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를 통해 ‘인품으로나 능력으로나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며 우스개를 하던 리얼라이즈픽쳐스 원동연 대표는 탈락했다. 대신 명필름 이은 대표가 지난 1월30일 열린 총회를 통해 한국영화제작가협회(이하 제협)의 새로운 회장으로 선출됐다. 전임 차승재 대표가 3번 연임했으니 6년 만의 새 얼굴이다. 올해는 연초부터 <7번방의 선물>이 700만명을 넘기면서 지난해 극장 관객 1억만명 시대의 활기를 이어나가고 있는, 이른바 영화계 활황의 시점이다. 제협이 이 시점에서 영화인들을 위해 고민해야 할 것, 풀어나가야 할 시급한 문제는 무엇일까. 회장직의 바통을 막 이어받은 이은 대표를 만나 각오를 들었다.
-제협 회장으로 선출된 걸 축하한다.
=축하를 받아야 할 일인지 모르겠다. (웃음) 영화계에서는 이런 성질의 일을 두고 ‘공익근무’라고 한다. 각자 프로젝트나 할 일이 산더미인데 동료를 위해, 업계를 위해 대신 나서주니 공익근무란 말이 생긴 거다. 차승재 대표가 6년 동안 회장직을 역임했고, 후임자를 찾던 중 나를 지목한 거다. 차승재 대표가 ‘힘들겠지만 좀 해줘야 하지 않겠나’ 이런 부탁도 해왔던 데다, 나 역시 굳이 마다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단일후보로 추대되었고 회장직을 맡게 된 걸로 알고 있다. 사실 좀 의외였다. 그간 제협의 안건이 있을 때 원동연, 최용배 같은 제작자들이 앞으로 나섰다면 오히려 한발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특별히 나서지 않았다기보다 지금까지는 나를 대신해 그런 역할을 해주는 사람이 있었다. 차승재 전 대표랑 사무국에서 전체적인 부분을 워낙 잘 조율해왔다. 난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운영위원회에는 쭉 참석해왔다. 무엇보다 지금이야말로 영화계에 중요한 국면이란 생각이 들었다. 마침 한국영화감독조합 조합장에 선출된 이준익 감독이 중요한 얘기를 했다. 영화 만들기를 작은 봉고버스에 비유하더라.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영화인들이 모두 그 버스에 올라타고 영화를 찍었는데, 지금은 모두 제각각이 돼버렸다는 거다. 이제 함께 움직이자는 말이 와 닿더라.
-명필름은 올해 명필름 학교와 제주도 카페 설립 등을 비롯해 계획 중인 영화도 두세편이다. 회사로 봐서는 총력전을 기울일 때다. 이럴 때 제협 회장으로 나선다는 건 회사 사업 추진에는 분명 부담이다. 항간에서는 개인적 사업 확장을 위해서 겉으로 드러나는 협회장을 맡았다는 설도 있다.
=제작자가 협회 일을 하는 게 말이 그렇지 무척 부담되는 일이다. 그래도 회피하지는 말자고 생각했다. 이 자리는 할 수 있는 사람도 몇 안되고 피할 수도 없다. 대기업, 투자자, 스탭들한테 제작자를 대표해서 정당하게 이야기해야 하는 역할이다. 상대적으로 여유있는 사람이 이 일을 총대 메고 해줘야 한다. 그 기간에 설령 개인의 수익이 줄더라도 말이다. 동료, 후배들을 생각해서 시간과 노력을 할애해 이런 일을 하는 건 내가 영화계에서 지금껏 받아온 것들을 갚을 수 있는 최소한의 양심이라고 생각한다. 대신 그동안 제협 회원들이 해왔던 역량과 힘을 함께 나누려고 한다. 차승재 전 대표처럼 의사결정과 회의를 많이 하는 방식으로는 안된다. 회사 내부적으로 제작 관련은 심재명 대표가 상대적으로 많이 한다고 하더라도 영화학교 일도 그렇고 개인적으로 할 일이 많다. 그러다보면 일 진행이 힘들어진다. 그래서 새로운 이사, 부회장을 선출하고 사무국을 강화하고 시스템을 확립하는 데 중점을 두려고 한다.
-차승재 대표가 6년간 집권했다. 좀 이른 질문이지만, 제협의 방향성에 어떤 변화를 예상하고 있나.
=변화나 개혁의 문제가 아니다. 제협의 일은 연속적으로 해야 할 일이다. 한국 영화산업 노사정이 협의한 것들이 그간 어떻게 논의되어왔나를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다. 더불어 집행부도 대거 바뀌었으니 새로운 분위기로 가는 것도 필요하다. 회원들도 쇄신을 원하는 것 같다. 차승재 대표가 제협의 기틀을 만들어왔다면, 지금은 그걸 인수하되 한번 더 치고 나가주는 역할이 필요하다. 회원을 확보하고 더 많은 의견을 수렴하고 발빠르게 움직여주는 게 단체를 위해서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지난해 관객 1억만명 시대라는 신화 뒤로 풀어야 할 숙제가 더 많아졌다. 단적으로 영화진흥위원회 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영화계 스탭의 팀장급 평균 연봉이 916만원, 세컨드급은 631만원이다. 스탭 처우는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는 실정이다.
=지난 한해 외형적으로는 분명 영화계가 발전했다. 그런데 한편으로 산업 내의 불균형과 불합리가 너무 심하다. 사실 지금의 불균형이 도출되기까지는 제작자들이 자기 영화 만들기에 급급해서 놓친 것들이 많다. 어떻게 하면 지금 내 작품이 잘될까 하는 생각에만 매달리다보니 균형이 깨진 거다. 제작자 입장에서 봐도 그간 투자자들에게 권리를 많이 양보해왔다. 작품 들어간다는 생각에 영화인들이 감내하고 누르면서 지금 여기까지 온 거다. 그러다보니 영화산업의 총량은 발전하는데 정책적인 것은 그 발전 속도를 못 따라가고 있다. 영화인들도 자신들의 권리를 찾는 데만 급급하기보다는 영화산업의 총량의 발전을 생각해야 한다.
-표준계약서 관련 법규 마련과 사안, 모태 펀드 활성화 등 제협이 안고 있는 문제들이 많다. 개인적 의견이 궁금하다.
=총회를 하면서 많이 놀랐다. 보통 총회는 사업보고하고 승인하는 절차로 한 시간 반 정도면 끝나는데, 그렇게 쉽게 마무리되는 분위기가 아니더라. 의견을 듣는 과정에서 토론이 시작되고 핵심적인 이야기들이 대거 나왔다. 조만간 회원들이 모여서 다시 토론하자는 걸로 마무리됐다. 그 정도로 지금 풀어야 할 숙제가 많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무엇이라고 판단하나. 저작권 문제와 관련해 대기업과 투자배급사들의 판권 수익 독식에 관한 부분은 당장 수술이 필요해 보인다.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회장이 되고 나니 시급한 산업 이야기를 하는 게 조심스러워진다. 제작자로서 당연히 투자자나 배급사에 요구해야 할 부분이 명확하다면, 회장으로서는 내 주장이 앞서면 안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일단은 회원들의 생각을 잘 수렴 하고 그걸 풀어나가는 게 우선이다. 극장 매출 발생, 유통과 배급, 배급과 제작 부문의 관계, 주요 스탭과 감독, 시나리오작가 등 모든 부문들이 유기적이어서 어느 한쪽으로만 의견을 몰아갈 수가 없더라. 전체적인 재점검, 시스템 재정비가 필요한 시기다. 지금은 말을 아끼게 된다. 내 입장을 이해해 달라.
-명필름 학교는 최근 강사진 모집이 한창이더라. 얼마나 추진됐나.
=학교는 올해 7월에 착공해서 9월이면 완공된다. 영화학교 수업을 위한 교재 작업, 번역 작업들도 추진 중이다. 마침 어제 전임교사도 뽑았다. 그분과도 협의를 해야 하니까 아직 공개는 기다려달라. 10월에는 입학전형 설명회를 하려고 한다. 예상외로 주변 반응이나 관심이 꽤 높다. 인사치레인지 모르지만, 입학을 벼르는 학생도 많다. 홍보는 꽤 된 것 같다. 지금 바라는 건 1천명 응시하는 것보다 100명이 응시해도 좋은 학생이 왔으면 한다.
-제협 회장직과 학교 사업 추진. 두 가지를 비슷한 시기에 함께하게 된 게 인상적이다. 제협 일도 그렇지만, 학교 역시 개인적인 사업이라기보다 영화계를 위한 대의적인 일이라는 성격이 짙다.
=그간 영화를 만들면서 관객이 사랑해주고 또 작품 만들고 이렇게 반복하면서 지내왔다. 겉으로는 우아해 보이지만 매해 매 작품을 하면서 긴장하면서 살아왔다. 부부가 함께 성찰을 해보니 우리가 해온 일이 뭔가 싶더라. 돈 벌고 자식한테 유산을 물려주고 그렇게 지내는 게 행복해 보이지는 않더라. 마침 어느새 영화계에서도 선배가 되어 있더라. 우리가 잘하면 업계가 밝아진다는 책임감도 생겼다. 영화학교도 그래서 생각했다. 용기도 있었지만, 잘될까 하는 두려움도 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건축학개론>이나 <마당을 나온 암탉>을 할 때도 두려움을 가지고 해왔다. 그 작품들이 흥행이 안됐다면, 단순히 스코어 문제뿐만 아니라 도전할 힘을 잃었을 텐데 다행히 많은 분들이 호응을 해주셔서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책임감있는 삶의 모습, 모델을 만들어나가면 결과적으로 이런 일이 사회에 나비효과로 작용할 수 있겠구나 판단했다. 영화 한편을 잘 만드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올해 명필름 제작 관련 계획도 궁금하다.
=<시라노; 연애조작단> <건축학개론> <마당을 나온 암탉> 연이어 세편을 롯데엔터테인먼트와 같이 했는데 세편 모두 결과가 좋았다. 그 결과인지 롯데에서 1회 시나리오 공모전 대상 수상작을 특별한 조건없이 같이 하자고 제안을 해왔다. <관능의 법칙>이란 작품으로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처럼 중년 아줌마들의 이야기다. 그들의 성을 다루다보니 상업영화 고정관념으로는 쉽게 커버가 안될 수도 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명필름의 색깔이 더 드러나겠다 싶기도 하고. 특히 이 작품으로 심재명 대표의 색깔이 분명해지는 한해가 되지 싶다. 아무래도 나는 제협과 학교 재단 일에 더 치중하고 작품쪽은 심재명 대표가 도맡아 할 것 같다.
-제협 회장직 역임에 관해서 명필름 공동 제작자인 심재명 대표의 반응이나 의견도 궁금하다. 회사로선 역시 인력 손실이다. (웃음)
=심재명 대표나 나나 영화산업 전반에 대해 생각이 비슷한 편이다. 예술영화 전용관 문제도 심재명 대표가 많이 관여해왔고, 많은 얘기를 하고 의견을 나눈다. 최근에 심 대표와 채윤희 대표가 홍보 대행사 연합을 만들었는데, 영화 마케팅/홍보 대행사도 영화계의 다른 분야만큼이나 열악하다고 한다. 다시 말하지만 저마다 한국영화의 발전을 위해서만 일했지 목소리를 내는 것은 뒤로 미뤄두고 있었던 거다. 한국영화 관객이 1억명이 넘은 지금 상황에서 그러니까 다 같이 돌아보자는 거다. 목소리 높이거나 다투자는 게 아니라 전면 재검토를 하자는 거다. 그래야 중요한 이 시기를 넘기고 발전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