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터/액트리스]
[오정세] 사람들이 몰라봐주면 더 좋다
2013-02-28
글 : 이주현
사진 : 최성열
드라마 <보고 싶다> 이후 영화 <남자사용설명서>로 만나는 배우 오정세

수고하셨습니다, 인사까지 끝내고 오정세가 스튜디오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몇분이나 흘렀을까. 그가 다시 스튜디오로 걸어들어왔다. 무언가 빠뜨리고 갔나보다 싶었는데 대뜸 휴대폰 카메라를 셀카 모드로 전환한 뒤 기자에게 다가왔다. 함께 사진을 찍자는 거였다. 서로 훈훈하게 인증숏을 찍고 헤어진 뒤 생각했다. ‘나 지금 마성의 남자에게 홀린 건가?’ <남자사용설명서>를 보기 전까진 오정세를 평범한 배우라고 생각했다. 오정세는 자주 눈에 띄었지만 크게 돋보이지 않았다. 그의 기복 없는 꾸준함이 그런 인상을 공고히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번엔 조금 다르다. <남자사용설명서>에서 오정세는 날고뛴다. 소름 돋는 발연기로 하루아침에 무명배우에서 거만한 톱스타가 된 이승재. 그런 말도 안되는 캐릭터를 오정세는 뻔뻔하게 연기한다. 발군의 코미디 연기다. 정작 본인은 사람들에게 각인되는 배우가 되기 싫다고 했지만 <남자사용설명서>를 본 관객이라면 오정세를 각인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이원석 감독이 굉장히 독특한 분이라고 들었다. 코드는 잘 맞았나.
=또라이 아니면 천재, 딱 그 느낌이었다. 작품 끝날 때까지 한배를 탔으니까, 또라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저 아래 숨겨뒀다. 그리곤 처음부터 얘기했다. 예전엔 10개의 아이디어가 있으면 8개는 자체검열했는데 이번엔 그러고 싶지 않다고. 아이디어가 10개 있으면 10개 다 말하겠다고. 어떻게 보면 그게 월권이고 오버일 수 있는데 감독님이 오케이해줘서 감사했다.

-거만한 톱스타 이승재 역을 맡았다. 캐스팅 제의받고 어떤 생각이 들던가.
=‘괜찮겠어?’ 이런 생각. 처음엔 행복하고 기뻤다. 물론 다른 분들이 걱정하는 부분을 나 역시도 걱정했다. 학생영화도 아니고 몇 십억원짜리 영화인데 책임도 컸고 우려도 있었다. 이승재라는 인물을 찾기까지 많이 힘들었다. 시나리오 속 이승재는 나쁜 남자의 매력을 풍기는, 누가 봐도 멋있는 톱스타였다. 내가 이 비주얼로 거만하게 하면 나쁜 남자가 아니라 그냥 나쁜놈, 비호감으로 빠져버릴 것 같았다. 그러면 나도 손해고 영화도 손해고. 이 캐릭터를 어떻게 호감으로 가져올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다.

-때로 이승재의 행동이 급작스럽게 느껴지는 장면들이 있다. 감정과 감정, 행동과 행동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작업도 필요했을 것 같다.
=굉장히 열심히 연기를 하던 배우였다가, 톱스타가 되고 거만해졌다가, 최보나(이시영)를 만나 갑자기 사랑하고, 잠자리를 가지고, 또 거만하다가, 어느 순간 이 여자를 위해 ‘선방’까지 날리는 인물이다. 감정의 점프가 심하다고 생각했다. 일단 스스로 이해가 안돼서 감독님께 물었다. “그렇게 거만했던 사람이 왜 갑자기 이 여자에게 확 빠지는 겁니까?” 감독님은 “사랑이란 게 원래 한번에 훅 찾아오지 않느냐”고 하더라. 머리로는 이해가 갔다. 하지만 관객 10명 중 8명은 공감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그 틈을 채워나가는 작업을 했다. 예를 들면 보나네 집에서 자고 일어나 대화하는 신에서, 대화 신 앞에 보나의 공간을 스케치하면 좋겠다고 감독님께 말씀드렸다. 집 밖에선 보나가 선머슴이고 비호감이지만, 그녀의 공간은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다. 특이한 것도 좋아하고. 전혀 색다른 여성적인 면들을 보면서 승재가 보나에게 이성으로 호감을 느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대사인지 애드리브인지 헷갈리는 장면도 많다. 승재가 한눈팔다가 팬의 가슴(정확히는 유두)에 점을 찍는 장면은 어떻게 탄생했는지 궁금하다.
=그것도 현장에서 나왔다. 한쪽 가슴에 점을 찍고, 긴장감 있는 포즈(pause). 나도 뻘쭘, 얘도 뻘쭘. 침묵이 2, 3초 지속되지만 느낌이 꽉 들어차 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그러곤 다른 쪽 가슴에 점을 찍으려 한다. 또 포즈. 거기서도 충분히 꽉 찬 포즈, 꽉 찬 침묵이다. 그 뒤 매니저가 박수를 치고 다시 뻘쭘해하면서 마무리되는데, 마지막엔 힘이 떨어지고 불편한 침묵이 이어지더라. 그래서 어차피 사인해주는 상황이니까 팬의 이름을 유두영으로 설정하면 어떨까 싶었다. “성함이? 유두영씨.” 스치듯 지나가는 장면에선 평범한 이름 같지만, 뻘쭘, 뻘쭘, 성함이? 유두영씨. 그렇게 끝나면 깔끔할 것 같았다.

-CF 조감독인 보나 앞에서 오디션을 치른답시고 춤을 추는 장면이 있다. 즉석에서 나온 막춤은 아닌 것 같던데.
=‘주인공이어서 더 열심히 하셨겠어요’ 이런 얘기를 많이 듣는데, 사실 준비는 예전이랑 똑같이 했다. 똑같이 치열하게. 전과 달라진 점은 내가 승재라는 캐릭터를 만들어놓은 다음 그걸 주위 사람들에게 모니터하게 하더라는 거다. “이렇게 그렸는데 어때? 어떤 것 같아?” 그렇게 주위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휴대폰을 기자 앞에 내밀어 뮤직비디오를 보여준다.) 이 춤은 최강희씨가 추천해줬다. ‘아프리카 뮤직비디오’라고 검색하면 나오는데, 뮤직비디오 속 춤의 포인트는 웃기려고 추는 춤이 아니라는 데 있다.

-맞는 연기도 일품이다. 어쩜 그렇게 따귀를 잘 맞을 수 있나.
=엘리베이터에서 키스하려다 보나한테 따귀 맞는 장면 얘기를 많이들 한다. 그런데 정말 하나도 안 아팠다. 배우로서 카타르시스를 느낄 때가 이럴 때다. 생각지 않은 리액션이 왔을 때 나도 모르게 거기에 맞는 생짜 리액션을 하게 되고 상대방도 또 생짜 리액션을 보이고, 그렇게 신을 만들어나갈 때 희열을 느낀다. 그 신에선 첫 번째 내 액션만 있었다. 한참 얻어맞은 다음 이제 끝이겠지 했는데 느닷없이 한대 더 때려주면 “아, 아파!” 이런 게 아니라 “어? 이것 봐라” 하면서 나도 모르는 반응이 튀어나오는 거다. 사실 진짜 아팠던 건 이승재가 출연하는 드라마 <욕망의 늪>에서 아줌마한테 따귀 맞을 때였다. 감독님이 보조출연자 업체에 차진 손을 가진 아주머니를 부탁했다더라.

-나체 연기도 강렬했다. 발가벗은 채 젖먹던 힘까지 짜내 달려가던 뒷모습이 쉽게 잊혀지지 않더라. 시나리오에도 ‘전속력으로 달려나간다’라고 쓰여 있었나.
=그냥 ‘달려나간다’였다. 그 장면에서도 두 가지 느낌을 생각했다. 하나는 지금 버전. 또 하나는 그런 상황에서도 ‘후까시’를 잡는 버전. 그런데 다 벗겨놨으니 부끄러워하며 도망치는 게 맞을 것 같았다. 풀숏으로 역광받는 그 뒷모습 장면은 누가 봐도 저렇게 빨리는 못 달릴 것 같은데 하는 느낌으로, 도마뱀이 막 뛰어가듯이 내달렸다. 빨리 뛰면 뛸수록 승재의 상황이 절박해 보일 것 같았다.

-이미지가 고정되는 것을 경계한다고 했는데, <5백만불의 사나이> <코리아> <커플즈> 등 최근에는 극에 웃음을 불어넣는 역할을 주로 맡았다.
=최근작들의 캐릭터가 라이트한 느낌이 있다. 그래서 악역이 됐든 무미건조한 인물이 됐든 새로운 것을 찾으려고 한다. 단편에선 웃음기 하나없는 멜로를 하기도 하고, 애니메이션(<돼지의 왕> <사이비>) 더빙도 하고. 대중에게 노출된 게 가벼운 느낌의 상업영화들이라 그렇게 느끼는 것 같다.

-<뒷담화: 감독이 미쳤어요> <런닝맨> <사이비> 등 출연작들의 개봉이 줄을 잇는다.
=<런닝맨>에선 90신에 처음 등장하는데 거기서도 좀 가벼운 느낌의 캐릭터를 연기한다. <뒷담화…>에선 조감독으로 나오고, <사이비>에선 목사 캐릭터를 맡았다.

-최근에는 드라마 <보고 싶다>에도 출연했다. 독립영화계의 스타였던 배우가 아이돌과 함께 호흡을 맞추며 드라마에 출연하는 것을 보는 느낌도 색달랐다.
=어떤 의도를 가지고 선택한 건 아니다. 사람 만나는 것과 비슷한 것 같은데, ‘오늘은 어떤 좋은 사람을 만날 거야’ 해서 누군가를 만나는 게 아니고, 만나고 만나고 만나다보면 정말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되듯이, 작품도 마음을 열어놓고 만나고 만나고 만나다보면 정말 좋은 작품을 숙명처럼 만나게 되는 것 같다. 드라마는 안 한다, 그런 건 없다. 이전에도 드라마 제의가 있었는데 상황이 맞지 않아 못했다. <최고의 사랑>도 그랬고, <해를 품은 달>도 그랬다. <보고 싶다>는 스케줄이 맞았다. 또 아이돌이랑 파트너가 돼 연기한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이돌을 잘 모른다. 박유천이란 배우도 그냥 배우로 만났을 뿐이다.

-대중으로부터 내가 사랑받고 있구나, 하고 느끼나.
=사랑받는 느낌… 드는데, 주목이나 칭찬, 타이틀에 휘둘리고 싶지 않다. <거울 속으로> 때도 그랬다. 대중의 큰 관심은 아니었지만 주변 관계자들한테 잘했네, 잘했네, 당신 기대가 돼요, 하는 칭찬을 들었다. 하지만 또다시 오디션. 또다시 비슷한 역할. 그러다 <라듸오 데이즈>가 개봉하고 칭찬, 칭찬. 다시 또 비슷한 과정의 반복. 그렇다고 해서 좌절할 필요가 없다. 그게 내리막길이 아닌 걸 아니까. 배우의 인생은 (손가락으로 고점과 저점의 차이가 큰 그래프를 지그재그로 그리며) 원래 이렇다. 칭찬해주면 감사하게 그 칭찬을 받는 것까지가 내 몫인 것 같다.

-요즘은 배우로서 어떤 꿈을 꾸나.
=계속 잊혀졌으면 하는 꿈. 계속 잊혀져서 늘 새로운 인물이면 좋겠다. 사람들이 몰라봐주면 좋다. ‘어디서 봤더라?’ ‘배우예요?’ 그런 말 들으면 기분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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