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형철의 스토리-텔링]
[신형철의 스토리-텔링] 보통을 읽고 나는 쓰네
2012-11-07
글 : 신형철
<시라노; 연애조작단> <러브픽션> <건축학개론> <내 아내의 모든 것>을 통해 본 최근 연애서사의 어떤 경향
<러브픽션>

기형도의 시 <그 집 앞>과 <빈집>처럼 말해볼까. 그날 마구 비틀거리는 겨울이었네.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었지만 너무도 가까운 거리가 나를 안심시켰네. 나 못생긴 입술을 가졌네. 그토록 좁은 곳에서 나 내 사랑 잃었네.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네. 그때는 너무 어렸으니 내 나이 겨우 20대 초반이었네. 사랑을 잃고 나는 썼네. 슬퍼하고 원망하고 저주하고 애원하며 썼네. 그러다 알았네. 내가 쓴 것들 속에는 오로지 ‘나’뿐이었네. 자기연민, 자기기만, 자기합리화, 자기모멸… ‘자기’로 시작하는 모든 것이 그 안에 있었네. 나는 쓰기를 멈추었네. 그리고 몇년이 지난 어느 날 나는 ‘닥터 러브’라는 사내가 쓴 책을 읽었네. 낄낄대며 찡그리며 감탄하며 찔끔대며 읽었네. 20대 때의 사랑은 나 혼자서 한 것이었네. 나는 그녀를 몰랐고, 그녀를 모른다는 사실을 몰랐네. 나는 사랑을 오해했고, 사랑을 이해하고 있다고 오해했네. 그 책을 읽고 나는 썼네. 두 가지 의미에서 썼네. 그간의 시행착오들이 아파서 입속이 썼고, 내 사랑을 해부해보고 싶어 무언가를 썼네. 그렇게 쓴 것들이 영화가 되었네. 아마도 나는 뒤늦게 용서를 빌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네.

알랭 드 보통, 혹은 사랑의 아나토미(anatomy)

1970년 전후로 태어나 1990년대에 첫 연애를 시작한, 20대 내내 두세번의 연애를 경험했으나 대체로 실패한, 30대를 통과하면서 비로소 지난 사랑의 패착을 분석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해진, 그리하여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서서’ 지난 사랑을 소재로 한 개인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영화를 내놓은 몇명의 남자 감독들을 생각하며 이 글의 첫 단락을 썼다. 올해 개봉돼서 두루 좋은 결과를 얻은 세편의 영화, <러브픽션> <건축학개론> <내 아내의 모든 것>(이하 <아내>)이 바로 그들의 작품이다. 전계수(1972년생), 이용주(1970년생), 민규동(1970년생) 감독이 모두 동년배들이라는 사실, 그리고 이들 영화의 남자주인공들이 범하는 시행착오와 그들이 사로잡혀 있는 정서에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이 나로 하여금 어떤 ‘세대’를 가정하게 만들었다. 나는 이 감독들이 30대의 어느 날엔가 알랭 드 보통의 소설을 읽었을 것이라고 짐작해본다. 왜 하필 보통인가. 할리우드의 동세대 감독인 마크 웹의 사랑스러운 영화 <500일의 썸머>(2009)에서 주인공 탐(조셉 고든 레빗)이 보통의 책 <행복의 건축>을 읽는 장면을 기억하시는지. 내 궁리는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지금은 논픽션에 주력하고 있지만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 1969∼)은 소설 세권을 연달아 발표함으로써 작가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① <Essays In Love>(1993) ② <The Romantic Movement>(1994) ③ <Kiss and Tell>(1995)이 그것들이다. 이중 ①이 <로맨스>(한뜻, 1995)라는 제목으로 출간되면서 그는 우리에게 처음 소개됐다. (출간 직후에 나는 우연히 이 책을 읽었고 지인들에게 한동안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나 당시에 이 책은 유명해지지 않았다.) 한국에 그의 독자들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①이 역자, 제목, 출판사가 모두 바뀌면서 재출간된 2002년부터다. 이후 나머지 두권도 엇비슷한 제목과 표지를 갖추고 (재)출간되면서 3부작이 구색을 갖추게 된다. ①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② <우리는 사랑일까> ③ <너를 사랑한다는 건>인데, 보시다시피 서로 잘 구별도 안되는 흐리멍덩한 제목들이 붙었지만 판매에는 기여한 바가 적지 않을 것이다. (제대로 옮기자면 <사랑에 빠진 에세이> <낭만주의 운동> <폭로> 정도가 될 텐데, 확실히 제목을 바꾸고 싶어지기는 한다.) 그리고 이제는 그도, 그의 책도, 잘나간다.

보통의 개성은 어디에 있는가. 그의 ‘내용’보다는 ‘형식’쪽을 따져보는 게 옳을 것이다. 문학 전공자들이 대개 한번쯤은 들춰보는 <비평의 해부>(1957)에서 노스럽 프라이는 산문으로 된 문학작품을 네 갈래로 나눈다. 소설, 로망스, 고백, 아나토미(해부). 말하자면 소설만 있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로망스’는 소설보다 더 오래된 형식이지만 ‘낡은’ 것이 아니라 그냥 ‘다른’ 것이다. 풍속과 부딪치며 살아가는 실제적인 인간보다는, 마치 리비도 그 자체를 표상하는 듯한 양식적이고 원형적인 인간을 다루는 이야기들. (제인 오스틴과 에밀리 블론테의 차이를 생각해보라.) 루소의 <고백록>(1770)이 대표하는 종류의 글쓰기를 ‘고백’이라는 하나의 장르로 정당하게 자리매김하자는 것도 이 구분법의 취지다. 덧붙여 프라이는 인간을 어떤 관념의 표상으로 보고 그 인간(관념)을 해석하고 해체하는 박학다식한 글쓰기를, 이 분야의 기념비인 로버트 버턴의 <우울증의 해부>(1621)에서 착안해 ‘아나토미’라고 명명했다. (이 네 갈래의 형식을 모두 종합한 작품도 있을까? 있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1922)는 이 모든 것이다!) 그렇다면 보통의 글쓰기는 어떤 부류에 속할까.

그의 초기 3부작은 흥미진진한 연애소설이지만 그냥 소설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 다른 성분이 가미돼 있었기 때문에 빛났다. 프라이의 갈래 이론을 참조하면 그 ‘다른 성분’이란 바로 아나토미다. 보통의 주인공은 연인과 자신이 만난 사건이 989.727분의 1이라는 확률을 통과한 결과임을 계산해내고 흡족해하며, 그 이름도 생소한 그라우초 막스(Groucho Marx)의 말(“나 같은 사람을 회원으로 받아주는 클럽에는 가입할 생각이 없다”)을 인용하면서 “그녀가 정말로 멋진 사람이라면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에 빠진 자신을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주장한다. 그는 끊임없이 분석하고, 인용하고, 논증한다. 이 분야에서 그의 장인어른뻘인 밀란 쿤데라보다 깊이가 얕을지는 몰라도 재치는 확실히 한수 위다. (처음에는 아버지뻘이라고 썼다가 고쳤다. 여자 친구와 무사히 결혼하기 위해 아나토미의 대가(大家)인 장인의 전공 분야를 공부하고 또 공부하는 모습이 더 보통과 어울려서다.)

아나토미 장르의 역사가 유구한 서구에서도 보통의 등장은 꽤 발랄한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던 모양이어서 그의 책은 그쪽에서도 수많은 독자를 거느리게 된다. 나는 그쪽과 이쪽을 막론하고 보통의 책을 읽으면서 사랑을 ‘해부’하는 법을 배운 세대들이 있다고 가정해본다. 그리고 그 세대들이 영화를 만들면서 ‘로맨틱코미디’라는 지극히 관습적인 장르에도 아나토미적인 요소가 새삼스럽게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500일의 썸머>에서 보통의 책이 등장하는 것을 보며 나의 궁리가 시작되었다고 앞에서 말했는데, 나는 올해 개봉된 한국 남자 감독들의 발랄한 영화들을 보면서 그런 궁리를 굳혀 나갔다. 왜냐하면, 거의 스쳐 지나가기 때문에 알아보기 쉽지 않지만, <러브픽션>과 <아내>에서도 보통의 책이 슬쩍 등장하기 때문이다. <러브픽션>에서 주월(하정우)은 희진(공효진)과 첫 섹스를 한 이후 소파에 누워서 보통의 첫 소설을 읽는다. <아내>에서 두현(이선균)이 정인(임수정)의 모든 것을 보고서로 정리하는 장면에서 정인의 책상에 쌓여 있는 책은 모두 보통의 책이다. 보통은 이제 ‘사랑의 아나토미’의 아이콘이다.

<내 아내의 모든 것>

아나토미의 요소들-사랑 기계, 닥터 러브, 아날로지

저쪽의 사례로 <500일의 썸머>가 있다면 이쪽의 사례로는 먼저 김현석 감독의 <시라노; 연애조작단>(이하 <시라노>, 2010)을 언급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 영화에는 보통의 소설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연애조작단의 업무를 빠른 속도로 소개하는 이 영화의 도입부가 상쾌하게 느껴지는 것은 편집의 리듬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사랑이 발생하는 메커니즘을 매뉴얼로 만들어서 하나씩 관철시켜 나가는 그 장면이 바로 ‘낭만적 사랑’이라는 유구한 신화를 해부하는 아나토미의 매력을 발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해부를 가능하게 한 이 영화의 기본 명제는 이것이다. ‘사랑은 인위적으로 조작 가능한 감정이다.’ 운명적인 우연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기계적인 필연성이 있을 뿐이라는 것. 정신분석학에서 ‘전이 사랑’(transference love)이라 부르는 현상을 참조해본다면 저 명제는 참이다. 왜 분석상담 과정에서는 피분석자가 분석가를 사랑하게 되는 일이 빈번히 벌어지는가. 그것은 상담이라는 상황이 구비하고 있는 특정한 조건 때문이다. 거꾸로 말하면 우리는 특정한 조건 속에 던져질 때 필연적으로 사랑에 빠질 수 있다. 정신분석학자 믈라덴 돌라르(Mladen Dolar)의 말마따나 우리는 ‘사랑 기계’다.

물론 이 영화는 저 명제를 거부하기 위해 도입한다. 연애조작단의 ‘작업’은 영화 만들기에 대한 반성적 성찰처럼 보이는 데가 있고, 그를 통해 멜로드라마가 어떤 매뉴얼에 의해서 재생산되고 있는지를 폭로하는 효과를 거두지만, 후반부는 다시 얼마간 익숙한 멜로드라마의 문법으로 되돌아가기 때문이다. 예측 불가능한 진심이 돌출하고 작업이 혼란에 빠지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이 영화는 결국 사랑을 하는 것은 기계가 아니라 인간이라고 말하고 싶어 한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흥미롭다. 첫째, 아나토미를 위해 필요한 제3의 시선, 즉 ‘사랑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대해’ 그리는 시선이 존재한다는 것. 사랑에 빠진 자와 거리를 두고 이를 관찰하는 그 제3의 인물을 (알랭 드 보통의 별명을 빌려) ‘닥터 러브’라고 하자. <시라노>에서 그 역할을 하는 것은 병훈(엄태웅) 자신인데, 물론 그 닥터가 다시 환자로 되돌아가고 마는 것이 이 영화의 아이러니다. 둘째, 이 제3의 시선을 뒷받침하는 유비(類比, analogy)의 장치가 동원된다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연극’이다. 연애조작단은 원래 연극단원들이 아닌가. 그래서 관객은 사랑과 연극을 자연스럽게 유비할 수 있게 되고 이 아나토미에 동참할 수 있게 된다.

이 두 가지 요소는 뒤에 나온 영화들에서도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첫째, 닥터 러브의 경우. <러브픽션>과 <아내>에 이르면 이 제3의 인물은 주인공 자신이 아니라 다른 인물로 완전히 분화된다. <러브픽션>에서는 M(이병준)이라는 가상의 인물이 주월이 혼란에 빠질 때마다 나타나서 (언제나 옳지만은 않은) 충고를 늘어놓는다. 물론 이 M은 메피스토펠레스이겠지만, M이 주월을 자주 베르테르에 견준다는 점에 주목한다면, 그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중심 텍스트로 설정하고 ‘사랑의 모든 것’을 해부한 책 <사랑의 단상>의 저자 롤랑 바르트의 패러디일지도 모를 일이다. <아내>의 경우 그 역할을 맡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장성기(류승룡)다. 이 영화는 그가 제 본분을 잊고 오히려 사랑에 빠져버리는 실수를 범하는 설정을 채택해 <시라노>에서의 병훈의 실패를 반복한다. 그리고 여기에 덧붙이자면, <건축학개론>에서 승민(이제훈)의 첫사랑이 엉망이 된 까닭은 그의 곁에 있는 유일한 닥터 러브가 하필이면 납뜩이(조정석)였기 때문일 것이다. 전형적인 마초의 지혜를 전수함으로써 친구를 나락에 빠뜨린 그는 1997년에 재수생이었으니 그 무렵 막 출간된 알랭 드 보통의 소설을 읽을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둘째, 유비 구조의 경우. 이미 지적했듯이 <시라노>의 경우 그것은 ‘연극’이고 <500일의 썸머>의 경우는 ‘건축’이다. 후자의 주인공인 탐은 건축가가 되기를 꿈꾸는 터라 사랑하는 여인과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일은 도시를 설계하는 일과 자주 유비된다. 그러나 이 유비는 그가 낭만적 사랑의 신봉자였기 때문에 설정될 수 있었던 것이어서 사랑의 실패와 더불어 이 유비 구조는 무너진다. 끝에서야 드러나는 것이지만, 이 영화에서 사랑과 진정한 유비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계절’일 것이다. 썸머(summer)가 떠난 자리에 새로운 사랑인 오텀(autumn)이 찾아오는 마지막 장면은 그 유비 구조를 완성하기 때문에 짜릿하다. 건축이라는 유비가 비록 무너지긴 하지만 이것이 매우 쓸모있는 것이라는 점은 <건축학개론>과 <아내>가 동일한 유비 구조를 채택하고 있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차이가 있다면 전자가 ‘쌓아올림’의 은유를 활용하고(사랑은 집을 짓는 일과 같다), 후자는 ‘무너짐’의 은유를 활용한다는 것에 있다(사랑은 지진처럼 시작되고 지진처럼 끝난다). <러브픽션>의 경우 그것은 제목이 알려주고 있듯이 바로 소설이어서 이 영화에서 사랑하기와 소설쓰기는 내내 평행적인 관계를 맺는다.

지금 반성하고 있습니까? - 연애성장서사의 일반문법

이제 더 흥미로운 공통점에 대해서 이야기하자. <500일의 썸머>에는 없는, 그러나 <시라노> <러브픽션> <건축학개론> <아내>에는 어김없이 나오는 한 가지 설정에 대해서 말이다. 이 영화들 모두에서 서사의 진행 방향을 부정적인 쪽으로 꺾는 것은 남자들의 의심이다. 이들은 연인의 과거 및 현재의 남자들과의 관계를 의심하기 시작하고, 그녀를 “썅년”(<건축학개론>) 혹은 “스쿨버스”(<러브픽션>)라 간주한다. 그래서 스스로 떠나거나, 이를 견디지 못한 연인이 떠나게 만든다. 그리고 그들은 영화의 끝에 이르러 자신의 의심이 근거가 없는 것이었고 모든 것이 자신의 미성숙함 때문에 일어난 일임을 깨닫고 죄의식에 휩싸여 반성한다. 요컨대 최근 한국영화들이 들려주는 연애서사는 모두 ‘반성하는 남자들의 서사’다. 이 글의 서론에서 내가 “이들 영화의 남자주인공들이 범하는 시행착오와 그들이 사로잡혀 있는 정서에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이 나로 하여금 어떤 ‘세대’를 가정하게 만들었다”고 적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왜 갑자기 한국영화의 남자주인공들은 일제히 반성을 시작하게 된 것일까.

이 감독들은 정말로 30대의 어느 날엔가 알랭 드 보통의 소설을 읽고 일제히 자신의 20대를 되돌아보게 되었고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고 미숙했는지를 깨닫게 된 것일까. 그래서 금시작비(今是昨非)하여 개과천선(改過遷善)의 심정으로 옛사랑에게 회한의 편지를 띄우게 된 것일까. 남자들의 성숙을 증명하는 이 변화는 그 자체로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그러나 조금 미심쩍은 데가 있다. 왜 관객은 영화의 끝에 이르러 이 모든 오해와 파국이 단지 남자의 착시가 낳은 왜상이었을 뿐, 그의 여자는 늘 충실한 연인의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는가. 왜 초반부에는 유례없이 활기 넘치던 여성 캐릭터들이 후반부에 이르면 다소간 익숙한 여성상으로 되돌아가면서 결백해지는가. 그리고 왜 그녀들은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결국 남자들을 용서하게 되는 것일까. 고맙게도 이런 결말은 우리 남성 관객을 안도하게 한다. 모든 잘못은 나에게 있다고 말하면서 우리는 사랑에 대한 믿음을 회복할 수 있게 되고 모르는 게 나을 사랑의 위험한 진실을 피해가는 데 성공하지 않는가. 언젠가 이렇게 적었다.

“연애소설의 문법이란 무엇인가. 태초에 환상이 있다. ‘나는 그의 욕망을 안다, 나는 그가 원하는 바로 그녀다’가 그것이다. 그러나 환상은 깨지기 마련이어서 어느 날 타자는 ‘넌 나를 몰라, 너는 내가 원하는 그 사람이 아니야’라고 통보해온다. 그러니 이제는 환멸의 시간이다. 나는 그제야 나의 무지를 깨닫고 타자를 알고자 하는 욕구로 불타오른다. 우리의 그녀는 절치부심, 불철주야, 동분서주할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과정에서 타자가 아니라 오히려 나 자신을 알게 된다. 사랑이 실패한 것은 내가 타자를 몰랐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나 자신을 몰랐기 때문이라는 것, 진정한 문제는 지금 타자를 잃어버렸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내가 나 자신을 잃어버린 채 살아왔다는 것에 있음을 알게 된다. 이별은 이렇게 독이면서 약이다. 질 나쁜 연애소설은 연애에서 생긴 문제를 다른 연애(또 다른 타자, 반복되는 환상)로 봉합하지만, 괜찮은 연애소설은 같은 문제를 자기 발견(또 다른 나, 성숙한 환멸)의 형식으로 해결한다.”(졸저, <몰락의 에티카>, 683쪽)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지만 딴에는 이것이 대중적인 연애서사의 일반문법이라고 생각하며 썼다. 요컨대 ‘태초의 환상, 환멸의 시간, 자기의 발견’이라는 도식이다. 이를테면 연애성장서사라고 할까. 물론 이것은 여자가 주체일 때를 염두에 둔 것이다. 이제는 물어야 할 것 같다. 남자들의 연애성장서사는 어떤 지점까지 나아갈 수 있고 또 나아가야 할까. 무엇이 우리 어리석은 남자들을 진정으로 성장하게 하는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던 연인을 의심했다가 이를 뉘우치면서인가, 아니면 사랑이라는 것에는 애초에 ‘그 자리’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으면서인가. 잘은 모르겠지만, 성장이란, 더이상 그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되어버렸을 때에만 진정으로 가능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만을 해왔기 때문에 늘 같은 자리를 맴돌았을 뿐 조금도 성장하지 못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너에게 용서받기 위한 반성, 아니, 이미 내가 나 자신을 용서해버린, 그런 반성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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