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터/액트리스]
[윤진서] 강수연, 김혜수 선배를 만났더라면 재밌었을 텐데
2012-12-06
글 : 이영진
사진 : 백종헌
다큐멘터리 <영화판>에서 길잡이 역할 맡은 윤진서

윤진서는 여행을 좋아한다. 여행이야말로 일상을 만끽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라고 믿어왔다. 배우 생활 10년 중 절반의 시간을 해외에서 보냈을 정도다. 그랬던 그녀가 일상을 찾기 위해 일상을 탈출하는 아이러니한 여행을 당분간 끊겠다고 말한다. 한국영화 시간여행이라고 불러도 좋을 다큐멘터리 <영화판>에서 길잡이 역할을 맡은 그녀는 어쩌면 지난 한국영화의 역사를 돌이켜보면서 새삼 ‘배우 윤진서’의 이정표를 재확인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박은형 감독의 <그녀가 부른다>(2013) 촬영을 끝내고 더욱 영화가 좋아졌다고 반복해서 말하는 걸 보면 과언은 결코 아니다.

-올해는 어딜 다녀왔나.
=6개월 동안 뉴욕에 머물다 왔다. 재즈바도 다니고 공연도 보러 다니고 술도 마시고. 200시간 트레이닝 코스를 거친 뒤 요가 자격증도 땄다.

-해탈까진 아니더라도 마음이 평안해지던가.
=처음엔 명상하려고 8시간씩 앉아 있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다. 그런데 나중에는 거기에 빠져든다. 빠져나오기 싫은 거다. 실제로 빠져나오지 않은 사람들도 많다. 연기와도 비슷하다. 자기 안의 하나를 파고드는 거니까.

-<영화판>에서도 여행자라고 소개된다. ‘한국영화 시간여행’에 어떻게 참여하게 됐나.
=전에 매니저였던 (박)성혜 언니가 불러서 나갔는데 허철, 정지영 감독님이 계셨다. 다큐멘터리 찍는 데 3일 정도 도와달라고 해서 그러자고 했는데, 한달이 돼도 안 끝나고 두달이 돼도 안 끝나고. (웃음)

-여행할 때 누구와 동행하느냐가 중요하다. 정지영 감독님은 파트너로서 어땠나.
=내 입장에선 2000년대 이야기가 재밌는데, 그 시기까지 올라오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정 감독님은 옛날이야기 나오면 정말 좋아하신다. 감독님 너무 졸려요, 이러다 자겠어요, 그러기도 했다. 김수용 감독님, 정일성 촬영감독님 등 비슷한 연배의 원로감독님들을 네다섯분 정도 만났는데, 아무리 재밌다고 해도 같은 이야기를 몇번씩 들으면 질리지 않나. 또 듣고, 또 듣고, 또 듣고. (웃음)

-객관적인 화자라고 말하긴 어렵다. 여행자로 뽑힌 두 사람 모두 ‘영화판’에 몸담고 있는 이들이다.
=촬영하다 인터뷰어로만 쓸 거면 왜 저를 쓰신 거냐고, 더이상 못 찍겠다고 한 적도 있다. 그랬더니 정 감독님이 그러셨다. 너 인터뷰어로 쓴 거 맞다고. 정 감독님이 친절하게 설명해주실 성격은 아니다. (웃음) 게다가 허철 감독님은 설명해줄 수 있는데도 안 하셨다. 우리가 싸우는 것을 보고 싶었을 테니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버전에는 정 감독님이랑 나랑 차를 타고 가는데 둘 다 한마디도 안 하고 있는 롱테이크 장면이 있다. 속마음을 더 드러내서 더 세게 충돌했으면 개봉 버전에 정 감독님과의 갈등장면이 들어갔을 거다.

-두 사람이 함께 진행한 인터뷰도 있고, 따로 진행한 인터뷰도 있다. 단순히 스케줄 문제였나.
=시간이 맞지 않아 그렇게 됐다. 그런데 여배우들 인터뷰하러 가실 때는 두 감독님이 어떤 언질도 주지 않으셨다. 강수연, 김혜수 선배님을 만났더라면 재밌었을 텐데. 선배님들은 지금까지 어떻게 버텨오셨는지 정말 궁금하다.

-어떤 힘으로 버텼을지 짐작이 가나.
=애착인 것 같다. 영화와 영화인들에게. 좋든 싫든 애착이 있다. 그게 연민과 비슷한 감정일 수도 있고. 영화를 보고 나니 그게 느껴지더라. 등 돌릴 수 없는 거지.

-<영화판>에는 배우, 감독, 제작자, 평론가 등 다양한 영화인들이 셀 수 없이 많이 나온다. 직업군으로 놓고 치면 가장 힘든 인터뷰는 언제였나.
=제작자 어른들은 좀 무서웠다. 그래서 인터뷰에서 빼주시면 안되냐고 하기도 했다. (웃음) 그런데 막상 뵙고 나서 생각이 달라졌다. 이춘연 씨네2000 대표님은 다음에 보면 안아드리고 싶을 정도로 무척 좋으셨다.

-강우석 감독과의 인터뷰는 어땠나.
=시네마서비스의 성장과 붕괴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자리였는데 “너, 질문 좀 제대로 할 수 없어?”라고 화를 내셨다. (웃음) 눈물이 핑 돌았다. 속으론 ‘나도 이런 질문하기 싫어요’ 그랬다. 옆에서 허철 감독님은 웃으면서 괜찮아, 신경쓰지 마, 그러시고. 여자 감독님들 모셔놓고 여성 영화인으로서 살아가는 고충에 대해 묻는 것도 힘들었다. 무례하고 불쾌한 질문일 수 있으니까. 그럼에도 들어야 한다면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만들어야 하는데. 그럴 만한 능력은 안되고. 중간에 변영주 감독님이 “너, 인터뷰 정말 못한다”고 하셨다. 내가 나를 좀더 풀어놨다면 좀더 재미난 자리들이 만들어졌을 것 같다.

-두분 모두 독설을 즐기시는 분들이다. (웃음) 가장 편안한 분위기의 인터뷰는 이창동 감독과의 만남인 것 같더라. 농담도 던지고.
=어떻게 내가 그때 그런 말을 했지 싶다. 스스럼없는 분위기라 그랬던 것 같다. 대화라는 게 사람이 많으면 겉돌 수밖에 없다. 일대일이면 어색한 침묵이 돌고. 셋 정도가 적당한데, 그날이 딱 그랬다.

-지난 10년 동안 영화판에서 들었던 이야기 중 기억에 남는 몇 가지를 꼽는다면.
=데뷔했을 때 얼굴이 콤플렉스였다. 스무살 무렵엔 예쁜 사람들이 배우가 되고 유명해지는 걸 보면서 난 안 예뻐서 그런가 싶었다. 동경해 마지않던 배우가 될 거라고 기대했는데, 현실은 그게 아니니까. 그렇게 되지 못한 이유를 얼굴에서 찾으려고 했던 것 같다. 실은 그게 아니잖나. 그때 한 감독님이 예뻐서 배우가 되는 게 아니라고 하시더라. 몇년 지나고 나서는 ‘살아남으라’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어쨌거나 살아남아야 널 쓸 수 있다고. 최근에는 음. 넌 배우니까 문신하면 안된다고, 네 몸은 네 것이 아니라고, 배우는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고 한 선배님이 말씀하셨다. 그 자리에선 왜 안돼요, 문신한 배우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랬지만 선배님들이 해주신 조언들의 의미를 가끔 곱씹곤 한다.

-촬영 때는 거의 민낯이더라.
=원래 돌아다닐 때도 화장을 잘 안 한다. 그런데 안성기, 박중훈 선배님 인터뷰 때 딱 한번은 그래도 예쁘게 하고 가야겠다 싶어서 미용실 예약까지 해놨다. 그런데 아침에 매니저가 늦잠을 자는 바람에 결국 못 가고, 인터뷰 장소에도 택시 타고 갔다. 약속시간에 늦어 너무 죄송하다고 했더니 두분 모두 괜찮다면서 나중에 매니저 혼내지 말라고 하시더라. 두분의 넉넉한 태도가 기억에 오래 남는다.

-하고 싶은 영화를 하기 위해선 ‘미친년’처럼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내레이션이 있다. 그러지 못했다는 아쉬움인가. 아니면 그렇게 살아서 손해봤다는 후회인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았다. 남들 시선 신경쓰지 않고. 그런데 정말 하고 싶은 대로 살았나 자문하면 고개를 끄덕끄덕하진 못할 것 같다. 아마 계속 이러면서 사는 게 아닐까.

-10년 전 인터뷰를 보니, 주변의 영화인들이 고집이 무척 세다고 했다. 이젠 고집이 좀 꺾인 건가.
=고집을 어떻게 꺾나. 고집은 일종의 이상이다. 이상을 꺾고 살 순 없다. 이상은 추구해야 하는 것 아닌가. 외려 고집을 잘 살려서 나 자신한테 맞는 길을 찾아야 하는 것 같다.

-영화처럼 살고 싶은 건가? 비현실적으로.
=비현실적이라는 게 뭔가.

-계산을 잘 못한다는 거.
=지금은 더 못한다. 그러고 싶지도 않다. 이 일 하면서 그 욕심을 지키려면 다른 욕심을 버려야 하더라. 돈 욕심. 돈 욕심이 생겨야 현실감각도 생기잖나. 비현실적이라는 말이 나쁜 말이 아니다. 그게 있어야 자기가 만들어놓은 세계에서 살 수 있다. 그런 세계를 갖고 있는 배우들이 좋다. 다른 세계를 보여주니까. 영화를 왜 보나. 다른 세계를 보고 싶으니까 본다. 영화는 다른 세계로 나를 초대했다가 다시 현실에 놓아주는 일종의 여행이다. 대학생들에게 스펙을 갖추라고 하는 것과 배우들에게 이미지 관리하고 구축하라는 것과 뭐가 다른가. 배우까지 정형화된 삶을 산다면, 누가 다양한 삶을 살 수 있을까.

-올해를 돌아보면 어떤가. 자살 해프닝도 겪었는데.
=일단 경제적으로는 마이너스, 심적으로는 플러스다. 그 해프닝은 기사가 나오고 나서 3일 뒤에 알았다. 그때가 뉴욕 가기 직전이었는데, 매니저가 망설이다가 말해주더라. 비행기표나 바꿔달라고 했다. 뉴욕필름페스티벌 갔다가 곧바로 요가 시험을 봐야 해서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촬영을 끝낸 <그녀가 부른다>의 진경은 어떤 인물인가.
=혼자 살고 싶어 시골에 내려가 극장 매표소에서 일하는 여자다. 그런데 주변에서 벌어지는 사건들 때문에 조용하게 살지 못한다. 그러다 정말 혼자가 되는 상황에 처하고, 결국 누군가와 같이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이번 작품을 끝내고 나서 내가 대견스러웠다.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영화 찍는 게 전보다 훨씬 더 좋아졌다. 동시에 이제까지 참여했던 작품들을 돌아보게 됐다. 하고 싶지 않았던 작품들은 대충한 게 여실히 드러난다. 하기 싫으면 누가 등 떠밀어도 절대 하면 안되는구나 깨달았다.

-내년엔 어디로 여행갈 계획인가.
=여행 안 가는 게 목표다. 어차피 내가 살아야 할 곳은 여기 아닌가. 이곳에서 일상의 재미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에 영화 보고 음악 듣고 요가하는 내 라이프 스타일에 맞는 집을 하나 지었다. 몸에 맞는 집이 있으니 내년엔 여행 안 가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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