 즐긴다. 그는 매일 푸짐한 산해진미 밥상을 받고 포식하며 근엄한 신하들 앞에서 왕의 목소리와 태도를 흉내내는 연극을 두려워하면서도 그 긴장을 이겨내고 즐긴다. 더 나은 배우가 되기 위해 조 내관에게 물어보고 그것도 성이 차지 않아 책을 찾아 읽는다.
이 역할놀이의 상대는 적절하게 드라마에 배분돼 있다. 우선 허균(류승룡)은 하선의 고용인이다. 하선이 배우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허균은 질책한다. 그러나 연출자로서의 허균은 무대에 오른 하선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한다. 그의 말대로 궁중에는 보는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이 상황을 억압으로 느끼지 않고 광대의 본능으로 역할놀이에 빠져드는 하선의 주인공 기질을 당해내지 못한다. 하선이 허균과 독대해 현재 전개되는 위장연극의 방향을 논의할 때 대개 허균은 하선을 꾸지람하지만 처음에 당하기만 할 줄 알았던 하선은 재빠르게 연극무대의 주도권을 쥔 자신의 위치를 영리하게 활용한다. 허균이 상석에 앉고 하선이 말석에 앉아 있다가 인기척이 들리면 재빠르게 위치를 바꾸는, 영화에서 수차례 되풀이되는 위치 바꾸기 모티브는 이 연극의 진짜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려준다. 하선은 무대의 주인공이다. 한번 막이 오르면 연출자도 통제할 수 없다. 허균과 논쟁을 벌이던 와중에 새참이 들어오자 하선은 맛있게 음식을 들면서 허균에게 ‘엿을 드시오’라고 권하며 능청을 떤다.
감정의 균형을 잡아주는 요소들
류승룡이 연기하는 허균은 이 역할놀이에서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다. 이 영화는 하선과 허균의 줄다리기인 동시에 이병헌과 류승룡의 균형잡기 게임이기도 하다. 상대적으로 많은 표현영역이 확보된 하선 역의 이병헌에 비해 류승룡은 불리한 입장일 수밖에 없다. 이병헌은 매우 표현주의적인 연기를 한다. 그는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그는 감정을 감춰야 하는 왕이나 귀족이 아니다. 어린 나인의 불우한 삶의 사연을 들으면서 ‘이런 X같은’이라고 욕할 수 있는 인물이다.
그에 비하면 허균 역의 류승룡은 감정표현의 폭에 제한이 많다. 그는 감정을 내색할 수 없고 그에 따라 연기의 틀도 제약이 있다. 그는 팔색조 같은 이병헌의 표현주의적 연기를 오로지 자신의 기운으로만 받아내야 한다. 이를테면 영화중반, 당파싸움의 희생양인 중전에게 하선이 연모의 감정을 느끼면서 거의 소년 같은 순정으로 내달릴 때 이병헌의 감정 진폭은 극에 달한다. 중전을 웃기기 위해 이에 검은 이물질을 끼우고 어릿광대짓을 하는 하선을 보며 중전은 웃기냐는 하선의 말에 굳은 얼굴로 ‘웃기옵니다’라고 답한다. 이런 곁가지 에피소드가 하선의 궁중일상을 인간적인 면모를 확인시키는 난장으로 만든 뒤 다시 허균과 하선의 에피소드로 돌아와 드라마의 호흡을 다시 설정하는 상황에서 류승룡의 입장은 불리하기 짝이 없다.
약간 위태로운 이 불균형을 잡아주는 것은 영화 말미에 병에서 회복한 진짜 광해와 허균이 독대하는 장면이다. 허균은 단도를 꺼내들고 두 왕을 모신 자신의 불충을 벌하라고 진언하는데 광해는 아무 말이 없다. 두 사람에게 따로 카메라 이동을 붙여 클로즈업하는 추창민의 연출은 이 두 배우의 기세가 팽팽한 무승부라고 판정내리는 것과 같다(이 장면의 느낌을 오동진 영화평론가가 필자와 함께하는 <한겨레> TV 대담프로 <크랭크 인> 녹화할 때 언급하는 걸 보고 놀랐다. 그의 관찰에 동의한다). 그때까지 우리는 이 영화를 광해/하선의 일인이역 드라마이자 희극으로 보고 있었지만 하선에게 농락당한, 관객의 편에서 즐겁게 농락당한 허균이 제자리로 돌아오면서 어쩔 수 없이 이병헌을 과도하게 클로즈업한 듯한 영화의 정서적 불균형도 해소된다. 나는 이 장면이 <광해, 왕이 된 남자>를 결정적으로 올려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에서 감정의 균형을 잡아주는 또 다른 인물은 늘 말과 표정을 아끼며 하선을 엄마처럼 묵묵히 보살피는 조 내관이다. 이 영화에서 그의 대사는 하선이 묻는 말에 대한 간단한 답이 전부다. 그는 권력적인 신하들과 그들이 조종하는 시스템 내에서 일방적인 희생자나 꼭두각시가 될 수밖에 없는 존재들, 나인들과 중전과 호위무사를 두루 관찰하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의견을 내색하지 않지만 심정적으로 그가 누구 편인지는 알 수 있다. 그는 권력에 기생하는 위치를 필사적으로 피하려고 노력하는 인물이다. 다른 사람들도 대개 그러하듯이 일장춘몽인 권력게임에 말려들어가지 않기 위해 중간 자리를 지키지만 그의 무표정은 실제 입장과 달리 자신만은 불편부당한 관찰자의 입장에 있다고 여기는 관객의 위선적인 무의식을 영리하게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배우 이병헌의 매력이 가리키는 것
이 영화의 그런 바른생활 교과서를 읽는 듯한 태도가 대중영화로서는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게 쑥스러운 짓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이 영화는 드라마에 희극의 온도를 입혀놓았다. 맨 정신으로 대동법의 타당성을 외치거나 사대하는 권력자들의 후안무치를 꾸짖는 것은 소름이 돋을지도 모른다. 실제 현실에서는 통하지 않는 무지의 갑옷이 완강하다는 걸 나도, 당신도 알기 때문이다. 끝까지 재미를 놓치지 않는 준수한 이 대중영화를 보면서 문득 이 영화가 소박하게 건드린 그 정치적 무의식의 효과는 어느 정도 깊이일까 자문하게 된다. 영화 내내 허균은 가짜 왕 하선에게 정치란 무엇인가를 이해시키려고 노력한다. 정치란 다른 정파간에 주고받는 게임이라는 걸 납득시키려 하지만 그 논리는 하선의 단순한 반문에 금방 무너진다. 지주들에게 세금을 걷는 대동법 시행이 왜 나라에 해악이 되는 것인지 하선은 이해하지 못한다. 명나라에 사대의 예를 갖추기 위해 자국의 군사들이 수만명 죽어도 상관하지 않겠다는 대신들의 태도를 하선은 준엄하게 꾸짖는다. 이게 과거를 통해 현재를 되돌아보는 정치적 효과의 각성을 거둘 수 있을까.
<광해, 왕이 된 남자>는 그 모든 걸 일장춘몽으로 그린다. 15일 동안 훌륭한 임금이었던 하선은 진짜 왕이 되고 싶으면 도와주겠다는 허균의 말에 명분을 위해 누군가를 해쳐야 한다는 그런 왕 노릇은 하지 않겠노라고 거절한다. 허균도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다. 한때 현명하고 지혜로웠으나 이제는 공포와 불안에 떠는 진짜 왕 광해가 돌아왔을 때 허균은 군신의 의무를 다하지 않은 자신을 벌해달라고 간청한다. 그 뒤로 벌어진 역사적 정황은 우리가 아는 바다. 영화에서 하선은 정체를 숨기고 궁을 탈출하는 데 성공하며 잠시 동안의 왕 노릇을 통해 우리의 가상 염원을 대신 이뤄준 그는 배에 올라선 채 저 멀리 포구에 선 허균의 영접을 받는다. 진짜 왕 광해에게 충성을 재확인했던 허균은 가짜 왕 하선에게도 예를 갖춘다. 그가 모시고 싶었던 왕은 허구의 세계로, 다른 곳으로 떠나 사라진다. 화면 자막에는 얼마 뒤 허균이 정파 투쟁에 따른 희생양이 되었음을 알려준다. 이 일장춘몽의 카타르시스는 그렇게 최소한의 안전판을 만들고 끝난다.
그렇다면 굉장한 기세로 흥행하는 이 영화에서 관객의 위치는 어디쯤 자리하는 걸까. 추상적인 옳고 그름의 분별을 떠나 구체적인 일상의 정치영역에서는 지배세력의 아이덴티티에 자신을 투영하는 것으로 위로를 삼는 우리 중 상당수가 만드는 분열된 정치지형에서 백성을 위하는 가짜 왕의 성군다운 영웅적 행위는 기존 가치관의 틀에 균열을 심을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소박한 합리주의가 호감이 가면서도, 구체적인 정치와 역사의 영역에 잠시 흠집을 냈다가 안전하게 퇴각하는 카타르시스에 공명하면서도, 지겹도록 되풀이되는 역사를 상기하며 가짜 하선을 연기한 이병헌의 눈동자와 몸에 이입되지는 못하는 나 자신을 깨달았다. 요컨대 이 영화는 관객을 공격하거나 혼란스럽게 하거나 좌절시키려는 야심은 없었다. 그 공허를 메우는 것은 거듭 곱씹어보니 역시 가짜 하선을 연기한 이병헌의 장난기 가득한 몸짓과 눈동자와 웃음이다. 현대의 광대인 배우가 궁중놀이의 주연으로 발탁되어 난장을 만들어버리는 쾌감, 아주 짧은 기간이지만 정파적 이익에 매몰된 대신들의 등짝을 밟고 가련한 중전에게 달려갈 수 있는 무지막지한 용기, 왕의 가면을 벗고 울고 웃으며 상스런 욕지거리로도 분노를 표할 수 있는 투명함, 이런 것들이다. <광해, 왕이 된 남자>는 온전히 이병헌을 위한 영화였으며 비장함보다는 물기어린 광대의 자기도취를 보는 쾌감을 준다. 나는 여전히 이병헌의 팬은 아니지만 이 영화는 절대적으로 그의 미모에 기댄 매력을 준다. 그리고 그만큼 그의 주변을 둘러싼, 류승룡을 비롯한 다른 배우들의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기세에 호감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