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x&talk]
[박훈정] 갱스터 누아르의 적통 잇고 싶다
2013-03-01
글 : 장영엽 (편집장)
사진 : 오계옥
<신세계> 박훈정 감독

박훈정 감독은 <신세계> 개봉을 앞두고 잠을 설쳤다. 개봉이 코앞인 어느 감독이 그렇지 않겠느냐마는, <신세계>에 대한 박훈정 감독의 마음은 각별하다. 그의 첫 연출작 <혈투>가 저예산영화의 한계를 실감하게 한 작품이라면, 충무로 A급 배우와 스탭들의 수혈을 받은 <신세계>야말로 상업영화계에 출사표를 던진 감독 박훈정의 진정한 면모를 가늠할 작품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집필한 시나리오 <악마를 보았다> <부당거래>를 김지운, 류승완 감독이 연출했듯 <신세계> 역시 “다른 감독이 더 잘 만들 수도 있을” 작품이라 고민도 했건만, 박훈정 감독은 결국 “다 함께 만든다는 생각으로” 잠시 펜대를 내려놓고 비정한 남자들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신세계> 개봉(2월21일)이 일주일도 안 남았다.
=잠을 설치고 있다. 죽겠다.

-어떤 점이 그렇게 힘드나.
=개봉 스트레스겠지 뭐. 어쨌든 본격적인 상업영화는 처음이니 관객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싶고, 누아르가 한국영화의 주류 장르는 아니니까 거기에 대한 걱정도 좀 있고. 쟁쟁한 배우들을 데려다 찍었는데 그에 걸맞은 성과가 있어야 하지 않겠나. 아주 스트레스투성이다. (웃음)

-갱스터 누아르를 소재로 한 한국영화는 참 오랜만이다. 어떻게 시작한 프로젝트인가.
=갱스터 누아르영화를 정말 좋아한다. <대부> <무간도> <흑사회> <무간도4: 문도>나 <이스턴 프라미스> 같은 영화들. 언젠가 나도 이런 장르의 작품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늘 해왔는데 이번에 하게 됐다.

-영화를 보면 자연스럽게 <대부> <무간도> <흑사회> 같은 작품들을 떠올리게 하는 지점들이 있다.
=그렇다. 그 영화들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으니까.

-갱스터 장르의 자장 안에서 <신세계>는 어떤 작품이 되길 바랐나.
=<신세계>가 갱스터 누아르 장르의 장점들을 잘 이어받은 영화라는 얘기가 듣고 싶었다. 앞서 언급한 영화들은 내가 개인적으로 정말 좋아하는 작품들이고, 명작이다. 그런 영화들과 비교되는 것 자체가 영광이다. 장르영화라면 어차피 그 장르의 이야기틀에서 벗어나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 틀 안에서 훌륭하게 잘 만들었다는 말을 들어보고 싶었다. 좋은 영화들에 영향받아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영 아닌 작품들도 수두룩하잖나.

-<대부> <무간도> <흑사회>와 <신세계>의 가장 큰 차이점은 지리적, 문화적 차이가 아닐까. 갱스터 누아르 장르를 한국사회로 가져오며 어떤 고민을 했나.
=사실 한국적인 요소를 크게 고민하진 않았다. 비즈니스 조폭 얘기가 한국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한국 조폭들은 외국 마피아를 롤모델로 삼으려 하니까. 오히려 비즈니스 조폭과 관련된 다양한 사례들을 찾았던 것 같다. 그 ‘팩트’들을 참고해 시나리오를 썼다.

-<신세계>는 ‘에픽 누아르’를 지향하는 작품이다. 영화화된 이야기는 강 과장(최민식)과 정청(황정민), 이자성(이정재)을 둘러싼 긴 시나리오의 중간 부분이라고 들었다. 왜 에픽의 중반부를 영화화하기로 결심했나.
=어떤 부분을 먼저 영화화할 것인지 고민이 많았는데, 아무래도 <신세계>의 이야기가 가장 장르적이고 영화화하기 쉬운 내용이라고 봤다. 긴 시나리오의 전반부는 기업형 범죄조직 골드문이 탄생하기까지의 이야기고, 후반부는 새로운 수장을 맞은 골드문의 뒷이야기와 경찰의 반격을 다룬다.

-3부작 이야기네.
=<신세계>가 잘되어야 속편도 나오지 않겠나. (웃음)

-피투성이가 되어 취조당하는 조직원의 얼굴로 시작하는 오프닝 신이 충격적이었다. 시나리오와는 다른 시작이던데.
=그 프롤로그가 우리 영화의 성격을 단번에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프락치로 몰려 처참하게 죽는 조직원의 모습을 이자성이 지켜보잖나. 그 얼굴을 보여주는 첫 장면이 없었다면, 이후에 자성이 받는 스트레스가 어느 정도인지 잘 다가오지 않았을 거다. 처음부터 이렇게 세게 시작해도 되느냐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지금의 선택이 옳았던 것 같다.

-이번 영화가 당신이 각본을 썼던 <악마를 보았다> <부당거래>, 그리고 연출작 <혈투>와 다르게 느껴지는 점은 등장인물간에 드디어 감정이 개입했다는 점이다. 전작의 인물들이 각자의 이해에 따라 이합집산하는 이들이었다면 <신세계> 속 정청과 이자성의 관계는 무척 애틋하다. 이들로부터 마치 멜로영화의 주인공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도 받았다.
=사실 나는 인물에 잘 개입하지 않는 스타일이다.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놓고 그 속에 인물을 집어넣은 다음 어떻게 흘러가는지 지켜보는 입장인데, <신세계>의 경우는 내가 변했다기보다 상황이 그들을 애틋하게 만든 부분이 있다. 영화에는 짧게 언급되지만 정청과 이자성의 전사가 길다. 그들의 이야기를 많이 쳐냈음에도 불구하고 감정선이 살아 있는 건 배우들의 몫이 컸다. 그리고 나는 누아르가 남자들의 멜로라고 생각한다. 정청과 이자성의 관계도 그런 장르적 특성과 다르지 않다.

-“세 배우들간의 밸런스를 맞추는 게 이 영화에서 중요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최민식, 황정민, 이정재와는 이에 대해 어떤 말을 나눴나.
=촬영 들어가기 전에 두 가지를 얘기했다. 클래식한 영화를 만들자, 묵직하고 진중하게. 두 번째가 애들이 아닌 어른들의 영화를 만들자는 거였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우리가 원했던 목표는 이룬 것 같다. 함께 작업한 배우들도 만족스러워하고.

-현장에서 지켜본 세 배우들의 연기는 어땠나.
=이 배우들이 잘나가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연기 스타일은 세명 다 굉장히 다르지만, 작품을 대하는 태도나 자세가 정말 프로다. 자기 것만 보는 게 아니라 전체 판을 생각하는 배우들이다. 여기서 좀더 하면 자긴 살 테지만 전체 판에는 도움이 안되겠다 싶은 것들은 과감히 버릴 줄 알더라. 최민식 선배는 에너지가 넘치지만 한편으로는 여유와 관록이 느껴지고, 판을 정말 잘 본다. 정민 선배는 작품에 대해, 역할에 대해 굉장히 치열하고 연구를 많이 해온다. 이정재라는 배우는 정말 섬세하고 깊다. 그렇게 스타일이 다르지만 작품에 대한 애정이나 자부심은 한결같더라. 좋은 배우들이다.

-황정민이 연기한 정청의 경우 애드리브가 많았을 것 같다.
=많이 했지. 본인이 아이디어가 굉장히 많은 분이고, 이 장면에서 뭔가 아쉽다고 느낄 때쯤 하나씩 애드리브를 냈는데 굉장히 영리한 배우라는 생각을 했다. 정청이 기내 슬리퍼를 끌면서 입국장에 나오거나, 이자성 대신 갑자기 수하의 뺨을 때리는 장면 등이 모두 선배의 아이디어였다.

-강 과장에겐 낚시터, 이자성에겐 기원이란 자기만의 공간이 있는데 정청의 경우 잘 생각나지 않는다.
=정청은 우리 영화를 종횡무진 흔드는 인물이라 따로 공간 생각은 안 했다. 각 인물의 공간에 나름의 의미를 뒀는데, 강 과장은 모든 계획의 설계자잖나. 계획을 짜놓고 떡밥을 쫙 뿌려놓고 누가 낚이기만 기다리고 있는 인물이라 낚시터가 어울릴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자성은 대단히 정적인 인물이라, 그런 사람이 접선을 한다고 생각했을 때 기원이 좋겠다고 봤다. <신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사실은 바둑과 비슷하잖나. 자성이 접선책인 신우(송지효)랑 바둑을 두며 “빠져나갈 틈이 없다”고 하는데, 그건 그의 상황과 도 맞닿아 있다. 그런 은유적인 의미를 노렸다.

-<신세계>는 누아르면서도 액션이 몇 장면에 압축적으로 들어가 있고 클로즈업이 많은 영화다.
=우리가 애초에 얘기했던 건, 어른들 영화니까 액션이 과하지 않되 실제의 폭력장면을 보듯 섬뜩하게 연출하고 싶었다. 굉장히 짧은 순간의 액션이지만 잊혀지지 않도록. <신세계>는 액션영화가 아니니까, 사람을 찌르고 죽이고 때리는 데서 쾌감을 느끼진 말았으면 좋겠다, 공포가 느껴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무술감독이 머리를 막 쥐어짜더니 정말 잘 짜왔더라. (웃음) 그리고 우리 영화가 배우 보는 재미잖나. 인물간의 대립이나 미묘한 감정의 변화가 중요한 영화이기도 해서, 배우들의 열연이 정확하게 보이려면 아무래도 클로즈업이 좋을 것 같더라.

-엘리베이터 액션 신이 인상적이었다. 불현듯 <혈투>의 갇힌 공간이 떠올랐는데, 폐쇄적인 공간에 끌리나.
=사실 골드문이란 빌딩 자체가 등장인물들에겐 거대한 무덤이잖나. 그 안에서도 엘리베이터라는 좁은 공간, 거기에선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으니 공포감이 극대화되는 거다. 정청과 상대파 애들이 엘리베이터 안에서 싸우는데, 덫을 놔서 정청을 잡았음에도 함부로 덤비지를 못한다. 정청이 그런 인물이었다는 걸 보여주기에 엘리베이터만 한 공간이 없다고 생각했다.

-모든 사건이 마무리된 뒤, 정청과 이자성의 과거를 보여주는 의도는 뭔가. 다소 사족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두 사람의 과거를 보여주고 싶은 생각이 컸다. 사실 영화적으로는 골드문에 앉아 있는 자성의 뒷모습으로 끝내는 게 맞다. 하지만 정서적으로는 너무 무겁게 끝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좀 들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고민을 많이 했는데, 결국 정서적인 선택을 한 것 같다.

-배우들뿐만 아니라 스탭들 또한 충무로 최고였다. 정정훈 촬영감독, 조영욱 음악감독, 조상경 의상감독 등 A급 스탭들과 일해본 경험은 어땠나.
=<혈투> 때는 내가 하고 싶었던 걸 거의 하지 못했다면, <신세계>는 하고 싶은 걸 거의 다 한 작품인 것 같다. 그 차이가 정말 크다는 걸 깨달았다. 제대로 영화 찍은 건 이번이 처음이라는 생각을 했다.

-‘박훈정표 각본’ 스타일은 확실한데, 여전히 ‘박훈정표 영화’가 어떤 스타일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다는 아쉬움은 남는다.
=그건 지금 내가 하려 한다 해서 할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아쉬운 부분을 충분히 커버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커버했겠지만, 아직 그 정도 능력은 안되는 것 같다. 하지만 점차 좋아지지 않을까. 이번 영화의 경우 긴 이야기 중 일부를 다루다보니 설명되지 않은 지점도 있어 아쉬웠고, 좋은 장면들이 많았는데 편집 과정에서 싹싹 잘려나가는 게 아쉬웠다. 그런데 상업영화를 하는 것이니, 틀 안에 맞추는 것도 능력이겠지. 어쩔 수 없는 거다. (웃음)

-다음 작품은 각본으로 먼저 만나게 될까, 혹은 연출일까.
=잘 모르겠다. 시나리오 작업을 몇개 하고 있긴 한데, 인생은 장담할 수가 없으니.

-<혈투> 때 인터뷰에서는 밝은 이야기를 써보고 싶다고 했는데 이후에 <신세계>를 만들었다. (웃음)
=밝으려고 노력하는 이야기는 여전히 쓰고 있다. (웃음) 그런데 밝을지 안 밝을지는 다 써봐야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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