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소년>은 싫어하기가 쉽지 않은 영화다. 영상은 아름답고 리듬은 유려하며 대사는 생생하고 연기는 사랑스럽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에 대한 선의를 한순간도 포기하지 않는 착한 영화다. 그러나 전적으로 동의하기가 어려운 영화이기도 하다. 나는 언제나 울 준비가 돼 있는 관객이고 때로는 울기 위해서 심야영화관 제일 구석 자리에 앉기도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는 눈물을 흘리는 데 실패했다. 이 영화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데 성공한 많은 관객의 여운을 깨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지만, 내가 동의할 수 없었던 대목들을 적어보는 일이 이 영화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 한 가지 방법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보려 한다. (조금도 애정을 느낄 수 없는 텍스트였다면, 대체로 그래왔듯이, 아무것도 쓰지 않는 편을 택했을 것이다.) 이 영화는 주요 인물 세 사람 중에서 누구에게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세 가지 측면에서 읽을 수 있는 영화처럼 보인다. 내가 보기에 이 영화는 철수(송중기)에 대해서는 어떤 것을 안 했고, 순이(박보영)에 대해서는 어떤 것을 너무 많이 했으며, 지태(유연석)에 대해서는 어떤 것을 못했다.
한 소년이 있었네 - 타자의 서사
이 소년은 도대체 누구인가. 굶주린 철수가 삶은 감자를 먹기 위해 처음으로 등장할 때 이 소년은 <정글북>(러디어드 키플링, 1894)의 늑대소년 모글리처럼 ‘야생과 문명’이라는 대립 구도 위에서 움직이는 ‘인류학적’ 캐릭터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영화가 몇개의 소도구들을 동원해서 당시의 반공(反共) 열기를 슬쩍 보여줄 때 이 늑대는 어쩌면 빨치산의 은유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고, 그래서 그는 ‘적군과 아군’이라는 대립 구도 위에서 움직이는 ‘역사학적’ 캐릭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러나 이 소년이 실제로 늑대로 변하면서 저 오래된 늑대인간(werewolf)의 계보에 돌연 합류하는 순간 그는 ‘야성과 이성’이라는 대립 구도 위에서 움직이는 ‘철학적’ 캐릭터, 혹은 ‘마성과 신성’이라는 대립 구도 위에 놓여 있는 ‘종교학적’ 캐릭터처럼 보인다. 그러다 이 소년이 한국전쟁 당시 남한 정부의 비윤리적인 비밀 프로젝트가 낳은 돌연변이임이 밝혀질 때 이 캐릭터 주변에는 ‘권력과 희생양’이라는 대립 구도가 갖춰지고 그는 ‘정치학적’ 캐릭터가 되기에 이른다.
우리는 방금 네 가지 층위를 지적했다. 보다시피 늑대소년 철수라는 인물 안에는 네개의 ‘캐릭터-모티브’ 층위가 뒤엉켜 있다. 하나를 제대로 탐구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닐, 그만큼 제각각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캐릭터-모티브 층위들을 이 영화는 가볍게 넘나든다. 이미 20년 전에 제출된 프레드릭 제임슨의 포스트모더니즘론을 다시 참고한다면, 고유한 역사를 갖고 있는 것들을 종횡무진 뒤섞어버리는 이 영화의 전략이 가져오는 효과는 바로 역사성 그 자체의 폐기다. 도무지 1960년대 한국의 산골마을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당대의 역사성이 지워져 있는 화면 속에서 그래도 가끔은 등장하는 1960년대의 기호들은 당대의 역사적 현실을 지시하는 기능을 잃어버리고 어떤 이국적인(exotic) 뉘앙스마저 품는다. 나는 지금 리얼리스트의 자리에서 이 영화의 탈역사성을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런 비판은 이제 너무 낡아서 비평가의 자기만족 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감독이 하려고 하지 않은 것을 왜 하지 않았느냐고 비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하려고 한 것을 어떻게 해냈는지를 물어야 한다.
철수가 모글리(인류학)도 아니고 빨치산(역사학)도 아니고 울프맨(철학/종교학)도 아니고 엑스맨(정치학)도 아니라면, 이중 어느 하나가 아니라 이 모든 것이라면, 이 모두를 포괄할 수 있는 명칭은 그냥 ‘타자’(윤리학)일 것이다. 이 영화가 보여주려 한 것이 어떤 보편적인 타자의 형상이라면, 이 영화를 ‘타자의 서사’로 읽어주는 것이 온당한 독법일 것이다. 편의상 ‘타자의 서사’라고 불러본 이런 유형의 서사에는 세개의 국면이 있다. 첫째, 질문. 이방인이 공동체를 문득 방문할 때 그는 하나의 질문이 된다. 이 타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하는 난감한 물음이 공동체 내부에 잠재돼 있던 어떤 질문을 끄집어내기 때문이다. 둘째, 오해. 그러나 공동체는 질문과 정확히 대면하는 데 실패한다. 타자의 다름은 불온하게 여겨지고 그의 선의는 악의로 오해되기 때문이다. 셋째, 진실. 질문을 오해한 공동체는 필연적으로 오답을 내놓을 수밖에 없고 그 과정에서 타자는 처단되거나 추방된다. 그러나 공동체는 그동안 그들이 은폐해온 그들 자신의 진실을 얼핏 목격하게 되고 다시는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철수를 이런 의미에서의 타자라고 볼 수 있을까. 한 비평가의 답은 부정적이다. “문명을 이해하지 못하고 막무가내로 천진난만한 철수는 ‘펫’에 가깝다. 사랑하고 교감하는 반려견이 나만 바라보는 미소년으로 환생한다면, 이라는 10대 소녀의 백일몽이 현현한 형상이다.”(김혜리, <씨네21> 877호) 다른 한 비평가의 답은 긍정적이다. “근대의 정상성이라는 괴물에 맞서다.”(이용철, <씨네21> 20자평) 내게 철수는 이 두 비평가가 말한 것들 사이의 어디쯤에 서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가 애완견에 불과하다는 지적을 과장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는 확실히 늑대이기도 해서 ‘질문으로서의 타자’라는 역할을 전혀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여하튼 그런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후반부의 서사가 진행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근대의 정상성”에 맞설 수 있을 정도로 불온한 타자인 것 같지는 않다. 그는 산골마을 소규모 공동체의 넉넉한 환대를 받을 만큼은 충분히 ‘정상적’이다. 저 20자평은 이 영화가 할 수도 있었을 어떤 것에 대한 요약이지 실제로 해낸 것에 대한 평가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 철수는 이렇게 어정쩡한 타자성의 소유자인 것일까.
소녀가 소년을 사랑했네 - 낭만적 사랑의 서사
말할 것도 없이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이 순이이기 때문이다. 그는 순이의 사랑을 받을 만큼은 ‘우리와 같아야’ 하지만, 누군가의 미움을 받을 수도 있을 만큼은 ‘우리와 달라야’ 한다. 그래야만 그는 환대받으면서도 ‘동시에’ 박해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 사랑은 가능하면서 ‘동시에’ 불가능해진다. 가능한 동시에 불가능한, 그래서 영원한 사랑을 가리키는 개념은 바로 ‘낭만적 사랑’(romantic love)이다. 우리가 앞서 지적한 네 캐릭터-모티브의 잠재적 가능성들은 사실상 낭만적 사랑이라는 더 강력한 모티브로 대부분 빨려들어간다. 낭만적 사랑의 서사에도 세 국면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첫째, 운명. 자신들의 만남이 운명이라고 믿는 연인이 있다. (그러나 반복되는 우연은 우연의 반복일 뿐 필연이 아니다.) 둘째, 금지. 그 연인들은 자신들의 사랑을 방해하는 힘과 싸운다. (그러나 그 방해가 오히려 그들의 사랑을 북돋우는 긍정적 요인이라는 것을 그들은 모른다.) 셋째, 죽음. 그들은 실제로 죽거나 죽음과도 같은 이별을 경험함으로써 비극의 주인공이 된다. (그러나 그 죽음이 그들의 사랑을 영원한 것으로 완성한다.)
지난 세기의 끝에 전세계를 사로잡은 낭만적 사랑의 서사인 <타이타닉>(1997)은 그 범례다. 별 볼일 없는 청년 잭(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이 운 좋게 도박에서 이기지 않았더라면 호화 유람선을 어찌 탈 수 있었을까. 그러므로 이것은 ‘운명’이다. 그러나 로즈(케이트 윈슬럿)에게는 약혼자가 있었으니 이 ‘금지’가 오히려 두 남녀를 더 강력하게 묶었고 둘의 차이를 잊게 만들었다. 그들이 무사히 육지에 착륙해 도망이라도 쳤다면 그들은 이내 이런저런 차이를 절감하고 권태와 환멸과 싸워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둘 중 하나가 죽었기 때문에, 잭과 로즈는, 트리스탄과 이졸데 그리고 로미오와 줄리엣의 뒤를 이어 사랑의 만신전에 오를 수 있었다. 서사의 논리대로라면 잭과 로즈의 영원한 사랑을 위해 타이타닉은 침몰해야만 했다. (그런 의미에서 <타이타닉>의 속편은 이미 나와 있다고 해야 한다. 두 주연배우가 십년 만에 함께 찍은 <레볼루셔너리 로드>(2008)는 결혼 생활의 권태와 환멸이 어떻게 낭만적 사랑을 파괴하는지를 거의 자연주의적으로 보여준다. 잭과 로즈의 ‘십년 후’를 상상하는 노고를 덜어주는 영화다.)
수없이 많은 사례 중에 왜 하필 <타이타닉>인가. 많은 관객에게 그러했겠지만 <늑대소년>은 <타이타닉>을 떠올리게 한다. 노년의 순이가 47년 만에 옛집으로 돌아가는 도입부와 노년의 로즈가 70년 만에 인양된 타이타닉에 오르는 도입부는 많이 닮았다. 즉 두 영화의 (흔히 ‘액자소설’이라고 할 때의 그) 액자가 거의 동일하다는 얘기다. 액자 내부의 이야기도 근본적으로는 유사하다. 낭만적 사랑 서사의 공통 문법을 거의 그대로 따르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로즈에게 약혼자가 있었듯이 순이에게도 자신을 약혼자라고 믿는 지태가 있고 이들은 악당의 역할을 떠맡아 본의 아니게 운명적 사랑의 조력자가 된다. 또 잭과 로즈의 영원한 사랑을 위해 잭이 죽어야 했듯이 철수와 순이의 영원한 사랑을 위해 철수는 버려져야 했다. <타이타닉>과는 달리 <늑대소년>에서는 남녀의 관습적인 성역할이 전도돼 있다는 차이점을 지적해보는 것도 흥미로울 수 있겠지만(전자에서는 잭이 로즈를 모델로 그림을 그리고, 후자에서는 순이가 철수에게 글쓰기와 말하기를 가르친다) 이 차이는 거대한 공통점을 무너뜨릴 정도로 강력하지는 않다.
이 영화가 철수라는 캐릭터의 입체적 가능성을 상당 부분 포기하면서 얻은 것이 관습적인 낭만적 사랑의 서사라는 사실을 타박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바로 이것을 하려고 했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애초에 할 생각이 없었던 것을 하지 않았다고 비판하는 것은 무익한 일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자신이 하려고 한 것을 너무 많이 해버린 것은 아닌가. 적어도 결말부만 보자면 <늑대소년>은 <타이타닉>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낭만적이기를 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노년의 로즈를 기다리는 것은 죽은 잭이 아니라 목걸이지만, 노년의 순이를 기다리는 것은 여전히 그곳에 있는 철수다. 그는 다시 오겠다는 순이의 말을 믿고 47년을 기다렸다. 노인이 된 순이에게 철수가 “아니에요, 똑같습니다”라고 말하는 장면까지는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순이가 자신이 한평생을 부족함 없이 잘 살았노라고 자책하는 장면에서 나는 저 대사가 더이상 이어지지 않기를 바랐다. 철수가 47년을 기다린 것이 아니라 순이가 47년 동안 철수를 버린 것이다. 그러나 저 말들을 통해서 소녀는 자신의 47년을 단숨에 용서받으려 했고 결국 용서받은 것이 아닌가. 나에게 가장 바람직한 연인은 내가 죄의식을 느낄 필요가 없게 해주는 연인일까. 그렇다면 이것은 너무 과도한 판타지가 아닌가.
한 사람이 더 있었네 - 악의 서사
아직 한 사람이 남았다. 그리고 그는 이 영화에서 앞의 두 사람보다 결코 덜 중요하지 않다. 언젠가 이 지면에서 나는 서사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등장인물을 기능적으로 소비해버리는 이야기들에 대해 불만을 제기한 적이 있다. 이 영화에서는 지태가 바로 그런 캐릭터가 되고 말았다는 아쉬움을 표명하려고 한다. 순이의 입장에서 보자면 지태는 무려 세겹의 악당이다. 원수의 아들(과거)이고 가짜 아빠(현재)이며 끔찍한 남편(미래)이다. 지태는 그 악당의 자리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다. 아니 점점 더 악당이 되어간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납득할 만한 설명이 충분히 제공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위에서 이 영화의 과도한 결말부가 아쉽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 이전인 영화 의 3분의 2지점에서부터, 더 구체적으로는 지태가 직접 철수를 죽이려고 총을 잡고는 이를 막는 순이를 마구 걷어차는 장면에서부터 나는 마음이 좀 차가워졌다. 이 영화의 규약(code)에 기꺼이 동의하면서 호의적으로 이야기를 따라왔던 터였지만, 바로 그 대목에 이르러서는, 이렇게까지 밀어붙이면 더이상 이 이야기를 따라갈 자신이 없다는 생각도 얼핏 했다.
지태라는 인물에게서 아무런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이 인물이 충분히 논리적이라고 판단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 이런 ‘악당’에 대해 무슨 논리적 설명이 필요하냐는 식의 냉소적인 관대함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일 터다. 이것은 이 영화에 대한 은밀한 모독이다. 이 영화는 그런 냉소적인 관대함의 대상이 될 만한 영화가 아니다. 가족의 일상과 서투른 연인을 그리는 이 영화의 시선은 대체로 섬세하다. 그런데 유독 지태라는 인물에 대해서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일단 그는 권력과 사랑의 악순환에 사로잡혀 있는 인물처럼 보인다. 그는 권력으로 사랑을 얻을 수는 없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학습하면서도 도무지 자신의 전략을 수정할 생각을 하지 않고 오히려 점점 더 폭력적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길로 나아간다. 그가 어쩌다가 그런 악순환에 포획됐는지, 관객이 던지는 질문을 그 자신은 왜 스스로에게 던지지 않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는 이 이야기에 악당이라는 역할이 필요하다는 이유 때문에 바로 자신이 그 악당이 되기로 결심한 것처럼 행동하다가 끝내 자기 자신에 대해 충분히 해명할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죽어버리고 만다. 그도 여하튼 순이를 사랑했던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는 어떤 후천적인 성격적 결함 때문에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던 것이 아닌가. 그래서 자신이 갖고 있는 유일한 무기인 권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닌가. 이 영화에서 말을 못하는 것은 철수이지만, 지태야말로 말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 아닌가. 좀더 과감하게 말한다면 이 영화는 철수가 괴물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 지태를 괴물로 만들어버린 것은 아닌가. 이를테면 이런 문장과 함께 지태에 대해서 좀더 깊이 생각해봐도 좋지 않았을까.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주어졌거나 어느 날 문득 자신을 덮쳐왔던 사랑들에서의 균열과 상처가 인간동물들로 하여금 사랑의 일정한 상태를 작위적 방식으로라도 도출시킬 수 있기를 염원하도록 할 때 권력에의 욕망이 발생한다.”(이종영, <사랑에서 악으로>, 새물결, 2004, 199쪽) 말하자면 그의 “균열과 상처”에 이 영화가 좀더 섬세했더라면 이 영화에 동의하기는 더 쉬워졌을 것이다.
어떤 영화의 태도가 윤리적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기준 중의 하나는 그 영화가 (선이 아니라 오히려) 악에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가에 있을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를 윤리적인 혼란에 빠뜨리는 일들은 대체로 선과 악이 서로 번지고 섞이는 불투명한 경계 지점에서 발생한다. 선과 악 사이에 만리장성을 쌓는 서사들은 선과 악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기 때문에 선한 우리는 악해질 수가 없을 것이라고 안심하게 만든다. 그러나 낭만적 사랑이라는 판타지 못지않게 이것 역시도 일종의 윤리적 판타지일 수 있다. 진정으로 윤리적인 태도는, 선의 기반이 사실상 매우 허약하다는 것을 냉정하게 직시하고 악의 본질이 보기보다 복합적이라는 사실을 겸허하게 수용하면서, ‘선의 악’과 ‘악의 선’을 섬세하게 읽어내는 태도일 것이다. 물론 이것은 악에도 다 이유가 있으니 이 세상에 이해 못할 악은 없다고 단언하면서 다 같이 윤리적 상대주의의 불지옥 속으로 뛰어들자는 얘기가 결코 아니다. 대부분의 악은 자신이 한번도 악이었던 적이 없다고 믿는 자들에 의해 행해진다. 적어도 이야기라는 장르에서만큼은 이 세상의 모든 단호한 경계들에 대해서 확신보다는 회의를 품는 것이 훨씬 더 가치있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부기1 - 조성희 감독 자신이 이 영화를 일종의 동화라고 간주한 마당에 이와 같은 문제제기들은 과도하게 진지한 것이 아니냐고 할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동화니까 눈감아줘야 한다는 식의 발상은 동화에 대한 모독이다.
부기2 - 이 글을 거의 완성할 즈음에 이 영화의 감독판이 곧 개봉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감독판에서는 “지태의 속마음을 알 수 있는 히든 스토리”가 추가된다고 한다. 이 글의 세 번째 챕터가 얼마간 무력해지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