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 같은 남자. 깔끔하고 도회적인 이미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스타. 바로 천만 배우에서 할리우드 스타로 거듭나고 있는 이병헌이다. 그는 외모부터 연기까지 언제나 딱 떨어지는 조각 같았다. 설혹 그가 인간적인 모습으로 대중에 다가오고 싶더라도 그 두터운 아우라는 좀처럼 걷히지 않는다. 언제 어디서 어떤 경우에도 빛나는 스타일 것만 같은 배우. 그런 그가 변했다. 최근 방송을 통해 한 몇번의 진솔한 고백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스타 이병헌, 배우 이병헌, 그리고 인간 이병헌. 때론 겹치고 때론 각기 다른 그 사이에서 진짜 ‘이병헌’을 보았다.
스타는 일종의 장르와 같다. 별다른 수식어 없이 이름만으로도 설명이 가능하며 얼굴만으로도 작품의 정서를 설명한다. 이병헌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당신의 머릿속에는 어떤 그림이 떠오르는가. 시원한 미소, 바른 몸짓, 조각 같은 몸매와 얼굴, 낮고 굵은 목소리. 거의 자유연상에 가까운 반응. 우리는 분명 그를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재밌는 건 거꾸로 이러한 이미지들을 아무리 긁어모아봐도 그 끝에 이병헌의 모습이 쉽게 그려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멋진 사람은 많아도 이병헌 같은 사람은 없다. 이 이미지들의 조각에는 결정적인 무엇이 빠져 있다.
연기, 흥행, 인기 모두를 갖춘 보기 드문 배우. 천만 배우에서 할리우드로 도약하고 있는 스타. 풀어서 설명하긴 쉽지만 그 어떤 설명을 덧붙여봐도 ‘이병헌’ 세 글자보다 더 명확하게 다가오진 않는다. 이병헌이라는 이름이 가진 고유성. 오랜 시간 스크린에서 차곡차곡 쌓아온 이미지들을 후광처럼 두르고 있기 때문이겠지만 철통같은 자기 관리 덕분에 자연인 이병헌의 향기가 거의 새어나오지 않는 탓이기도 하다. 견고하게 다듬어진 반듯한 인상. 조각 같은 남자. 그렇다. 조각. 그를 설명하기에 이만큼 적합한 단어도 없다. 깎아놓은 듯 멋지지만 어딘지 거리감이 느껴지는, 하늘 위에 떠 있는 별. 그런 그가 요즘 변하기 시작했다.
겸손 이면의 여유
아마도 그는 최근 가수 싸이 다음으로 가장 바쁜 남자일 것이다. 할리우드에서 <지.아이.조2>의 촬영을 끝내고 돌아와 바로 <광해, 왕이 된 남자>(이하 <광해>) 촬영에 들어갔고, <광해>를 찍으면서도 <지.아이.조2> 추가 촬영을 하러 할리우드를 오가야만 했다. <광해>가 끝나는가 싶더니 바로 할리우드로 날아가 <레드2>를 찍었고 <광해>가 1천만 관객을 돌파한 덕분에 한국으로 돌아와 숱하게 감사의 무대인사를 다녔다. 그리고 이번엔 3D 컨버팅 일정으로 개봉이 연기되었던 <지.아이.조2>의 홍보를 위해 전세계 무대를 돌아다니는 중이다. 이 살인적인 홍보 일정이 끝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레드2> 홍보를 위해 비행기를 타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인터뷰를 준비하는 그 짧은 틈에도 어느새 자신에게 들어온 시나리오들을 검토하고 있는 남자. 넌지시 물어보니 어제 10시간의 방송 촬영을 마치고 오늘 새벽부터 다시 10시간이 넘도록 릴레이 인터뷰 중이란다. 별은 점점 높아져만 간다.
이상한 건 이렇게 그의 위상은 점점 높아져감에도 이병헌이란 배우는 그 어느 때보다 친숙하게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몇년 만에 인상적인 코미디 연기를 선보인 <광해>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몇년 만에’라는 표현처럼 그는 원래 코미디 연기가 낯선 배우가 아니다. 데뷔 초 그를 스타로 만들어준 드라마 <내일은 사랑>(1992)은 물론이거니와 고 최진실과 함께 연기했던 영화 <누가 나를 미치게 하는가!>(1995)에서도 제대로 망가진 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공동경비구역 JSA>(2000)를 시작으로 <중독>(2002), <누구나 비밀은 있다>(2004), <쓰리 몬스터>(2004), <달콤한 인생>(2005)에서 묵직하고 세련된 역할을 연이어 맡으며 분위기가 일변하였지만 그의 근본에는 여전히 시원스럽게 웃던 해맑은 시골 청년의 순박함이 묻어 있다. 지난해 <광해>로 우뚝 서더니 몇 개월 만에 <지.아이.조2>로 한국영화의 도전자가 되어 돌아왔다는 농담을 “한국영화를 사랑하셔야 하지만 내가 나온 할리우드영화는 사랑해주시라”고 받아치는 넉살이 낯설지 않은 이유다.
천만 흥행에 이어 할리우드 진출로 한껏 들뜰 법도 하건만 그는 차분함을 잃지 않았다. <지.아이.조2>의 존 추 감독과 브루스 윌리스의 칭찬을 전하자 “과찬이다. 그저 상대방에 대한 좋은 느낌을 잘 표현해준 것 같다”며 몸을 낮춘다. 할리우드에서의 위상을 직접 체험하고 있느냐는 말에 “아카데미 시상식 전에 하는 여러 행사 중 ‘더 나이트 비포 파티’라는 큰 파티에 참석한 적이 있다. 거기서 브루스 윌리스를 마주쳤는데 보자마다 나를 안아주더라. 그 자리에 혼자 외롭게 서 있던 유일한 동양인이었는데 그가 안아주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다”는 일화를 들려준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세례보다 따뜻한 포옹 한번을 더 가슴 깊게 새기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어쩐지 풋풋한 신인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다. 성공적인 할리우드 진출이라는 수식어에 대해서도 겸손한 자세로 손사래를 친다. “아직 한참 멀었다. 인기는커녕 알아보는 사람도 거의 없다. (웃음) <지.아이.조2>에서는 마스크를 많이 벗고 나오니 이제 좀 알아봐줄까. 현장에서도 이제 겨우 조금 편해진 정도다. <지.아이.조> 때는 현장 분위기를 따라가기에 급급했지만 이젠 어느 정도 주변이 보인다”라며 신중한 태도를 보인다.
그럼에도 도전과 흥분
하지만 그가 할리우드에서 착실히 입지를 다져나가고 있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이병헌이 맡은 스톰쉐도우는 1편에 비해 확실히 비중이 늘었고 <레드2>에서는 액션보다 드라마가 더 인상적일 거란 후문이다. “<지.아이.조2> 역시 각 인물의 드라마에 상당한 시간을 할애한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스톰쉐도우를 맡았던 이병헌의 역할, 연기력, 무엇보다 그의 영어 연기 표현력이 한몫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제작자 로렌조 디 보나벤투라 역시 영어로 대화를 하는 것과 연기를 하는 것은 다른 문제라며 <지.아이.조2>에서 그의 영어 실력이 비약적으로 향상되었음을 극찬했다. 이제 할리우드에서도 얼마든지 드라마를 소화할 수 있는 배우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도 여기에 대해서만큼은 그동안의 어려움과 노력을 숨기지 않았다. “대사를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어 내 안에서 터져나오게 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하물며 다른 나라 말인데 오죽 하겠는가. 나아졌다고는 생각하지만 막상 그들이 들을 때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말하기 위한 시간, 노력은 당연히 필요하다. 아직 계속 다듬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관계자들의 연이은 칭찬을 쑥스러워하는 순박한 청년의 얼굴과 지독한 프로근성으로 스스로를 다듬어가는 조각 배우 이병헌의 모습이 겹쳐지는 순간이다.
한편으로는 아쉬움도 있다. 아직은 할리우드에서 동양 배우가 맡을 수 있는 역할은 여전히 한정적이다. “이제 액션과 관계없는 시나리오들도 한편씩 들어오는 단계”라며 짓는 뿌듯한 미소 이면에는 한/미 양쪽을 오가는 연기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함께 묻어난다. “미묘한 정서의 차이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광해>와 <레드2>에서의 웃음은 전혀 다른 종류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결코 주눅들거나 기세에 눌린 인상이 아닌 이유는 흥분과 기대만큼이나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냉철함이 그 안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아이.조>가 전체적인 것을 설명하는 부감숏의 영화였다면 <지.아이.조2>는 인물들을 클로즈업한 이야기다. 감정적인 것들을 보여줄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좋았다. 하지만 가볍게 즐기는 팝콘무비인데 심각하게 감정적인 폭발을 보여주는 게 괜찮은지에 대한 걱정도 있다.”
행동 하나하나에서 절제된 자기 관리를 느낄 수 있는 이 다듬어진 스타는 할리우드라는 새로운 도전의 장에서 다시 신인의 마음을 배우는 중이다. 새로운 무대에 발을 디딘 신인으로서의 도전과 흥분은 22년차 노련한 배우로서의 엄격한 자기 관리하에서 다듬어진다. 스타 이병헌을 조각해나가는 배우 이병헌. 뜨겁고 차가운 두개의 심장을 움켜쥔 그 사이로 인간 이병헌의 차분한 눈빛이 밝게 빛난다. 요즘 그가 부쩍 친숙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아마도 거기 있지 않을까. 별은 높아져 가지만 점점 더 빛나는 까닭에 그 빛이 더이상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