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인생은 짧고 러닝타임은 길다
2013-03-29
글 : 김혜리

▲어른들은 동화의 수위를 염려하지만 아이들은 동화에서 장차 삶에 그들을 기다리는 공포와 그로테스크, 죽음을 다루는 예행연습을 한다. <오즈 그레이트 앤드 파워풀>의 시각효과 중 단연 사랑스러운 도자기소녀는 다리가 바스라진 채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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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블TV에서 방영한 <코드명 제로니모>를 시청하다 집중에 실패하고 채널을 돌린 적이 있다. 똑같이 오사마 빈 라덴 사살 작전을 소재로 취한 <제로 다크 서티>는 취재에 기초한 르포르타주의 성격이 강한 영화라곤 하지만, <코드명 제로니모>와 대조적으로 고도의 영화적 쾌감을 주는 엔터테인먼트이기도 하다. 주인공 마야(제시카 채스테인) 또한 실제 CIA 요원을 모델로 한 인물인 동시에 엄연히 영화적 캐릭터다. <제로 다크 서티>를 보며 인식한 한 가지는 마야의 성별이 ‘전혀’라고 할 만큼 이슈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미인이지?”라는 직장 동료들의 언급이 일회적으로 지나가는 정도다. 여성이기 때문에 조직에서 받는 차별도 눈에 띄지 않는다. 캐스린 비글로 감독은 현실성을 약간 해친다고 느낄 정도로 제시카 채스테인의 외모를 고혹적으로 보여주지만, 영화 속 남성 정보국 직원과 군인 중 누구도 그녀에게 이성으로서 접근하는 일화를 넣지 않았다. 그렇다고 마야가 ‘G.I. 제인’ 같은 여전사 캐릭터인 건 또 아니다. <제로 다크 서티>에는 기묘한 무성성이 감돈다. ‘여성 감독’으로 묶이는 일을 극도로 싫어하는 캐스린 비글로의 습성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고 보면 이 영화의 배급 책임자는 소니픽처스엔터테인먼트 공동대표 에이미 파스칼이고 제작비 4500만달러를 제공한 투자자는 데이비드 O. 러셀, 폴 토머스 앤더슨 등의 영화 제작에 나서온, 오라클사의 20대 상속녀 메건 엘리슨이다. 10년 전쯤이라면 여기저기서 ‘여성 파워’라는 키워드로 기사화됐을 법한 이 사실도 덤덤히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다.

<제로 다크 서티>가 마야의 개인사와 성격을 다루는 태도도 무뚝뚝하다. 인생의 10년을 오사마 빈 라덴이라는 한 사람의 추적에 송두리째 바친 이 여성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관객이 궁금해하건 말건 영화는 그녀의 가족이나 연애에 관한 정보를 생략한다. 직접 시청하지는 못했으나 <제로 다크 서티>와 흔히 비교되는 <HBO> 인기시리즈 <홈랜드>의 CIA 요원 캐리(클레어 데인즈)는 조울증을 앓는 여성으로 설정돼 있다고 한다. 그러나 마야에겐 정신적 결핍에 대한 보상으로 업무에 몰두한다는 암시가 따라다니지 않는다. 고교를 졸업하자마자 정보국에 채용됐다는 짤막한 대사가 모종의 드라마를 상상하게 하지만, 영화는 그 이상 파고들 의사가 없다. 한마디로 마야는 순전히 하는 일로 규정되는 캐릭터다. 즉, 남자와의 관계로 정체성이 정해지는 구식 여성 인물이 아니다, 라고 깔끔히 정리하고 싶지만 따지고 보면 남녀 불문하고 영화에서 마야처럼 인물 묘사에 타인과의 관계라는 변수가 제거된 캐릭터는 드물다. 제이미 리 커티스가 연쇄살인을 수사하는 신참 형사를 연기한 비글로의 1989년작 <블루 스틸>과 비교해 보면 시대와 감독에게 일어난 변화를 실감할 수 있다.

자, 이쯤에서 나는 부지불식중에 내가 시사회장에 챙겨갔을지도 모르는 선입견을 점검하게 된다. 비단 마야만이 아니라 <제로 다크 서티>의 대다수 등장인물은 감상(感傷)을 멀리하고 허튼짓을 용납하지 않는다. 여자건 남자건 행동 목표가 분명하고 냉철한 인물이 비글로 감독의 취향이다. 그녀는 취재과정에서 마야의 모델이 된 CIA 요원을 만났을 때 “그녀가 여자라서 더 신나지도 않았고 멈칫하지도 않았다”고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만약 캐스린 비글로 감독이 남성이었다면 나는 그녀의 영화평에 자주 따라붙는 “마초적인 연출”이라는 전제에 지금처럼 무난히 동의할 수 있었을까? 마야가 남성 요원이었다면, 나는 과연 이 캐릭터의 1차적 특징을 독하고 냉정한 일 중독자로 파악했을까? 논의되는 인물이 여성일 때 혹시 우리는 사랑과 슬픔만 감정으로 인정하는 습관에 길들여진 게 아닐까? 집착이나 분노도 감정의 일환이라는 걸 잊은 건 아닐까? 영화에서 마야는 부임 직후 고문이 포함된 취조를 보며 동요하고, 나중에는 테러로 죽은 동료와 찍은 사진을 보기 힘겨워한다. 상부의 지원이 끊긴다는 소식에 폭발해 상사를 들이받기도 한다. 반대로, 귀국 수송기에 올라탄 그녀의 뺨에 흐르는 눈물에 내가 그토록 당황한 까닭은 강한 여자 캐릭터가 끝에 가서 무너지면 낭패라는 강박 때문은 아니었을까. 돌아보건대 내겐 분명히 편향이 있었다. 수첩에 끝까지 남겨두어야 할 질문은 다음과 같다. <제로 다크 서티>는 얼마나 의도적으로 무성적 접근을 취했을까? 만일 감독의 전작 <허트 로커>가 남성 인물들에게 특유한 문제들을 들여다본 만큼 <제로 다크 서티>가 여성성에 눈길을 던지지 않았다면, 캐스린 비글로의 선택에는 어떤 요인이 작용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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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아침부터 커피 한 주전자와 과자 봉지를 끌어안고 TV 앞에 앉았다. 제니퍼 로렌스가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으로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앤 해서웨이가 <레미제라블>로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두 배우는 <007 스카이폴>의 주제가상 후보 아델과 더불어 올해 오스카에서 제일 수상이 확실한 후보로 거론돼왔는데 이변 없이 수상했다. 해서웨이와 로렌스의 소감이 자못 대조적이었다. 호평과 동떨어진 세월을 꽤 오래 견뎌온 배우 앤 해서웨이는 트로피를 바라보며 “정말 이루어졌네?”(It came true!)라고 촉촉한 음색으로 속삭였다. 반면 스물다섯도 되기 전에 두 번째 주연상 노미네이션을 받고 내처 상까지 받아버린 로렌스는 단상으로 올라가다 드레스 자락을 밟고 엎어졌다. 벌떡 일어나 마이크를 잡은 그녀는 어쩌다보니 기립한 장내의 영화인들에게 “제가 넘어진 게 딱해서 다들 일어선 거죠?”라며 손을 휘휘 내젓더니 마침 생일을 맞이한 같은 부문 후보 에마뉘엘 리바(86)에게 “맞다. 해피 버스데이, 에마!”라고 인사를 날리고 퇴장했다. 누가 보면 개근상이라도 탄 줄 알 지경이다. 해서웨이의 소감이 너무 멜로드라마틱하게 연출됐다거나 로렌스가 지나치게 경박하다고 못마땅해한 시청자도 있었겠지만, 나는 두 배우가 영광을 취급하는 방식이 각기 연기 스타일과 잘 어울려 구경하기 즐거웠다. 토를 달자면 딱 하나다. 앤 해서웨이가 <레미제라블>이 아닌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캣우먼 역으로 상을 탔다면 이상했을까? 제니퍼 로렌스의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연기는 <헝거게임: 판엠의 불꽃>의 그것보다 정말 훌륭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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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책장에 꽂혀 있는 <영화 관객 지침서>의 속표지에는 “영화의 상영시간은 인간 방광의 내구성에 정확히 상응해야 한다”는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의 말이 이탤릭체로 경건히 인쇄돼 있다. 이 페이지를 새삼 펼쳐본 것은 최근 체력의 한계를 시험받아서다. <호빗 : 뜻밖의 여정>의 러닝타임이 169분이었고 <레미제라블>은 158분이었다. 157분 길이 <제로 다크 서티>와 150분의 <링컨>은 같은 날 연달아 기자 시사를 가졌다. 다행히 두 영화는 1분도 러닝타임을 낭비하지 않았다. 그래도 시청각 정보의 밀도가 보통 영화의 1.5배를 웃돌았기에 탈진은 불가피했다. 이어 개봉하는 <장고: 분노의 추적자>의 상영시간은 165분이란다. 이 와중에, 영국 영화평론가 스콧 조던 해리스의 블로그에, 과거 러닝타임 긴 영화에 삽입됐던 중간휴식(intermission)을 부활시키자는 포스트가 올라왔다. 그는 중간 휴식이 영화의 리듬을 깬다는 우려에 대해,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처럼 아예 휴지기를 고려해 편집하면 흐름도 해치지 않으면서 화장실행과 피로로 흩어지는 관객의 주의도 다잡을 수 있다고 제언한다. 한편, 1일 상영횟수가 줄어 발생하는 극장의 손해는 휴식 중 늘어날 스낵 판매로 충당하고, 육체적 고역이 두려워 아예 극장을 기피하는 관객도 유인할 수 있을 거라는 가설을 덧붙였다. 아, 이 제안이 왜 이리 솔깃할까. 서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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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고: 분노의 추적자>의 KKK단 복면소동

저렇게 헐렁한 복면에 대충 뚫은 구멍으로 앞이 제대로 보일까? 부딪히거나 넘어지기 십상 아닐까? 쿠엔틴 타란티노는, 누구나 한번쯤 무심코 떠올렸을 법하지만 아무도 입에 올리지 않았던 KKK단 복장의 우스꽝스러움에 착안해 어이없는 그들끼리의 설전을 연출한다. <저수지의 개들>의 ‘마돈나 토크’에 박장대소한 관객이라면 반가울 장면이다. 자중지란을 타란티노만큼 잘 쓰는 작가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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