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승완 감독의 <베를린>에 대한 반응을 지켜보면서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다. 감독이나 관객이나 모두 예상했던 지점에서 충돌하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 주변의 보통 관객은, 이를테면 한달에 영화 한두편 정도 관람하는 내 동생들 가족은 <베를린>이 무척 재미있는 영화라고 했다. 그러나 보다 전문적인 관객은, 포털에 영화평을 올리는 부지런한 관객까지 포함하여 <베를린>의 내러티브와 액션의 밀도와 독창성에 의문부호를 달았다. 개봉 전 류승완 감독을 만났을 때 그도 이런 반응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그는 야심이 많은 감독이고 그만큼 자기 자신에 회의가 많으며 박찬욱, 봉준호 등의 선배들에 대해 자격지심 비슷한 것이 있다. 지금까지 그가 만들었던 영화 가운데 가장 많은 예산이 투입된 <베를린>을 찍으면서 그는 제작기간 내내 시간과 불안감에 쫓겨 영화 한편, 책 한권 읽을 수 없었다고, 다른 사람에 비해 밑천이 부족해서 늘 뭔가를 충전해야 하는 자기처지에서는 최악의 상황이었다고 하소연했다.
호쾌한 액션영화, 그럼 된 것 아닌가?
류승완의 사적인 고백을 이 지면에 끌고 들어오는 것이 실례인 줄은 알지만, 나는 류승완이 자신의 그런 강박을 이제는 스스로 벗어던져야할 때가 아닌가 조심스럽게 생각한다. 그는 독창적인 것에 강박이 많지만 그럴수록 더 많은 영감의 원천을 외부에서 구한다. 실제로 그는 이미 충분히 많은 것들을 섭취했고 그 자신의 것이 된 것도 많다. 그는 그것을 인정받고 싶은데 여전히 그가 새 영화를 만들 때마다 보다 전문적인 관객은 그의 영화에서 기존 것들의 흔적을 끄집어내어 지적하고 싶어 한다. <베를린>의 경우에는 ‘본’ 시리즈와의 유사성을 사방에서 지적하고 있고 서사의 짜임새에 관해서는 액션영화인데 스파이 서스펜스 스릴러인 체한다고 적지 않은 이들이 비판한다. 타당한 지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좀 의아하게 생각한다. 이 영화를 먼저 본 어느 지인의 평이 내게는 가장 솔직하게 와닿았는데, 그는 이 영화가 호쾌한 액션영화였다고 칭찬했다.
그러면 된 것 아닌가? 호쾌한 액션이라는 말에는 다른 것들을 상쇄할 만한 장점이 있다는 뜻이 숨어 있다. 내러티브에 일정한 구멍이 있지만 그 구멍을 메워주는 액션의 질감과 밀도가 존경받을 만한 수준이라면 영화의 전체 완성도에서 상호보완적 기제로 작용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나는 <베를린>이 류승완 감독이 연출한 액션영화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장인적 기술을 발휘한 영화였다고 느꼈으며 적당한 지점에 캐릭터들의 내러티브에 묻힌 정서를 끄집어내는 데 탁월한 분출구 기능을 한다고 봤다. 특히 누구나 두번 볼 가치가 있다고 평가하는 영화 중반 액션장면이 그랬다(나는 실제로 두번 봤는데 이 장면은 여전히 재미있었다). 북한 공작원 표종성이 동료 공작원이자 아내인 련정희를 의심했다가 함께 함정에 빠진 것을 알아차리고 피신한 호텔에서 다시 그곳을 찾아내 쫓아온 적들을 피해 탈출하는 대목의 액션은 어떤 멜로드라마에서의 감정묘사보다 정교하게 액션을 통해 표종성의 마음을 보여준다. 서로 떨어져 탈출할 것을 결심하고 표종성이 련정희에게 권총을 줄 때 그는 소음기를 뗀다. 호텔 창문을 통해 탈출한 두 사람이 각자 다른 위치에서 도망치려 안간힘을 쓸 때 표종성을 노리는 적의 습격에 맞서 련정희가 총을 쏘고 그걸 본 표종성이 강력한 적과 공중액션을 벌이며 추락 하강하는 장면의 액션은 표종성의 몸을 따라 같이 내려가는 카메라의 움직임을 통해 극대화된다. 서극의 <순류역류>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이 장면은, 그 영화에서의 하강 움직임보다 훨씬 복잡하고 길게 설계된 액션을 통해 반복과 차이의 격차를 증명해야 하는 장르영화의 장인적 과제를 능숙 하게 이뤄낸다. 호금전의 대나무 숲 결투장면을 리안과 장이모가 따라해서 더 업그레이드하는 것처럼 이 장면에서의 류승완과 정두홍의 액션 연출 합은 추락하는 표종성의 몸을 따라, 그의 몸이 이리저리 부딪치며 겪는 고통을 동시에 전달하면서 그가 느끼는 후회와 낭패감과 절박한 생존욕구와 이겨내야 한다는 동물적 본능과 숙련된 방어능력을 온전히 관객에게 전달시킨다.
이어지는 장면, 납치당한 련정희가 탄 차의 옆구리에 표종성이 매달려 어떻게든 련정희를 구해보려고, 또는 련정희에 대한 자신의 탈색된 사랑을 억지로 증명하려고 애쓰는 표종성의 마음을 시각적인 쾌감에 실어 전해준다. 그 장면에서의 스턴트는 물론 감탄할 만한 찬탄감을 안겨주지만 교대로 편집된 표종성 역의 하정우의 상반신이 전해주는 감정은 그 액션의 밀도 속에 순순히 용해된다. 그는 후회하고 있으며 이미 늦어버린 운명에 저항하고 있다. 그가 북조선 공화국의 꼭두각시였다는 것을 너무 늦게 인지하고 련정희와의 부부 관계에 대한 충성을 증명해야 하는 순간은 너무 짧다는 것을 아는 절박감은 빠른 자동차 스턴트 액션의 속도에 실려 배가된다. 액션은 뭔가 표현하기보다는 반응해야 하는 연기 영역이고 그만큼 다른 측면에서 보면 순수 연기의 정점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여기서 맥락화된 액션의 정서적 영역은 자연스럽게 표종성과 련정희의 멜로드라마라는 장르의 자장 안에 포섭되지만 고난이도의 액션 연출 설계는 그 장르의 상투형이라는 굴레를 놀라운 형태로 벗어나 류승완 액션영화 자장 내에서 정서적 질감을 새겨놓는다. 이것이 독창성의 영역에 속하는 게 아니라면 무엇인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발산되는 서사
후반부 클라이맥스 장면에 대해서도 비슷한 얘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서사의 결산 지점에 이르러 표종성은 남한 요원 정진수와 협동하고 북한에서 온 권력자의 아들 동명수 일당과 베를린 교외 지역쯤으로 설정된 갈대밭에서 대결한다. 그 이전에 갈대밭에 위치한 외딴집 내부에서 벌어지는 집단 총격전이 있으나 두기봉의 <익사일>을 어쩔 수 없이 떠올리게 하는 이 장면은 이후에 벌어지는 갈대밭에서의 대결장면을 위해 찾아들어간 기능적인 연결단락이라고 생각한다. 마침내 벌어지는 갈대밭 대결에서 이들은 은폐 엄호가 불리한 지형에서 총격전을 벌이다 결국 총알이 다 떨어진 권총을 들고 맨몸 격투를 벌인다. 엄청난 폭발이 일어나도 아무도 달려오지 않는 외진 곳에서 그들은 외형상 거대해 보이지만 속절없이 스러지는 갈대밭을 무대삼아 그동안 자신들을 숨겨왔던 모든 것들을 내던지고 싸운다. 시각적으로 엄혹하고 스산한 기운을 풍기는 이 갈대밭 시퀀스는, 류승완 스스로 고백했듯이 마이클 리치의 <프라임 컷>에서 따온 배경 설정이지만 따로 남녀 주인공의 클로즈업 하나 배치하는 데도 인색한 류승완의 건조하고 굵은 화면 조합 속에서 그들의 인간적 정체성의 취약한 토대를 병풍처럼 그리는 효과가 있었다. 표종성은 결국 아내이자 동료인 련정희를 구하는 데 실패한다. 동명수는 최후에 이르러 느물거리는 이제까지의 태도에서 벗어나 살려달라고 악다구니를 벌인다. 정진수는 상부의 지원이 끊긴 상태에서 련정희의 죽음을 보며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이입 상태를 스스로 느끼고 뭐가 뭔지 정확히 맥락상 모르는 상태에서도 표종성과 련정희가 시스템의 희생자가 되었다는 사실에 분노한다.
이런 액션장면들은 일차적으로 배우들의 몸을 통해 발산된다는 점에서 일관되게 액션영화를 찍어온 류승완의 장인적 능력이 서사에 충실히 녹아들었다는 증명이라고 생각한다. 앞서 거론한 장면들은 영화 내내 일관되게 지탱해온 상호감시 시스템의 유지와 붕괴의 순환 속에서 인물들이 느끼는 무력감이 일시적으로 폭발하는 효과를 거둔다. 그건 류승완이 베를린이라는 도시에서 거창하게 주제적 명분을 걸고 찍은 영화의 서사적 공백을 메울 수 있을 만큼 인상적이다. 이 영화에서의 등장인물들은 각자 숙련된 그 방면의 최고 전문가임을 자부하지만 실은 자신들의 임무에서 지속적으로 실패를 맛보는 사람들이다. 적어도 영화에 플로팅된 연대기 내에서는 그렇다. 심지어 표종성은 자신의 아내인 련정희와의 관계에서도 실패한다. 그는 그녀가 자신과 조국을 배신하고 다른 선과 접촉하고 있다고 의심하게 되자 그녀를 미행한 이미지 자료를 보며 련정희의 입술 움직임까지 읽어내는 것처럼 관객에게 보이지만 그는 동명수의 각본대로 움직인 인형이었을 뿐이다.
스스로 실패하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과 결기에 사로잡힌 영화 속 등장인물들을 보여주면서 류승완은 아무것도 읽어내기 힘든 배우 전지현의 외모를 능숙하게 스크린에 끌고 들어와 서사의 동력을 작동시키는데, 특히 표종성이 련정희를 의심해 베를린 시내를 이동하는 그녀를 쫓는 미행장면에서 표종성 역의 하정우와 련정희 역의 전지현이 서로 겹치지 않는 시선을 관객에게 제시하며 서로 거리를 두고 이동하는 것을 쫓아다니며 이어붙인 추적장면의 리듬감과 분위기는 이국적이다. 그 장면에서 하정우는 표종성이 되고 전지현은 련정희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배우들에게 굳이 서사 내의 기능적인 대사를 시키지 않고도 그들이 등장인물로 스스로 걸어다닐 수 있게 하는, 하정우의 날렵하고 민첩한 걸음과 몸동작에 대비되는 전지현의 간결한 동작과 특징을 읽어낼 수 없는 표정이야말로 이 영화에서 보여준 가장 뛰어난 연기였다. <베를린>에서의 이런 지점들은 사건에 부착된 명시적인 서사의 기능들보다 관객이 일반적인 통로로 받아들이는 지점 외에 지극히 사소해 보이는 지점들에서 캐릭터의 특징들을 스크린에 외화시키는 보다 능란해진 류승완의 연출 재능을 보여준다. 배우들이나 관객이나 크게 의식하지 않고 뚜벅뚜벅 진행되는 사소한 장면들에서 포착되는 그 영화만의 공기가 이 장면에서 배어나온다.
시늉한다는 아쉬움은 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론, 그렇더라도 의문과 아쉬움은 남는다. <베를린>은 이야기의 부피, 감독이 보여주고 싶은 것에 비해 사건과 인물이 너무 많이 나온다. 외국의 첩보조직이 얽힌 사건의 초반 전개는 베를린이라는 도시의 공기를 실질적으로 가져오는 게 아니라 뭔가 시늉한다는 느낌이 강하다. 외국 배우들의 연기는 밀도가 확 떨어지고(우리가 그들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데도 그렇다) 근본적으로는 오래전부터 해외 로케이션 영화가 피하지 못했던 촌티를 어쩔 수 없이 드러낸다. 매우 세련된 완성도를 갖춘 이 영화에서의 결정적 하자로 남는 이 대목은 역시 시나리오에 있지 않았을까 추측하게 된다. 사건을 더 쳐내고 한반도 출신 사람들의 얘기에 집중해도 별 무리가 없는 설정이었을 텐데 이 영화를 근사한 스파이영화의 외관처럼 꾸미고 싶은 감독의 강박이 낳은 함정이었을 것이다.
류승완의 다음 영화에선 그런 강박이 없었으면 좋겠다. 어떤 장르의 영화를 만들 때 굳이 그 장르의 선배들을 떠올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이 영화의 경우엔 소설이나 기존 영화의 아우라가 필요없었다. 표종성과 동명수와 련정희에게는 우리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로컬영화적 캐릭터의 특성과 보편성이 있었다. 나는 그가 자기만의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 더 많은 외부의 것을 섭취하려는 욕심에 더이상 매달리지 않았으면 한다. 그는 분명한 자기만의 세상에 대한 태도가 있고 거기에서 사건과 캐릭터가 나오며 다른 감독들이 잘해내기 힘든 액션연출에 대한 노하우도 있다. 바닥까지 내려가 백지 상태로 지우고 자기 안에 있는 것을 끄집어내도 하나의 장르를 만들어낼 수 있을 만큼 그는 이미 충분히 뭔가를 섭취하고 충전했다. 적어도 바깥에서 보기엔 그렇다. <베를린>을 보며 새삼 류승완 영화의 고유성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뜻밖에도 사람들이 그 점에 대해 너무 박하거나 만만하게 보는 경향이 있다. 그의 영화의 고유성에 대해 다른 누구보다 류승완 그 자신이 더 확신을 가졌으면 좋겠다. <베를린>은 스파이 서스펜스 영화로는 미흡할지 모르지만 서사 장치로 그걸 풀어내기보다 액션 단락으로 끌고 가는 영화이다. <베를린>은 류승완의 가장 성공한 액션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