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아주 가느다란, 먹구름의 은빛 테두리
2013-03-15
글 : 김혜리

*2월7일 일기에 <플라이트>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링컨>의 포스터 이미지. 에이브러햄 링컨의 음성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이제 대니얼 데이 루이스가 상상해서 창조한 음색과 그의 옆얼굴이, 내 머릿속에서 어린 날 읽은 위인전 속 흑백 사진을 별수 없이 대체하고 말겠지. 이렇게 영화가 또, 역사를 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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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잇 업!”(Black it up!)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에서 티파니(제니퍼 로렌스)에게 마지못해 이끌려 커플 댄스를 연습하는 팻(브래들리 쿠퍼)을 보며 친구 대니(크리스 터커)가 외치는 잔소리다. 실제로 극중에서 이 대사는 “흑인의 흥을 좀 넣어봐”라는 의미겠지만, “음영을 좀 넣어보자”라는 연출의 모토로 들리기도 한다. 비유하자면 데이비드 O. 러셀의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은 스모키 화장을 한 로맨틱코미디다. 주조연 가릴 것 없이 현대인이 앓는 신경증의 오케스트라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등장인물의 묘사는 톡톡 튀지만, 전체 로맨스 서사의 전개는 관습에 충실한 정석이다. 실체보다 인상이 도발적인 영화랄까. 브래들리 쿠퍼의 콧등에 자리잡은 얇게 베인 흉터라든가 제니퍼 로렌스의 가슴팍의 점, 검정 매니큐어 같은 자잘한 세부가 이 영화의 잔상 중 의외로 오래가는 이유도 같은 맥락일 터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으로 알고 있듯 대중영화의 기능에서 인상은 단순한 껍질이 아니며 때로는 모든 것이기도 하다.

본인도 만만치 않은 성격의 소유자로 소문났고 <쓰리 킹즈> <아이 하트 허커비> <파이터>로 ‘모난’ 캐릭터들의 앙상블에 일가를 이룬 데이비드 O. 러셀 감독이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에서 개인기를 실컷 발휘하는 대목은, 티파니와 팻의 로맨스보다 두 주인공의 가족- 특히 팻 솔라타노의 집- 을 형상화하는 대목이다(<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의 가족은 미국영화치고는 별나게도 한 동네에 옹기종기 모여 산다). 개인뿐 아니라 집단에도 성격이 있다. 누구나 아는 사람의 가정을 방문한 경험을 돌이켜보면 공감할 것이다. 모든 집의 응접실에는 특유한 냄새가 있고 식탁을 지배하는 리듬이 있다. 그리고 건드리는 순간 폭음이 나는 ‘방아쇠’가 있다. 이 가족적 기질은 1차적으로 유전에 의해 바탕이 형성되고 공동생활 경험이 낳은 각자의 방어 기제와 봉합의 노하우로 그럭저럭 완성된다.

명퇴 뒤 스포츠 도박에 몰두하는 팻의 아버지(로버트 드 니로)는 본인의 강박을 다스리기 위해 다른 식구를 동원하고 닦아세우는 가부장이다. 따라서 아버지의 내기가 실패할 때 나머지 가족은 위로할 기운을 내기보다 죄책감을 나눠 갖는 사태가 발생한다. 맏형은 나름대로 세속적 성공을 거둬 반쯤 집을 탈출했지만, 팻은 형에 대한 열등감까지 짊어지고 부모 곁에 주저앉아 아버지를 더욱 닮아간다. 다툼 끝에 팻이 “아버지나 저나 비슷해요!”라고 항의하자 아버지가 “그게 나쁜 거냐?”라고 응수하는 대목은, 이 소재에 대해 데이비드 O. 러셀 감독이 느끼는 매력을 짐작하게 한다. 한편 심약한 솔라타노 부인(재키 위버)은 발화점 낮은 아들과 남편의 성미를 평생 두려워하면서도 위기에 봉착하면 어떤 줄을 당겨야 파국을 막는지 아는 인물로 그려진다. “엄마가 그렇게 말했어요?” “니 엄마가 말 안 하디?”로 이어지는 영화 초반 솔라타노 부자의 대화를 바라보며, 기시감에 쓴웃음을 짓는 관객도 있으리라. 하지만 영화가 삶을 모방하는 것은 대략 거기까지다. 현실에서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의 대단원처럼 구성원 각자의 정신적 유약함이 요철을 맞추어 가족을 통합하는 확률은 희박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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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이트>의 유능한 여객기 조종사 윕 휘태커(덴젤 워싱턴)는 남몰래 알코올과 약물에 의존한다. 어느 날 마약으로 숙취를 깨우고 조종간을 잡은 그는, 기체가 치명적 고장을 일으키자 탁월한 조종술과 기적적 집중력으로 곡예비행을 해서 인명피해를 최소화한다. 사고는 윕의 혈중 알코올 농도와 무관하지만, 이어지는 의학적 검사와 법적 조사는 그의 만성화된 직업 윤리 위반을 만천하에 폭로하려고 한다. 동시에 윕에게는 잘못을 덮을 기회도 주어진다. 윕의 딜레마는 제도가 그를 단죄하려는 케이스와 실제로 그가 범한 과오가 직접 연결돼 있지 않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심지어 반문조차 가능하다. 약물이 부른 비정상적 각성이 윕의 영웅적 곡예비행을 가능케 한 건 아닐까? 사태와 무관한 자백으로 그가 누구보다 잘하고 사랑하는 생업을 잃는다 해서 이익을 보는 사람이 있는가? 조용히 반성하고 치유할 수 있지 않을까? 아무도 묻지 않기에 없는 셈 쳐지는 죄는 세상에 허다하지 않은가?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의 <플라이트>는 지난해 개봉한 이란영화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를 생각나게 한다. 두 영화의 느슨한 공통점은 옳은 것과 유익한 것과 아름다운 것을 한쪽에, 그른 것과 해로운 것과 추한 것을 다른 한쪽에 갈라 차곡차곡 쌓아올려 감으로써 갈등의 선을 깔끔히 정리하는 시나리오 작법을 따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런 여행에서 관객은 안전벨트를 풀 수가 없다. 다음에 어떤 에피소드가 터지고 인물들이 어디로 튈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실도 진실도 보풀투성이”라는 명제를 피하지 않고 대면한 난이도 상(上)의 드라마들이다. 그러나 두 영화가 여정을 맺는 법은 판이하다. 막판에 이르러 <플라이트>는 정답으로 착륙하고,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는 언제 연료가 떨어질지 모르는 불안을 끌어안은 채 허공을 선회한다. 나는 <플라이트>의 결정에 실망했다.

나는, 공개적으로 개과천선하기로 한 윕의 결정 자체가 불만인가? 결코 아니다. 클라이맥스로 돌아가보자. 윕은 충분히 벌을 면할 수 있었던 법정에서, 자기 생에 주어진 1인분 몫의 허위를 다 써버려 한마디의 거짓말도 더 얹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장면은, 장만옥이 마약중독 여성을 연기한 <클린>의 마지막 신을 불러낸다. <클린>의 뮤지션 에밀리(장만옥)는, 중독과의 느리고 긴 엎치락뒤치락 끝에 마침내 다시 노래할 기회를 얻는다. 낯선 스튜디오에서 불안하게 첫 트랙을 녹음한 그녀는 자판기 커피를 뽑다가 불현듯 삶이 맑아지는 조짐을 느낀다. 고통이건 쾌락이건 인생에서 양의 축적을 질의 변화로 전화시키는 마지막 0.001g. <플라이트>도 <클린>도 거기에 눈길을 준다. 그런데 <클린>은 그 순간에 멈추고, <플라이트>는 나아가 윕의 모범적인 수형 생활과 새로운 사랑과 회고록 출간까지 보여준다. <플라이트>의 종장에서 윕은 중독을 벗어나 승리에 갇힌 것처럼 보였다. (결정적 변수는 아니지만 <플라이트>는 실화를 소재로 하지 않은 픽션이다.) 나는 인물의 결단이 아니라 영화의 결단에 실망했던 것 같다. 영화는 어디에서 멈춰야 온당한가? 아니, 어디서 멈춤으로써 더 멀리 갈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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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이트>에 몰입한 까닭은, 오늘날 중독이 예외적인 불운이 아니라 만연된 증상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술, 쇼핑, 웹서핑, 폭식, 운동, 소모적 연애. 정상적 일상을 유지하며 사회를 작동시키는 많은 ‘시민’이 무엇인가에 의존해서 생활한다. 제한된 시간에 집중해서 과제를 수행하기에 높은 스트레스와 성취감이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전문직 종사자들이 더 중독에 취약할 수도 있다. <플라이트>는 유능한 파일럿인 주인공을 통해 중독자를 사회에서 낙오되고 격리된 폐인이 아니라, ‘괜찮은 척’에 능하고 임기응변으로 사회적 기능을 그럭저럭 감당하지만 내적으로 균형을 잃어가고 있는 인간으로 그려낸다. 중독이 가진 자기파괴적 측면을 조명한 영화는 많았지만 자기를 보존하려는 중독자의 제스처를 열심히 관찰한 영화는 많지 않았던 것 같다. 덴젤 워싱턴의 핏발 선 연기에서 나는 “아직까진 괜찮아, 아직은”이라고 애써 스스로를 설득하는 자화상을 본 게 아닐까.

좋아요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의 핼러윈 데이트

둘만의 첫 저녁식사. 남자는 여자에게 청탁이 있어 잘 보이긴 해야겠는데 로맨틱한 만남으로 오인받긴 싫어 궁여지책으로 시리얼을 주문한다. 오기가 난 여자는 홍차만 시킨다. 식당의 신경전으로 시작해 경찰이 출동하는 길거리 소동으로 이어지는 이 데이트가 실제였다면 유튜브 조회수 1위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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