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촬영이 아니라 무슨 1인극을 보는 듯했다. 배수빈은 사진기자의 주문에 맞춰 뚝딱 광대 하선이 됐다가 금세 광해가 됐다. 턱을 아래로 쭉 당겨 호탕하게 웃을 땐 영락없는 하선이었고, 두눈에서 장난기가 싹 걷히면 영락없는 광해였다. 그는 별로 힘들이지 않고 그 모든 표정을 만들어냈다. 턱 전체를 덮은 무성한 검은 수염도 썩 잘 어울렸다. 사실 이날 배수빈은 인터뷰에 두 시간 넘게 늦었다. 인터뷰 전달 과정에서 착오가 생겼기 때문이다. 부랴부랴 스튜디오로 달려온 그는 충분히 정중하게 사과를 했다. 그는 자신이 놓쳐버린 두 시간을 어떻게든 만회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인터뷰 내내 배수빈은 집중력과 진정성으로 무장한 채 앞에 앉은 상대를 대했다. 어쩌면 배수빈이라는 사람이 원래 그런 사람일지도 모른다.
2월23일 첫선을 보이는 연극 <광해, 왕이 된 남자>(이하 <광해>)에서 배수빈은 김도현과 함께 광해/하선 역에 더블캐스팅됐다. 연극 연습 기간 동안 매일 오후 2시부터 밤 10시까지 광해와 하선으로 살아가는 배수빈은 이미 <광해>에 푹 빠져 있었다. 과연 이병헌이 보여준 카리스마를 배수빈이 보여줄 수 있을까 우려했던 마음은 그와 마주앉은 지 10분 만에 싹 사라졌다. 그는 여유로웠고, 그 여유로움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병헌 선배는 이병헌 선배이고, 저는 저니까요. 저만의 하선과 광해가 나오겠죠. 비교당하겠다 생각하면 배우가 할 작품이 어딨겠어요.” 그러니 영화 <광해>의 이병헌은 잊자. 생김새가 다르고, 목소리가 다르고, 매체가 다르고, 표현방법이 다른데 어떻게 똑같은 인물이 나올 수 있겠는가. 배수빈은 편해 보였다. 첫 공연을 보름 앞둔 사람이 맞나 싶을 만큼 초조함이나 부담감은 진즉에 털어버린 듯했다. 드라마와 영화로 필모그래피를 채워가는 틈틈이 두편의 연극 <이상, 12월12일> <다리퐁 모단걸>을 소화했던 경험이, 작품과 캐릭터에 대한 꼼꼼한 분석과 넘치는 애정이 이런 평정심을 유지하는 데 한몫하는 것 같았다.
무대는 살풀이의 장
“공연은 가능하면 2년에 한번씩은 꼭 하려고 해요. 무대에 서면 에너지를 많이 받아요. 밀도있게 한 작품에 몰입해 들어가는 것도 좋고요.” 타고난 무대 체질인 걸까. 배수빈의 얘기를 듣고 있으면 무대 공포증은 먼 나라 얘기다. “실수요? 용납돼요. 공연 경험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어처구니없는 실수도 몇번 했었죠. 그런데 틀리면 실수처럼 안 보이게 어떻게든 메우면 돼요. 그게 또 살아 있는 생생한 공연의 맛이고.” 그는 “열심히, 절박하게, 프로답게” 최선을 다했다면 설령 돌아오는 평가가 박하더라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고 했다. 자기 소관이 아닌 일에 매달려봐야 소용없다는 쿨한 태도다. 스스로를 안달복달 몰아세우는 유형의 사람이 아닌 건 분명해 보였다. 그에게 무대가 한바탕 “살풀이” 장소가 될 수 있는 것도 그래서일 거다.
연극 <광해>에서 궁금한 건 왕이 된 배수빈이 아니라 광대가 된 배수빈의 모습이다. 드라마 <주몽> <바람의 화원> <동이>를 통해 배수빈은 시대극이 썩 잘 어울리는 배우임을 증명했다. 천민에서 왕까지 신분 고하를 막론한 연기였지만, 이들 드라마에서 배수빈은 늘 카리스마를 품고 있었다. 그러니 한껏 풀어진 하선과 배수빈이 잘 연결되지 않는다. “광해를 연기할 때가 더 편한 건 사실이에요. 하선을 연기할 땐 그 무게감을 다 털어버리고 가야 하는데… 왔다갔다 하는 게 재밌어요. 지금까지 제가 해온 캐릭터를 다 끄집어내서 요소요소 풀어내고 있는 중이에요.” 배수빈의 부드러운 미소만 보고 그를 자상하고 젠틀한 실장님 이미지로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의외로 그는 매번 변신을 해왔다. 비슷한 캐릭터를 연이어 연기한 적도 없다. 대체로 작품과 작품 사이의 간극은 컸고, 캐릭터는 널을 뛰었다. 신기하게도 그럴수록 배수빈은 철저하게 무색무취한 느낌의 배우가 되어갔다. “‘이 배우는 이런 이미지야’ 하고 굳어지는 게 제일 싫어요. 나도 나를 잘 모르는데, 아직 가진 게 더 많은데, 특정 이미지의 배우로 고정돼 사는 건 싫더라고요. 그래서 항상 그걸 부수는 작업을 했던 것 같아요. 쌓아놓고 부수고, 쌓아놓고 부수고. 그게 좋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저의 새로운 이미지를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럼 어때요.”
나도 나를 잘 몰라
2012년 한해만 놓고 봐도 그렇다. 지난 한해 배수빈은 부단히도 자신의 이미지를 쌓고 또 부수는 데 몰두했다. 한일 합작영화 <백자의 사람: 조선의 흙이 되다>의 순박한 조선인 청년 이청림은 옴니버스 공포영화 <무서운 이야기>에서 인육으로 젊음을 유지하는 사이코패스 살인마 민 회장이 되었고, 민 회장은 다시 전직 대통령 암살 작전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26년>의 김주안으로 변신했다. 부산국제영화제 때 처음 공개된 유지태 감독의 장편 연출 데뷔작 <마이 라띠마>에선 결혼이주여성을 만나 성장해가는 빈털터리 백수로 전락했으니 종잡을 수 없는 변신의 연속이라 할 만하다. “궁극적으로 제가 하고 싶었던 것들을 선택한 결과예요. 그전까지는 사실 배우의 인지도라는 걸 갖추는 게 필요했어요. 그동안 흥행드라마에도 출연했고, 그걸 바탕으로 드라마에선 이런저런 실험을 많이 했던 것 같은데, 궁극적으로 제가 하고 싶은 건 ‘내가 옳다고 생각하고 내가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작품을 통해 표현하는 거예요.” 제작 과정이 순탄치 않았던 <26년>이 결과적으로는 배수빈에게 고마운 작품이 된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배우들이 다 고민을 해요. 경제적인 부분을 책임질 수 있으면서도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작품을 다들 하고 싶어 하죠. 그래서 <26년>은 제게 ‘땡큐’인 작업이었죠. (웃음)”
가난한 마음으로
새로운 색을 덧입히는 것보다 행여나 물든 색을 지워내는 데 더 골몰하는 사람. 그래서 깨끗함을 유지하는 사람. 배수빈이 무색무취해져 갔던 이유를 알 것 같다. “사람에 대한 애정, 따뜻한 시선, 그래도 삶은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다는 믿음, 그런 것들만 가지고 가고 싶어요. 다른 건 다 사족이에요. 가난한 마음을 갖고 사는 거죠. 익숙해지면 찌들고 또 고이고…. 그럴 땐 버려야 해요. 원래 내 것도 아닌데. 그런 마음으로 살다보면 뭐든 되겠죠.” 어느덧 30대 중후반이 된 데뷔 11년차 배우. 그는 고루하게 늙고 싶지 않다고 했다. 껍질을 뚫고 핵심에 도달하고 싶다고 했다. 자신의 삶도, 자신의 연기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했다. 연극 <광해>가 끝난 뒤의 일은 아직 정해진 게 없다. 대중적인 드라마를 하게 될지, 영화를 하게 될지, 아니면 또 다른 파격적인 길을 걸을지 본인도 모르겠다고. 무엇이 됐건 우리는 온몸으로 또 온 마음으로 도전할 태세를 취하고 있는 배수빈을 보게 될 것이다. 그는 언제나처럼 또다시 개운하게 비워낼 각오를 하고 있을 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