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로마에서 처음 만난 사람은 키가 크고 피부가 거무스름한 이탈리아 미남… 사기꾼이었다. 공항에서 사냥감을 물색하던 그는 내게 다가와 기차가 끊겼다며 괜히 밖에 나가서 바가지 쓰지 말고 자기 택시를 타라고 말했다. 내일이 노동절이어서 직원들이 일찍 퇴근했다는 것이었다. 아, 이탈리아는 휴일 전날부터 쉬는구나, 좋은 나라구나… 는 개뿔, 하마터면 설득당할 뻔했다. 와락 겁을 먹은 나는 처음으로 가이드를 따라다니며 여행이 아닌 관광을 했다. 우디 앨런의 <로마 위드 러브>를 보며 떠올린 관광의 추억. 그래서 뽑아봤다. 영화 찍으랬더니 관광 다녀온 영화 다섯편이다.
<버킷 리스트: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들> 만리장성, 대피라미드, 세렝게티
감독 61살, 주연배우 1번 70살, 주연배우 2번 70살. 세 노인네가 남의 돈으로 효도 관광을 떠난 김에 영화도 한편 찍었으니 바로 <버킷 리스트: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들>이다. 죽음을 앞둔 노인들이 나오는 이 영화를 보며 진정 감탄했던 것은 그들의 체력이었다. 잭 니콜슨과 모건 프리먼은 30일 만에 유럽 17개국을 주파하고 돌아오는 대학생 배낭여행객이 부럽지 않다. 만리장성에 들러 모터사이클을 타고, 기자에서 대피라미드에 올라간 다음, 세렝게티에서 총을 한방 쏜다.
<섹스 앤 더 시티2> 아부다비
아부다비 관광 재벌이나 관광청이 제작자에게 제안한 것이 아닐까, 돈 걱정은 하지 말고 아부다비에서 영화나 한편 찍으시죠. 그렇게 의심할 수밖에. <섹스 앤 더 시티2>는 147분짜리 거대한 PPL이다. 아주머니 네명이 뉴욕에서 브런치 먹다가 아부다비로 관광 가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도쿄의 특급 호텔
영화를 보고 나온 여자들은 분노했다. 그 비싸다는 신주쿠 하이엇호텔에서 남편이 벌어오는 돈으로 편하게 놀기만 하면 되는데, 저 여자는 뭐가 부족해서 매일이 불만이요 고독이란 말인가!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는 도쿄 시내를 한가롭게 돌아다니고 스키야키도 먹고 그러다 지치면 교토도 다녀오는 영화지만, 무엇보다 날마다 호텔에서 자는 영화다. 호텔, 침대 시트는 빳빳하고 욕조에서는 빛이 나고 밥은 갖다주고 청소는 해주는 곳, 한마디로 게으름뱅이의 지상낙원. 나는 영화를 보고 집에 돌아가 손수 침구를 갈고 새로 빤 베갯잇에 뺨을 댔다. 쓸쓸했다.
<미드나잇 인 파리> 파리
1965년 <What’s New, Pussycat?>을 파리에서 찍었던 우디 앨런은 다른 사람들이 파리에 남아 노는 동안 홀로 미국으로 돌아왔다. 스물아홉살의 앨런은 소심했다. 낯선 도시가 무서웠다. 하지만 두고두고 후회했다. 그리고 45년이 지난 2010년, 앨런은 회심의 파리 관광영화를 찍었다. <미드나잇 인 파리>, 파리의 명소를 골고루 담은 영화다. 에펠탑, 개선문, 판테옹, 몽마르트르 언덕…. 파리에 두번이나 갔던 나는 그중 한 군데도 못 가봤다. 그냥 카페에 죽치고 앉아 와인이나 마시고 싶었다. 그런 게 여행이지. 하지만 베르사유는 갈걸 그랬다.
<호우시절> 청두
동네에 아이맥스 영화관이 생겼다. 영화를 보러 간 게 아니라 ‘우리 동네’ 아이맥스를 보러 간 거였지만(변두리 주민은 이런 데 민감하다), 왜 하필 <호우시절>을 상영하고 있었을까. <트랜스포머> 같은 블록버스터가 보고 싶었던 우리는 불평을 늘어놓으며 들어갔다가 꿈꾸는 듯한 눈을 하고 나왔다. 내장을 좋아하는 내가 말했다. “나 청두에 가서 돼지내장탕 먹고 싶어.” 동물을 좋아하는 친구가 말했다. “나 청두에 가서 판다 보고 싶어.”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아이맥스 입장료가 아깝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