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과 국가는 인간을 보호하는 울타리인 동시에 억압하는 굴레가 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선택의 대상이 될 수 없기에 더 폭력적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바바라>는 국가와 체제가 개인의 자유를 제한할 때 생기는 부조리에 초점을 맞추며 냉전시대 동독에서의 삶을 재현한다. 출국신청서를 냈다는 이유로 베를린에서 시골의 작은 병원으로 좌천당한 바바라(니나 호스)는 감시와 통제의 눈길 속에서 살고 있다. 그녀는 잠깐의 외출의 대가로 온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탐문과 알몸 수색을 받아야 한다. 서독에 있는 애인이 출장 올 때마다 첩보영화를 방불케 하는 긴장감 속에서 잠시밖에 볼 수 없다. 그녀에게 지금 여기의 삶은 사는 것이 아니라 버티는 것이며 여기 아닌 다른 곳에서의 삶을 위해 잠시 유보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그녀에게 이곳을 탈출하여 연인과 새 삶을 꾸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 삶으로 출발하기 직전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이 영화의 초점은 이미 종식된 정권과 체제에 대한 뒤늦은 비판이 아니다. 구체적인 시공간에 대한 강조나 당대 권력에 대한 고발이 최대한 소거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바라가 처한 상황은 국가나 권력 일반이 개인의 삶에 일정 수준 이상으로 개입하는 모든 조건에 대해 적용 가능하다. 이 영화의 관심은 통제와 감시가 어떻게 인간의 삶을 인간 이하의 것으로 끌어내릴 수 있는지에 대한 일반적인 고찰에 있다. 권력의 지나친 편중은 누군가와 사랑하거나 결혼하는 것도 목숨을 건 투쟁으로, 잠깐의 산책도 반국가적 행위로 해석될 여지를 만들며 폭로되어야 할 비위(非違)는 쥐도 새도 모르게 은폐되도록 만든다.
이 작품에는 기억은 갖고 있지만 감정을 잃어버린 ‘마리오’라는 소년 환자가 등장한다. 그는 영화의 배경이 되는 사회에 대한 은유처럼 보인다. 마리오와의 대화는 기능적으로는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그가 인간적으로 살아가기에는 무엇인가가 심각하게 결여되어 있다. 그것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사람은 의사가 아니라 소년의 여자친구다. 통제와 감시를 통해 국가의 효율성을 높이고자 할 때 그 사회가 결여하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먹고살 수 있기에 생존할 수는 있지만 그외의 모든 것은 척박하기 그지없는 상태에 이르는 것. 그러한 사회적 한계를 초극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에로스적인 사랑뿐 아니라 필리아, 파토스적 사랑까지. 특히 바바라의 마지막 선택은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이 영화의 답변이라고 할 수 있다. <바바라>는 사회의 부조리함을 소리 높여 강조하거나 인물이 처한 비극적인 상황에 감상적으로 동조하도록 만들지 않는다. 하지만 이 영화 울림은 바바라 역을 맡은 니나 호스의 연기처럼 잔잔하면서 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