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포도 감수성도 동결될 것 같은 독한 겨울. 액화 니트로겐으로 냉동한 꽃을 네덜란드 정물화 관습대로 배치한 다음 폭파의 순간을 초고속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오리 거쉬트의 <Blow Up: Untitled4>를 보며, 꽃들의 파편에 찔려 더운 피를 확인하는 몽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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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세 할스트롬 감독에 의해 영화화된 적 있는 존 어빙의 장편소설 <사이더 하우스>의 첫 장을 지배하는 주제는 “고아에게는 쓸모가 매우 중요하다”로 요약된다. 미국 메인주 세인트 클라우즈 고아원에서 태어난 소년 호머 웰즈는 몇 차례 파양 끝에 스스로가 매우 쓸모있는 존재임을 확인할 수 있는 세인트 클라우즈를 집으로 선택한다. 그리고 고아원을 운영하는 괴짜 의사 윌버 라치는 소년의 의지를 받아들인다. (닥터 라치가 이 소년에게 기울이는 무뚝뚝한 애정의 강도는 웬만한 러브 스토리를 무색하게 한다.) 20쪽에 이르러 존 어빙은 주인공 호머를 가리켜 “그는 ‘쓸모’ 빼면 시체였다”고 기술하는데, 이후 1천쪽에 걸쳐 드러나는 호머 웰즈라는 인간이 지닌 아름다움- 결함을 포함한- 이, 이 간명한 문장으로부터 줄줄이 풀려나온다는 점을 상기하면 밑줄을 그어 아깝지 않은 한줄이다.
다카하다 이사오 감독의 TV애니메이션을 극장판으로 편집한 <빨간머리 앤: 그린게이블로 가는 길>을 보며 <사이더 하우스>를 다시 읽고 싶었던 것은, 열한살의 앤이 매튜와 매릴라 남매의 초록지붕 집의 식구로 받아들여지기까지 동화치고는 상당히 냉정한 ‘쓸모론’이 거듭 언급돼서였다. 노년의 오누이는 당초 농장을 돌볼 노동력이 부족해 입양을 결심한다. 실수로 사내아이 대신 고아원에서 보낸 희망에 부푼 소녀를, 매튜가 차마 되돌려보내지 못하고 집으로 데려오지만 난센스를 허락지 않는 매릴라는 “우리에겐 여자애가 도움이 안돼요”라는 한마디로 일축한다. 재미있는 아이 아니냐는 매튜의 옹호에도 매릴라는 “우리에게 필요한 건 재미가 아니”라며 요지부동이다. 고아원에 돌아갈 위기에 처한 앤에게 애보기 일손이 필요한 이웃의 블루엣 부인이 눈독을 들인다. 갓 열살이 넘은 여자애가 보고 있는 앞에서 어른들이 일꾼으로서 가치를 저울질하는 장면은 요즘 문화로 보면 가혹해 보이기까지 한다. 블루엣의 인품에 회의적인 매릴라는 일단 앤을 초록지붕 집으로 데려오지만, 블루엣 부인이 소녀를 훨씬 더 필요로 한다면 그 집에 가는 편이 낫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흥미로운 점은, 결국에 매튜와 매릴라가 앤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는 논리 역시 ‘쓸모론’이라는 사실이다. 매튜는 “이 아이가 우리에게 도움이 안될지 몰라도 우리가 이 아이에게 도움이 될 수 있잖아”라고 말함으로써 실용주의와 이기적 태도의 차이를 분명히 한다. 나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든 쓸모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거다. 한편 독실한 매릴라는 “이 세상은 고통을 나눠 짊어지고 가야 하는데, 지금껏 편하게 살아온 내게 드디어 차례가 왔나봐요”라며 종교인으로서 소명을 다할 기회로서 앤의 등장이 그녀의 삶에 주는 유용성을 긍정한다. 참으로 일관된 남매다. 이쯤에서 다시 <사이더 하우스>의 한 구절. “약속이 지켜진다면 모든 아이가 약속을 이해하고 다음 약속을 즐겁게 기다리게 된다.”
걸핏하면 배경에 분홍 꽃잎 흩날리는 순정 넘치는 화면 탓에 간과하기 쉽지만, 다카하다 이사오 감독의 연출도, 엄격하고 공명정대한 매릴라 아주머니와 품성과 똑 닮았다. 예컨대 스스로 처량해진 앤이 마차에서 내려 들판에 앉아 서러워할 때 매릴라는 다가가서 달래려는 충동을 억누르고 말고삐를 잡은 채 소녀가 마음을 추스르길 기다리는 신에서 감독은 이 시간을 고스란히 살린다. 그런가 하면, 거취가 정해지는 날 오전을 아주머니 말씀대로 애써 침착하게 보낸 앤이 참다못해 답을 애원하자 매릴라는 뜨거운 물에 행주부터 빨라고 지시한다. 다카하다 이사오 감독은 놀랍게도 앤이 행주를 다시 빨아 물기를 짜서 널고 다시 아주머니 앞에 앉기까지를 관객이 함께 견디도록 연출한다. 수십년 전 TV애니메이션 시리즈의 찬찬한 리듬이 스크린에 옮겨지면서 요즘 극장판 애니메이션에서 찾아보기 힘든 영화적 심호흡을 복구한 사례다. 마지막으로 어릴 적 TV를 볼 땐 미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멋진 대사. 매튜와 매릴라는 앤을 슬하에 들이겠노라 알릴 때 “넌 이제 우리 딸이야” 대신 “넌 이제 초록지붕 집의 앤이야”라고 말한다. 후자가 소녀에게도 백배 든든했을 거다. 끝내 의지할 수 있는 가치는 쓸모와 일관성- 망망대해 같은 세계 속에 내 자리를 못질해줄 주소지- 이라는, 대개의 인간이 서른 즈음에야 겨우 깨닫는 사실을 처음부터 집이 없었던 앤과 호머는 알고 있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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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급사 시사실의 작은 스크린으로만 관람했던 <라이프 오브 파이>를 비로소 온전한 사이즈와 효과로 구현된 3D로 극장에서 확인하고, 파이가 휘두른 구명보트 노에 뒤통수를 맞은 강도로 충격을 받았다. 상영 포맷이 한 영화에 대한 이해와 평가를 통째로 흔들어놓은 첫 경험이라고 해도 좋다. 적어도 내겐 <라이프 오브 파이>의 3D가 내용과 합일해 불가분의 상태에 이르렀다는 얘기일 것이다. 이야기와 조응하는 형식은 <아바타>도 마찬가지였지만, 제임스 카메론의 성취는 쇼케이스에 가까웠다. 신기술의 쓰임새를 가장 잘 설파할 수 있도록 거꾸로 맞춤 고안된 서사로 보였다는 소리다. 리안 감독의 3D는 놀라움보다 정서에 봉사한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내가 눈물 흘린 첫 번째 3D영화다(<토이 스토리3>는 치지 말자. 그 영화의 감흥은 맹세코 3D와 무관했다). 역설적으로 <라이프 오브 파이>는 가장 2D 같은 3D영화였다. 콧등에 성가신 3D 안경이 얹혀 있다는 사실을 러닝타임의 대부분 망각했다. CG인지 알아채지 못하게 구사한 CG가 가장 우수한 CG라는 해묵은 정설을 3D에 대해서도 꺼낼 수 있는 단계가 온 걸까. 하지만 <라이프 오브 파이>가 3D 영화의 게임 규칙을 바꿔놓았다고, 3D 미학의 진화를 재촉할 거라고 흥분하긴 주저된다. <라이프 오브 파이>의 성취는 여전히 얀 마텔 소설의 특정한 주제, 리안이라는 작가가 세계를 보는 방식과 단단히 얽혀 있기 때문이다. 단, 3D에 접근하는 영화인들의 태도와 상상력에 숨통을 틔워줄 거라는 예상은 충분히 가능하다.
그럼 <라이프 오브 파이>는 구체적으로 3D를 어떻게 썼나? “시각뿐 아니라 스토리텔링에도 한 차원을 더하고자 했다”던 감독의 의도는 화면에서 어떻게 관철됐나? <라이프 오브 파이>에는 이해 불가한 숏이 하나 있다. 호랑이 리처드 파커를 맹수로 인식하지 않는 어린 파이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아버지가 아기 염소를 호랑이 먹이로 주는 장면을 보자. 창살에 묶인 가련한 염소가 보이고 어머니가 파이의 눈을 가리면 다음 컷에서 호랑이는 이미 어린 짐승을 창살 너머에서 물어뜯고 있다. 염소의 몸뚱이가 형체를 보존한 채 우리를 통과해버린 이 숏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옥에 티’처럼 보인다. 그러나 두 번째 관람부터 나는 괴상한 점프를 감행한 이 숏이 3D의 쓸모에 관한 리안 감독의 장난스런 힌트가 아닐까 상상하게 됐다. 서로의 눈을 보며 통할 수 있는 존재인 리처드 파커로부터, 내 팔뚝을 당장 씹어삼킬 수 있는 육식동물로 전신(轉身)하는 경계, 즉 스토리가 있는 세계에서 스토리가 없는 세계로 넘어가는 ‘국경’에 호랑이 우리의 창살이 버티고 있는데 리안은 그 창살의 물질성을 편집으로 홀연히 사라지게 한 셈이다. 그건 말하자면 마음의 칸막이이고 곧 <라이프 오브 파이>가 3D를 구사하는 첫 번째 방식과 통한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3D를 타고 서사적 평면을 표나게 옮겨다닌다. 현재에서 과거로 진입하고, 크리슈나 신의 입속 우주로 들어가며, 현실에서 꿈으로 다이빙한다. 또한 주관적, 객관적 시점의 디졸브와 오버랩, 스크린 프로세스 같은 케케묵은 영화의 마법을 3D에 실어 태초처럼 천진하고 진지하게 실행한다. 이는 묘하게도 제작 규모가 판이한 알랭 레네의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가 구사하는 단순하고 고풍스런 화면 분할, 디졸브, 아이리스 기법과 유사한 감흥을 자아내는데, 말하자면 하이퍼리얼한 기술에 묻혀 절명한 영화의 고졸(古拙)한 ‘마술’이 부활하는 광경을 목격하는 경이감이다. 칸칸이 나뉘었다가 밀어젖히면 새로 구획되고 때로 한데 통합되는, 동양의 미닫이 가옥처럼 <라이프 오브 파이>의 세계는 3D를 칸막이로 이용한다. 다만 전체의 부피도 자유롭게 팽창했다 수축한다는 점- 프레임 사이즈가 변하는 대목도 있다- 이 집과의 차이라 하겠다. (다음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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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그랜트의 역습
휴 그랜트는 충분히 훌륭한 배우다. 그런데 본인도 남도 그렇게 생각지 않는 경향이 있다. 식인종을 포함한 <클라우드 아틀라스>의 1인6역은 언제까지 모성애를 독촉하는 말더듬증과 쓰다듬어주고 싶은 곱슬머리로 승부할 거냐는 독설에 대한, 오래 벼른 응수처럼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