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경우가 또 있을까. 자신이 참여한 두편의 영화가 같은 시기 극장가에서 맞붙는 경우 말이다. 프로듀서로 참여한 <베를린>의 흥행을 지켜보며 <신세계>의 제작자로서 한재덕이 느꼈을 법한 딜레마가 그런 것이었다. <베를린>이 700만 고지를, <신세계>가 250만 고지를 넘기며 승승장구하는 중이니 한숨 돌렸을 법도 하지만, 사나이픽쳐스 한재덕 대표는 윤종빈 감독의 신작 <군도>의 프로듀서로, 사나이픽쳐스의 차기작 <남자가 사랑할 때>의 제작자로 벌써 다음 고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올드보이> <주먹이 운다> <부당거래>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이하 <범죄와의 전쟁>), 그리고 <베를린>과 <신세계>까지, 충무로에서 제작되는 ‘사나이 영화’의 한복판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이 남자를 만나기에는 바로 지금이 적기라고 느꼈다.
-<신세계> 개봉을 앞두고 “기도 많이 하고 있다”고 했다. 11일 만에 250만 관객을 돌파하고 예매율 1위도 했는데, 소감이 어떤가.
=하느님이 보우하사…. (웃음) 정말 이번에 <신세계>가 잘 안되면 영화 관두려고 했다. 좋은 주연배우들이 세명이나 나오는데, 영화가 안되면 어쩔 뻔했나. 다행히 300만명은 넘을 것 같다. 청소년 관람불가라 수위도 <범죄와의 전쟁>보다 높은데, 관객은 거의 비슷하게 들고 있다.
-<신세계>의 흥행에는 좋은 기획이 한몫했다고 본다. 신인감독, 비주류 장르인 누아르영화라는 위험 요소가 있었지만 A급 배우와 스탭들의 노련함이 이러한 잠재적인 위험을 상쇄한 느낌이다. 제작자로서 어떤 고민을 했나.
=비유를 해보자면 이런 거다. 동대문 시장에 가서 A급 옷을 고르기는 힘들다. 그런데 백화점에 가면 아주 후진 옷을 고를 가능성은 줄어든다. 검증된 상품이 있으니까. 내 경험치로 봤을 때 스탭들이 A급이면 영화가 산으로 가는 일은 드물다. 거기에 ‘집에서 나올 때 자기 연기할 걸 도시락에 다 싸가지고 오는’ 좋은 배우들이 참여한다면 영화가 적어도 시나리오에 준하게는 나온다고 생각했다. 스탭들은 무조건 A급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에, 특히 정정훈 촬영감독에게 많이 빌었다. 정 감독이 당시 미국에서 <스토커> 색보정 작업을 하던 중이라 같은 촬영팀의 유억 촬영감독이 헌팅을 먼저 진행하고 정 감독이 나중에 합류했다.
-<올드보이> <부당거래> <범죄와의 전쟁>의 제작진이 두루 모였다. 다시 말해 지금 현재 충무로에서 가장 바쁜 스탭들인데, 어떻게 모을 수 있었나. 이들 세 작품을 함께한 당신과의 인연 때문인가.
=정정훈 촬영감독과 조영욱 음악감독, 조상경 의상감독은 <올드보이>에서 만났고 연출, 제작부는 <부당거래> <범죄와의 전쟁>을 함께했다. 친분 때문에 같이한 사람도 있을 테고, 내 뒤끝이 무서워 같이한 사람도 있을 거다. (웃음) 부탁했는데 안 들어주면 두번 다시 안 보는 성격이다. 예전에 예산이 너무 적어서 누군가에게 내가 큰 절 올리듯 부탁한 적이 있다. 배신은 안 하겠다고. 그런데도 투자를 더 받아오라는 말에 ‘넌 내 영화 인생에서 아웃이다’ 한 적도 있거든. 스탭들도 그걸 아는 것 같다. 마음에 담아두는 걸 고쳐야 하는데….
-배우 최민식의 합류가 황정민, 이정재의 캐스팅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들었다. 최민식과 오랜 친분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그 점이 캐스팅에 영향을 미쳤나.
=민식이 형과는 <올드보이>에서 PD와 배우로 처음 만났고, 그 이후로 친분을 쌓았다. 내가 남자이지만 많이 사랑하고 좋아하는 배우다. <올드보이> <주먹이 운다> <범죄와의 전쟁>을 함께해서 형이 내 작품을 믿고 출연하는 거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내가 하자고 하면 다 하는 게 절대 아니다. 평소 민식이 형에게 시나리오를 많이 가져다주는데, 거절당하는 시나리오도 많다. 다만 타율이 높을 뿐이지. <신세계>의 경우 박훈정 감독의 생일날 모인 자리에서 시나리오 얘기를 툭 던졌는데 민식이 형이 “그건 어떤 작품이야?” 하며 관심을 보였다. 그렇게 캐스팅이 성사됐다.
-최민식, 황정민, 이정재. 함께 모이기 쉽지 않은 배우들을 현장에서 지켜보는 느낌이 남달랐을 것 같다.
=정청(황정민)과 강 과장(최민식)의 첫 촬영분이 월드컵경기장에서 돈을 건네주는 장면이었다. 최민식, 황정민의 이름을 새긴 의자가 나란히 놓여 있는데 정말 뿌듯했다. 요즘 멀티 캐스팅 얘기를 많이 하지만, <신세계>는 멀티 캐스팅과는 거리가 있는 영화 같다. 사실 민식이 형과 황정민은 (작품) 노선이 비슷하다. 그런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이긴 힘들거든. 축구로 치면 같은 성향의 공격수를 한팀에 두는 건데 그런 경우가 잘 없잖나. 두 배우가 함께 앉아 있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더라고. 이렇게 두번은 못 찍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정재씨는 자기 분량이 없는데도 현장에 계속 왔다. 잘해야겠다는 부담이 굉장히 컸을 거다. 본인은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결과적으로는 베스트 캐스팅이었던 것 같다. 오프닝 크레딧에 이정재 이름이 가장 먼저 뜨는 건 내가 제안했다. 두 배우 사이에서 고생했고, 주인공이긴 하지만 배우로서 많은 걸 시도할 수 있는 역할이 아니었기에 정재씨에 대한 미안함이 있었다.
-<신세계>는 투자 과정이 쉽지 않았던 작품이라고 들었다. 박훈정 감독의 전작 <혈투>의 여파도 좀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훈정 감독에 대한 확신이 있었나.
=아무래도 본인이 쓴 작품이니 주변에서 잘 도와주면 웬만큼 찍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리고 알고 지낸 바에 따르면 보통 사람은 아니다. 독특한 자기 세계가 있다고 할까. 테크닉적 으로는 아직 모자란 부분이 없지 않지만, 기량은 영화 한편 두편 찍으면서 쌓이는 거니까…. 대본 쓰는 스피드도 빠르고, 작품을 거창하게 포장하지 않으려 하는 담백함이 장점이다. “당신 작품에 향기까지 있으면 대한민국 최고”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박 감독에게 말해줬다.
-<신세계>는 제작사 사나이픽쳐스의 창립작이다. 프로듀서로 활동하다가 어떻게 제작자로 나서게 됐나.
=처음부터 제작자를 하려던 것은 아니고, 그냥 제작 여건상 어쩌다보니 제작자를 맡게 된 것 같다.
-사나이픽쳐스를 설립할 당시 <베를린>의 프로듀서를 겸하고 있었다. 많이 바빴을 것 같다.
=촬영장을 왔다갔다 했다. <베를린> 독일 촬영은 펑크나면 큰일이었기에 촬영 내내 머물렀지만 <신세계> 준비하느라고 라트비아 촬영은 못 따라갔다. <신세계>의 삼광사 절 장면 찍자마자 보따리 싸서 <베를린> 한국 촬영지로 가고.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겠다. 여기 있으면 저쪽 현장 걱정되고, 저기 가 있으면 이쪽 현장 걱정되고. 이게 무슨 복인가. (웃음)
-지금도 윤종빈 감독의 <군도> 프로듀서와 사나이픽쳐스의 다음 작품 <남자가 사랑할 때> 제작자를 겸하고 있지 않나. 바쁜 걸 즐기나.
=예전에 집에서 1년8개월 놀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그저 감사하다. 불러줄 때 해야 되지 않겠나. 언젠가 사람들 이 안 찾을 텐데. 그런 비관주의가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한 것 같다.
-<베를린>의 경우 류승완 감독도 이처럼 큰 규모의 해외 촬영은 처음이었기에 프로듀서로서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았을 것 같다.
=예산문제가 가장 컸고, 무엇보다 독일은 문서가 중요했다. 공문서를 절차에 따라 엄격하게 결재받는 시스템이라 문서를 잘 챙겨야 했다.
-해외 촬영 67회차를 겪으며 어떤 노하우가 생겼을 법도 한데.
=해외 촬영을 잘할 수 있는 감독과 일을 하면 된다. 투자사에서 영화를 무사히 촬영하고 오니 한국영화의 모범사례는 <부당거래>이고 해외에서 촬영한 한국영화 중 모범사례는 <베를린>이라고 하더라. 그건 감독을 잘 만났기 때문이기도 하고, 제작팀이 일을 잘한 것도 분명 있다. 여러 번 얘기했지만, 할리우드에 가장 먼저 가야 할 사람이 류승완이다. 액션영화를 그렇게 빨리 찍을 수 있는 감독이 없다. (하)정우가 호텔에서 뛰어나와 총 쏘고 차에 매달리는 장면과 한석규 선배의 머리에 총 겨누는 장면을 8시간 만에 끝냈는데 절대 그렇게 못 찍는다니까.
-지금 준비하고 있는 <군도>는 어떤 점에 신경을 많이 쓰게 되나.
=손익분기점을 맞추는 것. 그리고 딱 한 가지 더 부탁했는데 말 타고 달리는 장면을 꼭 찍었으면 좋겠다고 (윤)종빈이에게 부탁했다. 나에겐 말발굽 소리가 주는 판타지가 있다. 도적떼들이 말발굽 소리를 내며 스크린을 덮치고, 그 위에 빨간색 한문으로 군도라는 글자가 새겨지는 것. 그것만은 하게 해달라고 감독에게 부탁했다. 그외에는 네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사나이픽쳐스의 차기작 <남자가 사랑할 때>는 어떤 작품인가.
=<신세계>의 정청보다는 덜 양아치인 남자(황정민)가 어떤 여자를 사랑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시나리오 속 어떤 장면에 꽂혀 제작을 결심하게 됐는데, 그 신을 황정민이 연기하는 걸 보고 싶은 마음이 커서 만드는 것 같다. 시대착오적인 영화일 수 있는데, 쿨하지도 않고. 그래도 세상 모든 아들들이 아버지에게 갖는 마음이 그 장면에 녹아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회사명은 어떻게 지었나. 지금까지 참여한 작품들을 보면 ‘사나이 영화’가 많긴 하다. (웃음)
=세 가지 안을 고민했다. 사나이픽쳐스 말고 앵그리픽쳐스, 영화사 1204호도 생각해봤다. 앵그리는 영화 만드는 게 힘들고 화가 난다는 의미고(웃음), 영화사 1204호는 내가 사는 아파트 호수다. 직원들에게 세 안을 놓고 투표하게 했더니 절대다수가 사나이픽쳐스를 뽑더라. 앞으로 내 밑에서 일하고 싶어 하는 스탭들이 많아지는, 그런 영화사가 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