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보니 요즘 태일과 자주 영화를 보게 된다. 평일 낮에 극장을 어슬렁거릴 수 있는 한심한 친구가 드물기 때문이다. 태일은 아직도 인디밴드에서 베이스를 연주하는 동갑내기다. 당연히 음악으로 먹고살기는 불가능해 틈틈이 인맥을 동원해 작은 행사- 예를 들면 지방 도시의 소규모 축제 무대- 같은 것을 기획하기도 하는데, 역시 넉넉한 벌이가 되진 못한다. 하여 늘 돈에 쪼들리나 어찌된 일인지 나에게 빈대 붙을 때만은 미안한 기색 하나 없다. 다른 곳에선 그 잘난 자존심 때문에 다 된 일도 그르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친구를 알게 된 지 이십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아직 그 말투에 익숙해지질 않는다. 상대에 대한 배려가 거의 없고, 하고픈 말은 무조건 내뱉고 본다.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게 워낙 많아서 말싸움을 하려 해도 쉬이 상대가 되질 않는다. 결국 둘이 얘기하다 보면 나는 주로 듣는 편이 되고 만다. 혹은 목소리 좀 낮추라며, 남들이 듣겠다며 주위를 둘러보는 난처한 상황에 빠지거나.
그리 내키지 않는데도 그와 한두주에 한번씩 영화를 보러 다니는 사이가 됐다. 뭐 그게 죽을 만큼 싫은 일이었다면 애초에 내쪽에서 어떤 핑계든 댔겠지만. 일은 그의 질문으로 시작됐다.
“야, 이적, 너 공짜로 영화 볼 수 있는 카드 있다며?”
그는 꼭 나를 이적이라고 부른다. 적아, 적이야, 저기요도 아니고 굳이 이적. ‘너는 주류의 알려진 가수고 나는 인디뮤지션이야’라는 걸 명확히 하려는 의도로 들린다. 그 뒤엔 ‘주류는 쪽팔린 거고 인디는 쿨한 거야’란 문장이 암묵적으로 따라붙겠지.
“어, 뭐, 스타… 카드라고, DGV에서만 되는 거야. 하루에 두장 공짜.” “야, 한국에 DGV 없는 동네가 어딨냐. 연예인이 벼슬이네. 그거 나랑 좀 쓰자. 전화하면 나와.”
농담인 줄 알았는데 바로 이틀 뒤 그가 전화를 했고 그길로 엮여버렸다.
지난 월요일에 함께 본 영화는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장고: 분노의 추적자>(이하 <장고>)였다. 재미있다는 평이 대세인데도 의외로 상영관 찾기가 쉽지 않았다. 강남의 상영관을 겨우 찾아 들어가니 객석엔 우리 외에 단 한명의 관객밖에 없었다. 대낮이어서 그런가.
“그게 아니라 이제 한국 관객은 자막 있는 영화 귀찮아서 싫어해. 너 미국 관객이 그렇다는 얘기 들은 적 있지? 한국 사람들도 게을러진 거지. 한국영화 잘되니까 좋은 일 같지만 사실은 위험해 이거. 익숙한 것만 찾다보면 뻔한 것만 남는다고. 역(逆)스크린쿼터라도 해야 되는 거 아닌가. 외국영화 지키자며 한국영화 상영관에 뱀이라도 풀까.”
팝콘을 튀기며 키득거리는 그에게 그래도 <아이언맨3> 개봉하면 대박치지 않겠냐고 따지려다 말았다. 잘못하면 영화 시작한 뒤까지 긴 강론을 들어야 하니까.
세 시간에 달하는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속도감있게 진행됐고, 우리는 롤러코스터에서 내린 듯 목을 꺾어 우두둑 소리를 내가며 극장을 나왔다. 태일은 맥주라도 한잔해야 되지 않겠냐고 호기롭게 내 어깨를 쳤다. 자신이 사는 것 같지만 당연히 뒤풀이까지 전부 내 부담이다. 풀코스 접대시키는 게 내 품위 세워주는 거란다.
자리에 앉아 500cc 잔을 들자마자 참았던 그의 말이 봇물처럼 쏟아진다.
“이게, 영화 전체가 그 디카프리오 대사에서 착안된 것 같더라고. ‘그 많은 흑인 노예들이 왜 주인을 죽이지 않을까’ 하는 질문 말이야. 타란티노 입장에선 그게 열라 궁금한 거지. <바스터즈>도 왜 유대인들이 나치에게 개기지 않았을까 하는 질문에서 시작된 것처럼, 이번에도 자기 식으로 가상의 역사극, 복수극을 만들어서 ‘아니 도대체 왜 이렇게 안 했냐?’ 하는 질문부터 대답까지 짜잔 보여주는 거야. 아주 짜릿하게, 막 오금이 저리게.” “난 약간은 불편하더라. 역사적으로 무겁고 예민한 주제를 이렇게 말초적으로 풀어가도 되나, 이게 재미 말고 무슨 의미가 있나, 타란티노에게 역사의식을 기대하는 건 무리일까 하는 생각이 계속 들어서.” “야, 이적, 그러니까 넌 평생 범생이를 못 벗어나는 거야. 의식은 다른 데 가서 찾아. 그걸 왜 타란티노한테 달래? 타란티노는 사람들 마음속 깊이 있는 본능적인 복수심을 밖으로 꺼내줄 뿐이야, 배 갈라 내장 꺼내듯이. 왜 뉴스에서 잔혹한 연쇄살인마 보면 능지처참해서 죽이고 싶잖아? 실제로는 불가능하다고. 우리한텐 법이니 인권이니 지켜야 할 게 잔뜩 있으니까. 중동 무슨 나라처럼 친구를 칼로 찔러 반신불수로 만든 죄인한테 반신불수형을 내릴 수가 없잖아. 헌데 영화에선 가능해. 제일 나쁜 새끼를 보여준다, 우리 마음속 분노가 쌓여 부글부글 끓다가 마침내 폭발할 때쯤 제일 잔인한 방법으로 그놈을 작살낸다, 으아, 통쾌해! 이게 요즘 타란티노 무비의 핵심 아니냐? 대리만족, 대리배설, 대리사정?” “그건 말하자면 포르노가 하는 일이지.” “포르노면 어떠냐? 섹스엔 포르노, 인생엔 영화야. 영화 자체가 관음증 판타지, 일종의 포르노라고. 타란티노가 제일 솔직해 그러고 보면.”
낮술이 몇잔 더 도니, 태일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얘기가 조금 더 나아간다.
“그러니까, <26년> 같은 영화를 타란티노가 만든다고 생각해 봐. 말 그대로 대가리 터지고 피 솟구치고 책임자들 모아놓고 벌이는 복수의 대량살육 신이 등장할 거라고. 그걸 보고 관객은 환호하고, 이야, 록 페스티벌같이, 어? 그게 나빠? 극장 안에서라도 한번 그렇게 으악 지르고 좀 풀어야 되는 거 아니냐? 우물쭈물 가해자도 생각하고 피해자도 생각하고 정의란 무엇인가도 생각하다 보면 벌써 김 팍 새버려. 타란티노는 그런 거 싫어해. 싫어해도 너무 싫어해. 영화는 쇼다, 여기서만은 이것저것 재지 말고 쇼처럼 한바탕 놀아보자 이거야. 민감한 문제? 무협영화처럼 서부영화처럼 시원하게 제껴버려 그냥. 이보다 더 좋은 오락물이 어디 있냐?”
나도 잠자코 밀릴 수만은 없다.
“하지만 스파이크 리 같은 흑인 감독이 <장고>를 만든다면? 오락물로 느껴질까? 어마어마한 논쟁을 불러일으키지 않을까?” “그럼 진짜 한판 붙자는 걸로 들리겠지. 타란티노가 흑인이 아니니까 이런 영화를 얄밉게 만들 수 있는 거 아니겠냐. 그러고 보니 <트루 라이즈>에서 데니스 호퍼가 죽기 전에 읊던 ‘시칠리아인들에게 흑인 피가 섞여 있다’는 대사가 생각나네. 타란티노가 각본 썼었지?” “<트루 로맨스>야. 맥락도 다르고. 어쨌든 첨예하고 민감한 주제들은 그만큼 조심스럽고 깊이있게 다뤄야 한다고 생각해. 그러지 않으면 개운해지기는커녕 더 응어리질 수 있어.” “아이고, 그럼 이적님 너는 계속 그런 거 하세요. 어느 쪽에서도 욕먹지 않는 우아한 거. 예술로 승화된 살풀이 뭐 그런 훌륭하고 아름다운 거 있잖아. 찌질한 새끼.”
오늘도 내가 먼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대체 난 이 친구와 왜 계속 영화를 보고 떠들어대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