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두진의 architecture+]
[architecture+] 궁극적인 동네 이야기
2012-12-28
글 : 황두진 (건축가)
<러브 액츄얼리>의 런던

몇년간 영화와 관련된 글을 써왔다. 영화비평을 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 그건 영화 분야 전문가들의 몫이다. 더구나 나 자신도 분야는 다르지만 창작을 하는 입장에서 비평을 할 이유가 없다. 다만 직업적인 이유로 영화 속에 등장하는 건축물이나 장소에 대해서 조금 더 유심히 살펴보고 그들이 영화와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 내용을 이야기하듯 풀어 써온 것뿐이다.

그러나 나의 글쓰기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영화인들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게다가 나 스스로도 남의 분야를 기웃거린 지 좀 오래되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글이 내가 영화와 관련해서 쓰는 마지막 글이고, 그래서 이 순간을 위해 아껴둔 어떤 영화 이야기를 하려 한다. 그것은 <러브 액츄얼리>다.

나에게 이 영화는 궁극적인 동네 이야기로 다가온다. ‘동네’라는 말은 ‘골짜기’라는 의미의 한자인 ‘동’(洞)자에 우리말인 ‘네’가 붙은 것이다. 산꼭대기에도 마을이 있는 서구와 달리 3부 능선 위로는 집을 잘 짓지 않았던 한반도에서 결국 마을이란 골짜기에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 골짜기의 한자어인 ‘동’(洞)이 ‘같은(同) 물(水)’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재미있다. 결국 동네란 같은 골짜기에 살면서 서로 물을 나눠 마시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셈이다.

<러브 액츄얼리>의 주인공들은 물론 골짜기를 별로 찾아볼 수 없는 평평한 도시 런던에 산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물에 해당하는 공통분모가 있는데 그것은 영화의 제목에도 등장하는 ‘사랑’이다. 이 영화에는 수많은 종류의 사랑이 등장한다. 그중 대부분은 남녀간의 사랑이지만 그 양상과 방식은 하나도 같은 것이 없다. 사랑할 때는 모두 상상력이 풍부해져서인지 이 세상에 같은 사랑은 하나도 없는 듯하다. 그 사랑은 등장인물들 사이를 흐르면서 그들을 서로 이어주고 갖가지 풍경을 만들어낸다. 마치 물처럼.

동시에 이 영화는 수많은 장소를 배경으로 한다. 그런데 그 장소와 거기에서 전개되는 사랑간에는 너무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어딜 가나 건물 유형이 비슷비슷한 파리나 베를린에 비해 런던은 각 지역의 다양성이 훨씬 풍부하다. ‘동네의 집합’이라고나 할 만한 런던의 도시적 특징을 그와 결부된 사랑 이야기로 풀어낸 것이 이 영화 최대의 매력이다. 아마 런던 사람들은 이 영화를 보면서 우리가 잘 모르는 수많은 다른 코드들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누구나 이 영화를 보면 런던에 가고 싶어진다. 영화와 도시가 함께 만들어내는 최선의 결과, 그것을 <러브 액츄얼리>에서 본다.

런던 못지않게 다양한 동네들로 구성된 우리의 도시들도 얼마든지 좋은 영화의 배경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이 연재를 시작했다. 이제 끝을 맺게 되었고, 마침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이 이 영화 속의 계절이기도 하다. 여러분,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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