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샤는 다른 건 전혀 없어. 그냥 매력적으로 보일 뿐이야. 좀 허영 같기도 하고. 첼시가 오히려 솔직하지.” <짐승의 끝>에서 야구 모자를 쓴 정체불명의 남자(박해일)는 TV 축구경기를 보며 이렇게 말한다. 당시 대사에 대해 조성희 감독은 “지금 생각하면 너무 오글거린다”고 웃으며 말하긴 했지만, 뭐랄까 <늑대소년>은 그런 ‘솔직한’ 감정에 충실한 판타지가 아닐까 싶다. 미쟝센단편영화제 대상 수상작인 <남매의 집>(2009), 밴쿠버와 로테르담영화제에 초청됐던 장편 데뷔작 <짐승의 끝>(2010)으로 주목받은 그의 신작 <늑대소년>은 이전작들과는 정반대의 방식과 스타일로 풀어낸 동화다. 지난 몇년간 <장례식의 멤버>의 백승빈, <나는 곤경에 처했다>의 소상민, <파수꾼들>의 윤성현 등 영화아카데미 졸업과정작품 출신 감독들이 한국 영화계의 뜨거운 관심이었다면 그들 중에서 가장 먼저 제도권 영화를 만든 것도 그다. 어쨌건 그는 여전히 리얼리즘과 거리가 먼 세계에서 묘한 유머가 살아 있는 멜로드라마를 만들었다. ‘척력’의 영화를 만들었던 그에게 ‘인력’의 영화를 만든, 그 급격한 온도차에 대해 물었다.
-영화사 비단길의 김수진 대표는 나홍진의 <추격자>(2007), 작가 출신 박훈정의 <혈투>(2010) 등을 제작하며 신인감독을 발굴하는 ‘촉’으로 유명하다. 맨 처음 어떻게 만났나.
=<짐승의 끝> 후반작업을 하던 시기에 만났다. <남매의 집>을 좋게 봤다며 다음 작품을 함께해보면 어떻겠냐고 하셨다. 대사나 장면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나 정적이 흐를 때 ‘마가 뜬다’는 표현을 하는데 그 ‘마’를 잘 이용하는 것 같다는 말씀을 하셨다.
-<남매의 집> <짐승의 끝>과 비교하자면 <늑대소년>은 상당히 다른 화법과 구조로 이뤄졌다. 이전작들의 의도적인 불편함과는 전혀 다른 세계다. 이전작들이 관객과의 교감을 일부러 거부하는 듯한 영화라면 <늑대소년>은 정반대다.
=우리 부모님은 극장에 1년에 한두번 정도 가는 분들인데, 전에 집에서 <남매의 집>을 함께 본 적 있다. 어머니는 보시다가 앉은 채로 잠이 드셨고 아버지는 ‘이게 뭐니?’ 그러셨다. (웃음) 섭섭했다기보다 생각해보면 내가 영화를 시작한 계기도 영화 보고 ‘멋지다’, ‘감동적이다’ 그런 느낌을 좋아해서인데, 그것과는 좀 거리가 먼 작업들을 해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영화는 이전 두 영화와는 그 ‘목적’이 전혀 다르다고 생각한다. 이번 영화를 하면서는 관객이 이걸 보고 웃을까, 이런 장면을 좋아할까, 잘 전달이 될까, 그런 것들을 계속 염두에 뒀다. <늑대소년>은 처음부터 관객이 공감할 수 있고 정서적으로 어떤 울림이 있는 영화를 해보자는 생각에서 출발한 영화다. 제도권에서 상업영화를 만들기 위한 어떤 타협 같은 거라기보다 애초의 컨셉 자체가 ‘가족영화’였다.
-좋아하는 영화들이라면.
=80년대 미국영화들을 정말 좋아한다.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나<E.T.> (1982), 그리고 <구니스>(1985) 같은 영화들을 보며 성장한 세대라. 그리고 픽사의 애니메이션들은 정말 위대하다. <늑대소년>은 그렇게 내가 좋아했던 옛날의 풋풋한 감성으로 돌아가 만들고자 했던 영화다.
-<늑대소년>은 <E.T.>나 <가위손>(1990)을 비롯해 나중에 픽사와 조우하게 되는 브래드 버드의 데뷔작 <아이언 자이언트>(1999) 같은 감성의 영화다. 이방인과의 우정이랄까.
=<아이언 자이언트>는 그런 유의 영화 중에서 정말 좋아하는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영화에 괴물이 나오면 무조건 좋아한다. (웃음) 아무래도 어려서부터 그런 영화들을 보고 자라며 영화에는 괴물이든 로봇이든 하여간 뭔가 신기한 게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최근에 개봉한 팀 버튼의 <프랑켄위니>는 아직 보지 못했는데 그 원작이 된 단편 <프랑켄위니>(1984)도 정말 잘 봤다. 그게 팀 버튼이 20대 중반에 만든 영화인데 ‘영화감독이 되려면 어려서부터 이 정도는 해야 되는구나’ 하는 생각에 좌절감이 들기도 했다. (웃음) 기본적으로 <프랑켄슈타인>이 그런 이야기의 원형이라면 물론 <킹콩>도 있고 <렛미인>(2008)이나 <트와일라잇> 시리즈를 얘기하는 분도 있더라. 모두 다 사람이 아닌 존재와의 우정을 그리고 있다. 오해 때문에 그런 무고한 존재들이 괴물이 되고 결국 희생당한다. 생각해보면 참 판에 박힌 스토리다. (웃음) 한국영화에도 좀 그런 캐릭터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예전부터 했다.
-송중기가 늑대소년을 연기하면서 달라진 부분들이 있나.
=‘소년’과 ‘남자’의 경계에 있으면서 순수함과 동시에 너무 순수해서 위험한 그런 복합적인 느낌을 가져야 했다. 이미지가 중요한 배우들이 과연 이런 캐릭터에 흔쾌히 응할지도 우려였다. 중기씨가 선뜻 한다고 해서 다행이었지만 한편으론 의외였다. 처음에 만나 함께 식사하면서 계획이 있냐고 물었다. 늑대소년을 한다고 하면 뭐가 떠오르는지, 어떤 인상이나 영감 같은 게 있냐고. 그런데 전혀 없다고 하더라. 그러면서 ‘감독님은 그런 게 있을 것 아니냐’고 묻기에 나도 없다고 했다. (웃음) 말하자면 서로 텅 빈 상태에서 시작했다. 그게 오히려 도움이 됐던 것 같다. 게다가 중기씨는 워낙 열정적인 배우여서 완벽하게 준비하고 시작해야 한다는 의지가 강했다. 캐스팅도 안심이지만 저렇게 노력하니까 뭐가 나와도 나오겠지, 하는 기분이었다. 스타도 스타지만 진짜 배우로서 연기에 대한 야심이 엄청나구나, 하고 생각했다.
-현실과 판타지를 오가는 이야기에서 엄마로 출연한 장영남의 연기가 무게중심이 된 것 같다.
=정말 혼자 알아서 다 하셨다. ‘이 장면에서 엄마로서 그냥 말 좀 뭐라고 길게 해주시면 안돼요?’라는 어처구니없는 감독의 요구에도 멋진 애드리브로 척척 해내신다. 나로서는 너무 완벽해서 딱히 할 말이 없었던 건데, 나중에는 ‘감독이 엄마 역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서 그런가, 나하고는 너무 얘기를 안 하네’ 하고 자신을 방치한다고 오해하기도 하셨더라. (웃음)
-<남매의 집>과 <짐승의 끝>에서 내적 긴장감을 끝까지 유지하는 것은 묘한 음모론의 세계고 그것이 또한 당신 영화의 매력이었다. <늑대소년> 역시 후반부에 소년의 정체가 밝혀지면서 뭔가 그런 게 드러난다. 그런데 그게 크게 다뤄지지는 않는다.
=늑대소년의 탄생배경이 드러나는 신도 보면 일부러 거기 집중하지 못하게 했다. 엄마는 애들한테 ‘손톱 그만 뜯어’ 그러고 주변의 다른 인물들도 딴짓을 한다. 말하자면 그 얘기 자체를 중요하게 다루고 싶지 않았다. 어쨌건 그 소년은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규정되고 버려지는 운명이다. 태어난 것 자체가 죄인 거다. 촬영 전에 가까운 친구에게 시놉시스를 보여준 적 있는데, 늑대소년의 탄생 비화를 거대한 음모론으로 만들면 어떻겠냐고 했다. 그런데 나는 그것보다는 인물들의 자유로운 관계와 순수한 사랑, 그런 걸 보여주고 싶었다.
-시놉시스에 대해 지적한 그 친구처럼, 당신의 이전 영화를 좋아했던 사람들이 실망감을 느끼진 않을까.
=<늑대소년>은 예고편만 봐도 모든 게 딱 예상이 되는 영화다. (웃음) 줄거리도 그렇고 내적인 디테일들도 관습적인 표현투성이다. 전에 보지 못한 캐릭터도 없다. 내용도 동화적이고 판타지에다 냉정하게 보면 말이 안되는, 현실성이 하나도 없는 이야기다. 그런데 나는 그런 데서 찾는 재미를 좋아한다. 어떻게 보면 <남매의 집>이나 <짐승의 끝> 그리고 <늑대소년>까지 사실과는 동떨어진 이야기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는 것 같다. 그런 가운데 음모론 같은 이전 영화의 감성과는 좀 다른 편하고 평이한 이야기를 했지만, 평소 극장 잘 안 가는 관객까지 편안하게 몰입시키는 영화를 해보자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표현이나 스토리 등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굉장히 고전적으로 만들고 싶었다.
-뭔가 오버하는 듯한 악역 지태(유연석)를 비롯해 늑대소년의 소문을 듣고 달려온 군인 대령(서동수)과 강 박사(유승목)의 어딘가 허술한 모습에서, 당신이 말한 동화나 판타지의 세계라는 느낌이 들었다. 가령 <E.T.>에서 박사나 군인들이 등장하는 순간 굉장히 다른 정서로 흘러가지 않나.
=<반지의 제왕> 같은 볼거리가 풍성한 판타지라기보다 ‘감정적인 판타지’로 느껴줬으면 좋겠다. 누구나 마음속에서 꿈꿔봄직한 마음의 판타지라고 생각한다. 더불어 보여주고 싶었던 것 중 하나는 한국적, 토속적 정서다. 시대적 배경이 1950∼60년대라, 맨 처음 등장한 거지꼴의 소년을 보고서 전쟁고아라고 여기는 순간 현실과 판타지가 자연스레 만나 마을 사람들이 모두 온정적으로 된다. 그리고 한겨울에 집에서 내복 입고 생활하는 모습, 밖에서 애들이 놀고 있으면 엄마가 ‘밥 먹어~’하고 부르는 정겨운 모습, 새로 이사 온 집에 몰려들어 짐 하나씩 나르는 이웃들의 모습 같은 것들. 그래서 동네 아이들과 어울리는 송중기의 모습도 약간은 ‘동네 바보 형’ 같은 모습으로 연출했다. (웃음) 대령은 대충대충 놀러온 사람처럼 보이고 박사는 늑대소년을 감싸주려는 정감있는 모습이고, 하여간 무섭게 보이는 사람들이 알고 보면 하나같이 ‘허당’이다. 그렇게 온기가 도는 판타지였으면 했다.
-동시에 한 여자만 바라보는 늑대소년의 모습은 거의 여성 관객을 위한 완벽한 판타지로 느껴진다.
=맹세코 사람들이 그렇게 느낄 줄은 몰랐다. 분명 여성 관객이 더 좋아하는 것 같긴 한데, 남자주인공이 대단한 ‘스펙’을 가진 사람도 아니고. 물론 얼굴이 잘생기긴 했지만. (웃음) 그리고 다른 영화의 늑대인간과 다른 점 중 하나가 완전히 괴수처럼 변하지는 않는다는 거다. 늑대인간으로 변했어도 사람의 모습이 남아 있길 바랐다. 일말의 로맨틱함이랄까. <울프맨>(2010)의 베니치오 델 토로처럼 변하는 건 원하지 않았다. ‘액션’이나 ‘크리처’의 쾌감으로 다가가는 영화는 싫었다. 또한 아마도 남녀, 세대 불문하고 이런 일편단심 스토리에 대한 애정이 있는 것 같고 또 여성 관객에게는 <바보온달과 평강공주>처럼 더 어필한 부분도 있는 것 같다.
-‘학생’ 시절의 영화로 주목받고 제도권의 첫 영화를 만든 감독으로서 이번 영화를 통해 겪은 시행착오가 있다면.
=기술적인 부분도 있지만 내 영화를 확실히 이해시키지 못한 부분도 분명 있는 것 같다. 감정적인 부분 말고 형식적인 측면에서 <늑대소년>은 절대 현실적인 영화가 아니다. 리얼리티는 별로 없고 논리적인 개연성도 없어 보인다. 그런 것들이 영화에 해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악당 지태의 경우도 <콩쥐팥쥐>에 나오는 계모 같은 그런 악당의 모습으로 보이길 바랐다. 의도적으로 모든 인물들이 동화나 만화 속 캐릭터들처럼 다가가길 원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일부 관객에게 몰입을 방해하고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었다면 어쨌거나 연출자의 몫이 아닌가 싶다. 가령 <가위손>에서, 마을 사람들이 그때까지 산꼭대기의 고성에 안 들어가봤다는 게 말이 안된다, 몰려온 사람들에게 여자아이가 ‘가위손이 죽었어요’라고 말한다고 해서 아무런 의심도 없이 싹 다 돌아서는 것도 말이 안된다. 말하자면 이런 영화들은 ‘이 영화의 정서는 이런 거다’ 하는 걸 제대로 선언하고 각인시키면서 그 자체로 자연스럽게 무드를 타고 가야 한다. 정서의 흐름이라는 측면에서 그런 부분들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한 것 같다.
-그 얘기는 사실주의와는 거리가 먼 감독들 모두 고민해야 하는 부분들이 아닐까 싶다. 당신이 계속 더 껴안고 가야 할 화두로도 여겨진다.
=예전에 영화아카데미 입학하고서 오리엔테이션 때 선배인 최동훈 감독님이 특강을 오신 적 있는데 아무것도 모르던 내가 주제 넘게 이런 질문을 드린 적 있다. 다른 감독들의 영화를 보다 보면 ‘내가 저거보다 더 잘할 수 있는데’ 그런 생각 들 때가 없냐고. 그때 최동훈 감독님이 하신 얘기는 오직 ‘영화와 나’라는 일대일 관계만 생각하라는 거였다. <늑대소년>을 촬영할 때는 마음속으로 ‘오늘도 무사히’라는 생각밖에 없었다. 스케줄이 빠듯하기도 하고 경험이 부족해서 따라가기 급급한 경우가 많았다. 초짜 감독들 누구나 다 그런 과정의 연속이 아닐까 싶다. 중간에 모니터링 시사를 할 때 내가 머리를 쥐어뜯고 있으니 어떤 분이 ‘감독들은 이런 거에 익숙해져야 한다. 이거저거 다 신경 쓰면 감독 오래 못한다’고 하셨다. 감독이라면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가지고 지치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였다. 더 나은 다음 영화를 위해서 명심했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