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임파서블>은 2004년 타이를 휩쓸었던 쓰나미 속에서 살아남은 한 가족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끔찍했던 기억으로부터 무려 9년이 지났으니 ‘왜 굳이 이제 와서’라는 질문이 나올 법도 하다. 이 엄청난 자연재해는 당시만 해도 다소 생경했지만 우리는 2004년 이후에 더 크고 무서운 규모의 쓰나미를 수차례 목격했고 어느새 쓰나미는 전세계적으로 익숙한 단어가 되었다. 게다가 그간 쓰나미를 소재로 했던 영화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더 임파서블>은 종래 다른 쓰나미 소재의 영화들이 도달하지 못한 곳에서 다시금 그날의 기억 한가운데로 우리를 데려간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왜’가 궁금했지만 보고 난 뒤엔 ‘어떻게’를 묻고 싶어지는 영화, <더 임파서블>의 특별함을 살펴보자.
지진해일을 일컫는 쓰나미(tsunami)는 1896년 일본 산리쿠 연안에서 2만여명의 목숨을 앗아갔던 사실이 알려지며 세계 공용어가 된 단어다. 그러나 이 말이 우리 귀에 자주 들려온 건 아마도 2004년 인도양을 덮쳤던 쓰나미 이후일 것이다. 2004년의 인도네시아 쓰나미는 대개 해일이 할퀴고 간 자리의 풍경 내지 생존자들의 증언으로 기억된다. <더 임파서블>은 그 폐허의 풍경과 기억으로부터 출발하는 영화다.
재난영화라고 단정짓지 말라
사실 <더 임파서블>은 재난영화라 부르기엔 모호한 구석이 있다. 엄격한 장르 구분이 아닌 다음에야 재난영화의 범주는 다분히 자의적이지만, 분명한 것은 <더 임파서블>이 할리우드식 블록버스터 재난영화의 형식에서 한참 벗어나 있다는 사실이다. 후안 안토니오 바요나 감독이 이미 수차례 언급했지만 이 영화는 재난영화라기보다는 차라리 재난을 당한 한 가족에 얽힌 체험기에 가깝다. 할리우드 재난영화가 으레 펼쳐놓는 다양한 인간 군상과 그 속에서 공통적으로 피어나는 인간애, 그리고 차례로 닥쳐오는 위기 극복의 드라마 같은 건 여기 없다. 영화는 자연재앙의 거대함을 전시하지도, 드라마를 쥐어짜내지도 않는다. <더 임파서블>이 다루고 있는 것은 재난 그 자체의 스펙터클이나 재난을 헤쳐나간 사연이 아니라 재난 이후의 풍경, 그리고 한 가족의 사연이다. 바요나 감독은 풍문과 뉴스화면으로 간간이 접할 수 있었던 그 막막한 풍경, 쓰레기장이 되어버린 2004년의 타이의 해변에 우리를 데려다놓고 철저히 개인 또는 한 가족의 사연에 집중한다.
재난영화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사랑을 받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극한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고양되는(대부분의 경우 위기 극복 내지는 인간애로 귀결되곤 하는) 드라마적 매력이 첫 번째고, 영화가 재현할 수 있는 극한 상황에의 대리체험이 주는 리얼리티가 두 번째다. 그리고 마지막 결정적인 요인으로 거대한 규모의 자연재해만이 보여줄 수 있는 스펙터클의 전시가 있다. 재난영화가 필연적으로 인물과 풍경을 펼쳐놓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대개의 재난영화는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등장시키고 재난상황을 웅장하게 펼치는 망원의 시점을 취한다. 드라마와 스펙터클, 그리고 리얼리티를 고르게 펼칠 수 있는 재난상황은 상업블록버스터에 적합한 소재임이 분명하다. 문제는 그것이 실화를 바탕으로 할 때 발생한다. 기본적으로 상업블록버스터의 목적은 쾌감에 있다. 드라마적인 카타르시스건, 스펙터클의 웅장함이건, 관객은 영화 속 이야기를 대상화한다. 그러나 실화를 바탕으로 했을 때는 과연 그러한 시선이 정당한지에 대한 윤리적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더 임파서블> 역시 알바레스-벨론 가족의 실화에 기초하는 순간 윤리적 질문을 피해갈 수 없다. 더구나 수많은 피해자 중 누구를 대상화하는 게 정당한 것인지에 대한 거부감이 발생할 수도 있다. 타이에 수많은 난민과 상처가 남아 있음에도 그들은 조연이 되고 백인 가족의 뒷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만으로도 보기에 따라선 불편하게 비칠 소지가 다분하다. 바요나 감독 역시 이를 충분히 알고 있는 듯 불편함을 야기할 수 있을 요소들을 두 가지 방식으로 영리하게 피해간다. 하나는 펼쳐놓는 대신 한 가족의 사연으로 철저히 좁혀 들어간 이야기, 또 하나는 거대한 쓰나미가 주는 시각적 쾌감에 집중하는 대신 그 뒤에 펼쳐질 고단함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이다. <더 임파서블>은 재난의 거대함을 활용하지 않고 재난 이후를 체험하게 하는 쪽을 선택한다. 물론 여기에는 여러 가지 부수적인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오해할 수도 있지만 이 영화는 할리우드가 아니라 상대적으로 예산 여유가 적은 스페인영화다. 마냥 보여주고 펼쳐놓기엔 제작비의 문제도 걸렸을 테고, 쓰나미를 시각적 쾌락으로 활용하자니 곤란한 요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건 어떻게 재난상황을 대리체험하게 할 것인가에 대한 방향의 문제다. <더 임파서블>은 여기서 ‘쓰나미로 인해 뿔뿔이 헤어진 가족의 사연’이라는 안전하고 영리한 선택을 한다.
육체 안에 옮겨 담은 쓰나미의 고통
<더 임파서블>의 이야기는 짧고 간단하다. 쓰나미로 가족이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는 것이 전부다. 이 단순한 서사를 소소한 사건도, 끊임없는 위기도, 압도적인 화면도 없이 이어가기 위해서는 특별한 연출이 필요하다. 바요나 감독이 취한 전략은 그 과정을 개인의 체험으로 국한한 뒤 매우 느리고 고통스럽게 전개시키는 것이다. 감독은 여기서 전작 <오퍼나지: 비밀의 계단>을 통해 쌓은 자신의 장기를 십분 발휘한다. 형식적인 특징으로 볼 때 <더 임파서블>은 재난영화라기보다는 호러영화에 가깝다. 오프닝의 비행기 출발장면에서 시종일관 전개되는 불안한 사운드는 앞으로 일어날 사건의 전조처럼 펼쳐지지만 이는 사실 서사적으로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럼에도 영화는 굳이 타이로 들어가는 베넷 가족의 출발을 신경 거슬리는 사운드로 불안하게 뒤흔들어놓는다. 오프닝을 지배하는 불안의 정서는 사건의 인과가 아닌 그저 정서의 덩어리이며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같은 불안 위에 고통을 뒤섞어 늘어놓는다. 그것으로 피해자들을 대상화시킬 수 있다는 윤리적 논란에서 비껴감은 물론 이 영화가 관객에게 주고자 하는 대리체험의 효과 또한 완성된다.
<더 임파서블>은 현미경의 영화다. 13t의 물을 직접 쏟아부어 만들었다는 쓰나미 장면은 일견 압도적이지만 카메라는 이를 충분히 만족스러울 만큼 펼쳐놓진 않는다. 재난영화치고 이 영화 속의 익스트림 롱숏이 얼마나 적은지만 봐도 이를 알 수 있다. 대신 주로 물에 휩쓸려가는 마리아(나오미 왓츠)와 루카스(톰 홀랜드)의 육체에 집중하는 카메라는 영화 속 가장 스펙터클한 순간에도 좁고 깊게 인물을 추적한다. 짧고 굵은 쓰나미가 지나가고 난 뒤에도 카메라는 여전히 아들 루카스에 기대 걸어가는 마리아의 상처를 끈질기게 잡는다. 걷고, 나무에 오르고, 기진맥진해 쓰러지는 단순한 사건 내내 카메라가 주목하는 것은 그녀의 고통스런 얼굴과 피가 철철 흐르는 다리, 찢겨 떨어진 살점이다. 영화는 그렇게 주인공들의 육체적 또는 정신적 고통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데 집중하고 러닝타임 내내 계속되는 이들의 고통은 쓰나미의 상처와 고통을 대변한다. 익스트림 롱숏으로 폐허가 된 풍경을 계속 보여주는 대신 클로즈업으로 그 폐허를 뚫고 지나가야 하는 상처 입은 육체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것은 끔찍함에 관한 일종의 대리체험이다. 관객은 마리아가 겪는 육체적 고통, 아빠와 동생들이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는 루카스의 불안, 장인에게 전화를 걸며 울음을 터트리는 헨리(이완 맥그리거)의 정신적 고통을 끊임없이 마주쳐야 한다. 그리고 이 불안과 고통의 정서는 호러영화가 불안감을 증폭, 축적시키는 방식으로 계속 반복된다. 그야말로 쓰나미 뒤에 남겨진 자들의 체험에 관한 수기다.
<더 임파서블>은 바랫 낼러리 감독의 <쓰나미>(2006)와 같이 쓰나미를 소재로 한 영화들이나 <해운대>(2009), <2012>(2009) 같은 기타 재난영화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지 않다. 굳이 유사한 영화를 찾자면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휩쓸고 지나간 뉴올리언스의 상황을 그린 다큐멘터리 <트러블 더 워터>(2008)가 떠오른다. 카트리나를 겪은 사람들의 실상과 표정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것이 목적인 다큐멘터리에서 발견되는 투박하지만 막강한 현장감의 위력이 <더 임파서블>에도 잠재되어 있다. 앞뒤로 공포영화의 전조가 깔리고 각 인물의 성장담을 배치해 좀더 극적인 효과가 두드러지긴 하지만 재난이라는 불가항력의 실화를 대하는 윤리적인 태도에 있어서는 유사하다. 사적 사연의 관찰이 공적인 문제의식으로 확장되는 방식. 물론 <더 임파서블>은 여기에 사회적 문제의식 대신 다른 요소를 집어넣는다. 다름 아닌 성장담이다.
‘재난을 소재로 한 영화’의 새 모델
<더 임파서블>은 크게 세 인물을 축으로 전개되며 이야기도 세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몸에 상처를 입고 생사를 헤매는 엄마 마리아의 사연, 또 하나는 엄마와 자신밖에 남지 않았다는 공포 속에서 엄마를 돌봐야 한다는 책임감과 공포에 짓눌린 소년 루카스, 마지막으로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를 아내와 큰아들을 찾아야 하는 아빠 헨리의 이야기다. 세 이야기, 혹은 세 가지의 미묘하게 다른 불안과 고통은 겹치거나 꼬이는 일 없이 결말의 순간까지 온전히 혼자 감당해야 하는 체험이다. 그리고 고통의 끝에는 당연히 성장(혹은 변화)이 따른다.
마리아의 사연은 직접적인 육체의 고통이다. 가족 중 유일하게 큰 부상을 입은 마리아는 보호하는 모성이 아닌 보호 받아야 하는 연약한 존재로 바뀐다. 그녀의 고통은 죽음과 맞닿아 있지만 그보다 본질적으로는 재난의 한가운데에서 가족을 돌볼 수 없는 무력감으로 드러난다. 처음에는 루카스의 도움을 거부하던 그녀가 루카스에게 도움의 손길을 요청할 때 필요했을 용기, 그리고 죽음에의 공포가 그녀를 둘러싼 정서의 핵심이다. 병원에 도착한 그녀가 루카스에게 도움이 필요한 다른 이를 도와주라며 권유하는 것은 도움받아 본 자만이 권할 수 있는 절실함과 용기의 발현이다. 한편 육체적으로 죽음의 문턱에 있는 그녀가 의식을 잃은 사이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팔뚝에 실수로 적힌 다른 이의 이름으로 지내는 것은 수많은 익명의 죽음을 대변한다.
루카스의 사연은 사춘기 소년의 성장담이다. 상처 입은 엄마의 육체, 죽음에 다다른 이들의 모습을 보며 어쩔 줄 몰라 했던 소년은 종국엔 다른 이를 도와주며 현실을 직시하는 법을 익힌다. 영화 후반 루카스가 잠시 엄마와 헤어지고 난 뒤 소년보호소에서 붙이는 이름표는 한 사람 몫의 사람이 되었다는 증명이기도 하다. <더 임파서블>이 전반적으로 잡아내는 루카스의 정서는 고통스런 상황 속에 덩그러니 떨어진 소년의 혼란이지만, 결국 고통은 소년을 변화시킨다. 이는 시종일관 황폐한 풍경과 피폐한 육체를 조명하는 이 영화가 종국엔 훈훈한 드라마로 수렴되는 통로이기도 하다. 덕분에 영화 속 가장 드라마틱한 순간도 루카스에게 돌아간다.
마지막으로 잃어버린 아내와 아들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아빠 헨리의 사연은 그야말로 전형적인 재난영화의 구조를 띤다. 불안에 휩싸인 남자의 격한 감정을 보여주는 한편 같은 처지의 다른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연대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물론 이 영화는 성장담을 강변하거나 강조하지는 않는다. 그저 재난 속에 흩어진 각각의 체험이 좀더 넓은 의미로 확장될 수 있는 지점에 슬며시 성장담을 얹어놓았을 따름이다. 그러나 잘 만든 다큐멘터리가 고도의 현장성을 바탕으로 사회적 의미로 확장될 수 있는 것처럼 이 영리한 재난영화, 아니 가족 이야기는 쓰나미 한가운데로 관객을 밀어넣고 관객에게 그 끔찍함을 체험케 한 뒤 연대와 성장의 가능성으로 깔끔하게 마무리한다. 식상한 재난영화의 틀을 따르지 않고 자신이 잘 만들 수 있는 장르를 경유한 것도 훌륭하거니와, 다큐멘터리적 윤리성을 통해 문제될 수 있는 지점(실화를 극화했다는 점이나 오리엔탈리즘적인 시선으로 오인될 수 있는 한계)을 피해간 점도 인상적이다. 거기에 더해 상대적으로 적은 예산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얻어냄으로써 재난영화가 아니라 ‘재난을 소재로 한 영화’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 쓰나미라는 재앙의 고통이 이렇듯 생생한데 9년이란 시간이 무슨 대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