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감독 수난시대의 도래
2012-10-16
글 : 김성훈
사진 : 오계옥
한국영화감독조합 소속 권칠인, 한지승, 정윤철, 김철한 감독 좌담: 이명세, 박신우 감독의 하차와 임순례 감독 사태에 대하여

지금으로부터 지난 5개월은 한국 영화감독에게 수난의 시대였다. 이명세 감독과 박신우 감독은 촬영 초반 제작사, 투자사와 갈등을 빚어 각각 <미스터 K>와 <동창생>에서 하차했고, 임순례 감독 역시 제작자, 주연배우와 연출권 간섭 문제로 갈등을 빚으면서 연출을 잠깐 중단했다가 다시 현장에 복귀했다. 한국영화감독조합(이하 감독조합)은 지난 9월20일 이명세, 임순례, 박신우 감독과 갈등을 빚은 제작사에 공개 질의 및 해명, 사과 촉구서를 냈다. <미스터 K>의 제작사인 JK필름에는 후속 방안, 재발 방지 계획을 촉구했고, <남쪽으로 튀어>의 제작사 거미에 감독의 고유 권한인 연출권을 침해한 것에 대한 해명과 사과를 요구했다. <동창생>의 제작사인 더 램프에는 감독 해고 과정에 대한 질의서를 보냈다. 그리고 감독조합은 “하루빨리 영화 제작 전반에 관한 합리적인 기준을 만들기 위한 토론의 장을 마련하자”고 한국영화제작자협회(이하 제협), 투자배급사, 한국영화산업노조에 제안했다. 감독조합을 이끌고 있는 권칠인, 한지승, 정윤철, 김철한 감독을 만나 그간의 사정과 향후 대책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씨네21>_최근 5개월 동안 3명의 감독이 촬영 중 하차하거나(<미스터 K>의 이명세 감독, <동창생>의 박신우 감독), 하차했다가 현장에 복귀했다(<남쪽으로 튀어>의 임순례 감독).

권칠인_ 과거에도 없었던 건 아니지만 짧은 시간 동안 비슷한 사태가 연달아 터졌다. 이런 일이 벌어지면 감독뿐만 아니라 투자사는 투자사대로, 제작사는 제작사대로, 스탭은 스탭대로 피해가 크다. 얼마 전 <남쪽으로 튀어>에 참여한 스탭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세명의 감독(제작자, 감독, 배우)이 현장을 지휘하니 정말 죽을 맛이라더라. 영화를 그만두고 싶을 정도로 정신적으로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한지승_예전부터 제작 시스템이 건강하지 못해 언젠가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는 예상은 했었다. 그게 결과로 나온 것 같다. 최근 일어난 일련의 사태의 대상이 기성감독이라는 점에서 당혹스러웠다. 신인감독의 무기력과 의욕 저하로 연결될 가능성이 있으니까.

정윤철_촬영이 상당 부분 진행되다가 제작자와 갈라지곤 했던 과거와 달리 이번에는 감독들이 촬영 초반에 하차했다. 그런데 촬영 회차나 예산을 맞추지 못해 발생한 게 아니다. 감독과 제작자가 바라보는 영화에 대한 그림이 다르다는 이유로 갈라진 것을 볼 때 최근 현장에서의 어떤 흐름이 과거와 많이 달라진 것 같다.

김철한_어떤 상황이든지 감독과 제작자는 이견이 생길 수 있다. 이번 사태를 통해 오해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감독을 해임했다’라는 소리다. 그런 말은 받아들일 수가 없다. ‘계약 파기’가 맞는 말이다. 문제는 계약을 파기한 뒤 취한 후조치가 얼마나 합리적이었는가다.

권칠인_시나리오대로 콘티대로 찍지 않아서 헤어질 수 있다. 제작자가 감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생각해 갈라질 수도 있다. 그러나 헤어지기로 했다면 서로의 권리와 자존감도 함께 지킬 수 있는 조치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계약은 쌍방이 하는 것이고, 계약 해지도 쌍방이 하는 거다.

시나리오대로 찍지 않았다?

<씨네21>_임순례 감독의 <남쪽으로 튀어>의 경우, 김윤석이라는 배우가 감독의 영역을 침범하면서 벌어진 일이기도 하다. 배우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생긴 사례랄까.

한지승_보통의 경우 감독들은 기획과 시나리오를 준비하다보면 2, 3년에 한편씩 작업하게 된다. 반면 배우는 1년에 한두편, 많게는 서너편씩 작품을 한다. 대체로 배우가 감독보다 현장 경험이 많게 된다. 어떤 상황에서는 배우의 판단이 더 효율적이고 맞을 수 있겠지.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건 롤, 위치의 문제다. 임순례 감독이 자리를 비웠을 때, 감독이 없다고 해서 배우가 직접 카메라를 드는 건 아닌 거다. 이 문제를 이번 사건을 통해 제대로 짚고 넘어가야 한다.

정윤철_김윤석 외에 배우가 감독의 영역을 침범하거나 감독을 대놓고 무시하는 경우는 직간접적으로 듣거나 보지 못했다. 사실 김윤석은 다소 특이한 사례다. 나를 비롯한 감독들의 생각은 그렇다. 배우가 연출에 대한 욕심이 있을 수 있겠지. 그걸 충족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본인이 직접 연출과 연기를 겸하면 된다. 한 작품에서 연출과 연기를 동시에 하는 배우들이 많잖아. 감독 데뷔한 뒤 감독조합에도 들어오면 되고. 우리 역시 기꺼이 반겨줄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임순례 감독의 사태처럼 배우가 다른 영역인 감독에게 상처를 주면서 현장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건 분명 문제가 있다.

<씨네21>_이명세, 임순례, 박신우 사건의 공통점은 현장에서 제작자가 “감독이 시나리오대로 찍지 않았다”고 생각한 것이다. 현재 시스템에서 감독과 제작자가 동상이몽을 꾸는 이유가 무엇인가. 프리 프로덕션 때 감독과 제작자가 어떻게 찍을 건지 약속하고 현장에 가는 게 아닌가.

한지승_과연 ‘현재의 제작 시스템에서 감독과 제작자가 충분히 논의할 수 있는 시간이 확보됐는가’라고 묻는다면 ‘의문이다’라고 답하고 싶다. 지금은 배우가 캐스팅되면 바로 촬영에 들어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배우들이 가만히 안 있는다. 그다음 스케줄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배우가 캐스팅되기 전에 돈이 충분해서 헌팅을 제대로 할 수 있나, 스탭을 꾸릴 수가 있나.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고 본다.

권칠인_현재 충무로의 관행은 이런 식이다. 주연배우가 확정되면 투자가 이루어진다. 투자 일정이 나오는 것도 이때다. 투자 일정이란 얼마만큼의 금액이 어떤 방식으로 제작사에 지급된다라는 내용이다. 투자금은 주연배우의 개런티가 나올 때 함께 지급받는다. 그전까지는 스탭을 구성할 수도, 헌팅을 비롯한 돈이 들어가는 프리 프로덕션을 진행할 수도 없는 게 현실이다. 예전에는 제작자가 빚을 내서라도 프리 프로덕션 진행비를 충당했는데, 지금의 제작자에게는 그럴 여력이 없다.

정윤철_<슈퍼맨이었던 사나이> 때 급하게 프리 프로덕션에 들어가는 바람에 된통당했잖아. 결국은 마인드가 중요한 것 같다. 감독도, 제작자도, 투자배급사도 짧게는 3, 4개월, 길게는 6개월 정도 프리 프로덕션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영화가 망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작업에 임해야 한다. 프리 프로덕션 때는 제작자나 투자배급사가 감독에게 간섭을 하더라도 촬영 때는 감독을 믿어야 한다. 지금은 반대다. 프리 프로덕션 때 감독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관심도 없고 터치도 안 하면서 촬영에 들어가면 ‘내가 생각했던 그림과 다르네’ 이런다. 연애를 충분히 하면서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난 뒤 결혼해야지, 조건만 보고 결혼하면 ‘이게 아닌가벼’ 되는 거다.

한지승_스탭을 구성할 때 감독인 내가 이 친구를 선택하면 저쪽(제작사 혹은 투자배급사)에서 선택하는 사람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도 이제는 관례가 된 것 같다. 과연 그게 시너지 효과를 내는 데 효율적인가는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감독과 투자배급사 사이의 제작사가 필요하다

<씨네21>_현장에서 감독과 제작사나 투자배급사가 가장 갈등을 빚는 부분 중 하나가 현장편집본이다.

정윤철_매주 보고됐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현장편집본이 매일 제작사와 투자배급사에 보고된다. 현장에서도 스탭 누구나 현장편집본을 확인할 수 있고. 현장편집본의 역할은 영화를 제대로 찍고 있는지 확인하는 가이드 정도인데…. 지금은 밥이 잘되고 있나 싶어서 밥솥 뚜껑을 수시로 열어보는 것처럼 수시로 확인한다. <말아톤> 때의 일이다. 80, 90% 정도 촬영한 것을 현장편집본으로 확인하니 망하는 줄 알았다. 너무 지루해서. 그런데 나중에 세트 분량을 마저 찍은 뒤 전부 이어 붙여보니까 그제야 연결고리가 생기면서 스토리가 펼쳐지더라. 어떻게 찍고 있는가는 확인할 수 있지만 전적으로 의존해서는 안되는 게 현장편집본이다. 독약과 같다고나 할까.

김철한_사실 현장편집본은 본편집을 위한 컨셉 정도이다. 현장편집본이 잘 나왔다고 해서 본편이 잘 나오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씨네21>_감독이 본업인 연출뿐만 아니라 제작을 겸하면서 생기는 문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정윤철_2006년 때 충무로에 우회상장 열풍이 불면서 많은 제작사가 배급업에 뛰어들었잖나. 투자배급사가 제작사를 거치지 않고 감독과 직접 접촉해 손을 잡기 시작한 것도 그때였다. 나 역시 그랬고. 그러다가 거품이 빠지면서 충무로의 토착 자본이 무너지고, 투자배급사는 막대한 자금을 바탕으로 지금처럼 직접 제작을 하게 된 것이다. 감독에게 제작사를 차려주기도 하고. 감독 입장에서 투자배급사와 직접 접촉해 일하면서 느낀 게 있다. 제작사 없이 투자배급사와 감독이 영화를 만드는 건 투자사에도, 감독에게도 안 좋은 것 같다. 담당 투자팀 직원이 오너가 아니기 때문에 무언가를 결정하는 데 한계가 있고. 시간도 그만큼 오래 걸리고, 책임감도 제작사만큼 있는 것도 아니고.

권칠인_감독이 감독의 역할을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감독과 투자배급사의 중간에서 완충 역할을 전문적으로 해줄 수 있는 제작사가 다시 살아나는 게 중요한 것 같다. 사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문제들은 투자배급사가 감독에게 직접 무언가를 요구하면서 생기는 것 같다. 그러다보니 제작사는 제작사대로 자기 역할이 없어지게 되고. 그러면서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게 되고.

정윤철_그런 점에서 <광해, 왕이 된 남자>가 좋은 사례인 듯하다. CJ가 <광해, 왕이 된 남자>를 추창민 감독에게 제의했을 때, 추 감독은 제작사인 리얼라이즈픽쳐스와 함께 프로덕션을 진행하고 싶다고 CJ에 요청했다. 리얼라이즈픽쳐스는 이병헌을 비롯한 주연배우 캐스팅, 프로덕션 진행 같은 제작사가 해야 할 역할을 충실하게 했고. 투자배급사, 제작사, 감독 등 3자가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 경우였던 것 같다.

<씨네21>_사실 늦은 감이 없진 않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나선 만큼 앞으로 감독조합의 계획은 뭔가.

김철한_앞으로도 이번 사건과 비슷한 일이 반복될 수 있다. 그럴 때 갈등을 빚은 감독과 제작자가 서로 생각할 시간을 충분히 갖는 게 중요한 것 같다. 그래서 감독조합은 제협과 함께 영화진흥위원회 공정경쟁환경조성특별위원회에서 이와 관련한 논의를 할 수 있는 자리와 제도를 만들 계획을 가지고 있다. 다만, 임순례 감독의 사건은 분명히 짚고 넘어갈 생각이다. 감독이 현장을 떠났을 때 감독이 없다고 해서 배우나 제작자가 촬영을 진행한 건 월권행위니까. <남쪽으로 튀어>의 제작자로부터 사과와 재발 방지에 관한 약속을 받을 것이다.

한지승_모두 모여서 원칙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현장에서 오늘 몇시간 일하는지, 언제 끝나는지, 다른 일은 언제 계약할 수 있는지 등 여러 요소를 알 수 있게 하자는 거다.

칠인_감독조합이 이번 일을 계기로 행동을 하기로 한 건 단순히 감독의 권익을 되찾기 위한 목적이 아니다. 감독은 물론이고, 스탭, 제작자, 투자배급사 모두 지금의 영화산업을 되돌아보자는 거다. 모두 함께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는 거다. 그래서 제협뿐만 아니라 조만간 투자배급사, 영화산업노조 모두 만날 거다. 거창한 자리 말고 편하게.

권칠인
한국영화감독조합장
<원더풀 라디오> <뜨거운 것이 좋아> <싱글즈> 등 연출

한지승
한국영화감독조합 운영위원
<파파> <싸움> <연애시대> <하루> 등 연출

정윤철
한국영화감독조합 운영위원
<슈퍼맨이었던 사나이> <좋지 아니한가> <말아톤> 등 연출

김철한
한국영화감독조합 특별대책위원회 위원장
<무법자> 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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