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se up]
[클로즈 업] B급도 주류문화가 됐다
2013-02-26
글 : 이화정
사진 : 최성열
<남자사용설명서> 이원석 감독

<남자사용설명서>는 남자에게 어필하지 못하는 인기 없는 광고회사 조감독 최보나(이시영)가 우연히 ‘남자사용설명서’라는 비법 비디오를 접하면서, 한류스타 이승재(오정세)와의 사랑에 골인하는 내용의 로맨틱코미디다. 샤방한 컨셉과 장르적 특성을 십분 고려해 개봉도 시의적절한 밸런타인데이를 택했다. 그렇다고 기존 장르의 말랑말랑한 분위기를 기대했다간 같이 간 커플과 얼굴을 붉히고 나올지도 모르겠다. 출연한 박영규가 시나리오를 보고 ‘나까 코미디’(싸구려 코미디)는 안 한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설득하는 데 꽤 애를 먹었다는 문제의 영화. 이원석 감독은 전에 없던 B급 감성과 키치적인 터치로 기이한 영화를 생산했다. <7번방의 선물>과 <베를린>의 대격돌 속에, 빼꼼 고개를 내민 특별한 영화 <남자사용설명서>의 이원석 감독을 만났다.

-개봉하고 나서야 만났다. 첫주 스코어가 기대보다 저조한가.
=지금 극장 상황이 쉽지 않다. <7번방의 선물>과 <베를린>이 워낙 굳건히 극장을 지키고 있으니, 다른 영화들도 다들 난감해하더라. 물론 나야 이런 말하긴 좀 그렇다. 관객이 영화를 안 찾아준다면 그건 만든 사람 탓이니까. 워낙 호불호가 갈리는 영화라 만들면서도 걱정을 하긴 했다. 그런데 언론 시사회 이후 기대가 좀 생겼다. 기자들이 감정표현을 잘 안하는 편인데 웃더라. 좋은 신호라고 한다. <광해, 왕이 된 남자>를 제작한 원동연 리얼라이즈픽쳐스 대표가 <광해, 왕이 된 남자> 때보다 분위기가 더 좋은 것 같다고 했다. 돌아보니 꿈에 찬 하루였다. (웃음) 지금은 극장 유지가 얼마나 될지, 입소문이 얼마나 날지 기다리는 시기다.

-잘나가지 못하던 최보나가 한류스타와 사랑도 쟁취하고, 일에서도 성공한다. 스토리로 보자면 전형적인 신데렐라형 멜로인데, 진행 방식은 사뭇 다르다. 여주인공이 기괴한 비디오를 접하는 부분은 판타지와 키치가 어우러지고, 인물들은 맥락에 개의치 않고 B급 감성을 마구 분출한다. 각종 CG와 분할화면, 자막 등의 요소들도 드라마의 흐름을 자주 끊어놓는다. 관객도 생소했을 것 같다.
=원래 시작은 로맨틱코미디가 아니었다. 일종의 사회생활 매뉴얼인 B급 블랙코미디를 생각했다. 내가 사회생활을 잘 못하는 편이다. 초등학생 때부터 미국에서 살다가 2004년에 한국에 돌아왔는데 항상 여럿이 모이면 말이나 행동에서 실수를 많이 했다. 너 그렇게 살면 안돼, 이런 지적을 많이 받았다. 90년대 말 미국에는 ‘지구가 멸망해도 살아남는 법’ 같은 각종 설명서가 유행이었는데, 마침 한국 서점에도 그런 책들이 많이 나왔더라. 거기서 착안했다. 처음엔 시나리오를 보고 ‘이게 뭐냐, 평생 감독 준비만 할래?’ 이런 반응도 있었다. 마침 <늑대소년>을 제작한 김수진 비단길 대표와 친분이 있어 사회생활 관련 매뉴얼 영화를 만들겠다고 의견을 구했더니, ‘남자사용설명서’라는 힌트를 주더라. 대신 ‘여자사용설명서’ 하면 몰매 맞는다더라. (웃음)

-원래 의도와 로맨틱코미디의 결합이 관건이었겠다. B급, 키치 감성이 후반부의 멜로가 주는 감정선과 부딪힐 우려도 컸을 테고.
=영화를 본 관객이 “감동적이었다”고 하더라. 사실 내 의도는 블랙코미디의 기조로 웃다가 막판에는 약간 어두운 느낌을 끌어내고 싶었다. 웃고 있지만 웃는 게 아닌 그런 상태 말이다. 지금까지 했던 단편들도 그런 분위기였다. 조금 긴 버전의 편집본에는 흔히 B급영화에서 이유없이 나오는 장면들이 추가되어 있다. 투자사 입장에서는 불필요하고 장난스럽다고 판단한 것 같다. 결국 삭제됐다. 게다가 로맨틱코미디로 가져가면서 나 역시 욕심이 생겼다. 장르에 맞는 메시지도 주고 싶더라. 촬영하면서도 그런 부분의 조화가 가장 고민이었던 것 같다.

-기존 로맨틱코미디를 해부하기도 했을 텐데, 어떤 부분에서 차별점을 주고 싶었나.
=내가 제일 좋아하는 로맨틱코미디는 <미녀는 괴로워>다. 보면 볼수록 김용화 감독이 대단하다 싶은 게 영화에 군더더기가 없다. 로맨틱코미디가 마지막에 가서 너무 감정을 과하게 몰아붙이는 게 보기 힘들다. 인물들이 울고불고 이러는 게 싫다. 사랑 이야기이고 결론은 두 남녀가 연결되도록 정해져 있는데, 서로 오해가 있었다는 걸 인정하고 기분좋게 끝낼 수도 있지 않을까. 최대한 감정의 과잉을 자제하자 생각했다.

-배우들에겐 자칫 무리한 컨셉이 될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촬영 과정에서는 어땠나.
=아니나 다를까. 박영규 선생님은 시나리오 보고 안 한다고 하시더라. ‘나까 코미디’로 아셨다. 이제 나이도 있고, 너무 막 나가는 코미디는 안 한다고 하시더라. 함께 식사를 하면서 설득을 했다. ‘정극이다. 웃기기 위해서 몸개그는 하지 않을 거다.’ 수차례 말씀드리니 오케이해주셨다. 시영씨와 정세씨도 톤을 잡는 데 힘들었을 거다. 시영씨가 정말 고생 많이 했다. 나도 확실치 않으니 한 가지 상황에서도 이것저것 여러 번 시도를 했다. 작업을 하다 보니 시영씨가 왜 권투를 하는지 알 것 같더라. 정말 준비를 많이 해오는 배우더라. 정세씨는 이번 작품 하면서 자주 만나서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내가 너무 스트레스를 주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특수효과 같은 기술적인 것들을 과감하게 사용하는 것과 반대로, 이야기의 매개가 되는 건 비디오 세대의 풍경들이다.
=미국에서는 중고등학생 때 성교육 비디오를 틀어주는데, 드라마 <A특공대>에 나왔던 조연배우가 나와서 바나나 가지고 성교육하는 이미지를 차용했다. 게다가 내가 74년생인데 그 또래들은 비디오에 대한 로망이 있다. 아날로그가 정말 펑키한 것 같다. 요즘 빈티지도 트렌드이니 거기 맞춰가자 싶었다.

-다소 진부할 수 있는 결론 부분을 제외하면 감독 특유의 개성이 잘 드러난다. 이런 독특한 시나리오가 투자를 받고 영화화된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좀 의외다.
=다행히 투자사가 그런 부분에 열려 있었다. 근데 다들 처음엔 <미녀는 괴로워> 같은 영화를 생각했던 것 같다. 설마 이 정도로 갈 줄은 몰랐을 거다. (웃음) 워낙 내가 B급영화 마니아다. 광고회사를 다니다 영화 공부를 하게 됐는데, 기본적으로 영화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 무시를 많이 당했다. 그래서 작정하고 도서관에 있는 영화를 다 봤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페데리코 펠리니 같은 감독들의 클래식도 봤는데, 정작 내가 사랑에 빠진 건 <바바렐라> 같은 B급영화였다. 고인이 된 <미지왕>의 (김)용태 형과도 진짜 친했다. 우리에겐 정말 멋있는 영웅이었다. 사실 B급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싸이가 전세계적으로 잘되는 걸 봐도 지금은 B급이 하나의 주류문화가 됐다는 생각이 든다.

-의도했던 B급 감성을 완전히 전개하지 못한 아쉬움도 있을 텐데, 다음 작품에서는 본격적으로 발휘되는 건가.
=다음 작품은 절대 안 쓰겠다고 다짐했다. 지금까지 내가 상업적이라고 하고 쓴 작품들을 다들 상업적이라고 하지 않는데 그게 겁나더라. 요즘 흥행되는 영화들을 보면서 내 영화가 받아들여질까 두렵기도 하다. 그래서 시나리오를 받아서 하려고 한다. 사극, 호러, 스릴러 같은 영화들이 많이 들어오는데 아직 고민 중이다. 호러는 싫어해서 아직 <식스 센스>도 못 봤다. (웃음)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