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터/액트리스]
[박해일] 무심한 듯 복잡미묘
2013-05-09
글 : 김성훈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박해일

박해일이 연기한 <고령화가족>의 둘째아들 인모는 흥행에 참패한 영화감독이다. 설상가상으로 아내(이영진)로부터 이혼을 요구받았다. 더이상 물러설 데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인모는 화장실에서 목을 매려고 하는데, 그에게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엄마(윤여정)였다. “닭죽 먹으러 오라”는 내용이었다. 그는 엄마가 내민 구원의 손길을 붙잡았다. <고령화가족>에서 박해일은 때로는 신경질적이면서, 또 때로는 무심하게 가족 속으로 비집고 들어가 가족의 맨 얼굴을 드러낸다. 70대 노인 분장을 하고 시인 이적요를 연기했던 <은교> 이후 제 나이를 다시 찾은 박해일을 만났다.

박해일이 영화 속 형제 관계에서 ‘둘째’를 연기한 건 <고령화가족>이 처음은 아니다. 봉준호 감독의 <괴물>(2007)에서도 그는 강두(송강호), 남일(박해일), 남주(배두나) 삼남매 중 둘째였다. <괴물>과 <고령화가족> 두 작품에서 그가 보여준 ‘둘째’는 어른스러움과 철부지, 특유의 진지함과 ‘똘끼’ 사이를 종횡무진 오가며 복합적인 면모를 펼쳐 보였다. 그러면서 첫째와 막내 사이에서 형제 관계의 중심을 끈끈하게 잡아주고, 본인을 비롯한 다른 형제들의 캐릭터를 더욱 풍성하게 기름칠했다. 이는 영화감독들이 박해일을 믿고 쓰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고령화가족>을 연출한 송해성 감독 역시 “박해일이 가진 성실성과 특유의 에너지가 첫째 한모(윤제문)와 막내 미연(공효진) 사이에 있는 인모에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송해성 감독으로부터 제안받은 <고령화가족>의 둘째 인모는 박해일의 촉수를 강하게 잡아당겼다. 데뷔작이 흥행 참패한 뒤 아무도 찾지 않는 영화감독. 담배 한갑 살 돈 없어 재떨이에 있는 꽁초를 재활용하고, 바람 피운 아내와의 이혼을 앞두고 엄마가 있는 집으로 다시 들어가는 인모는 사회라는 전쟁터의 패잔병이다. 시나리오를 통해 처음 만난 인모는 박해일에게 세 가지 인상을 주었다. “공부는 열심히 하는데 잘 안 풀리는 친구. 자아가 센 까닭에 자신의 성질을 못 이기고 일을 그르치는 친구. 그리고 감독이다보니 감수성이 예민할 수밖에 없는 친구. 그 지점들이 가족의 다른 구성원과 섞였을 때 상처로 드러나기 때문에 인모는 집에서도 마냥 편하게 있을 수 없는 친구다.” 너덜너덜해진 인모의 인생사가 박해일이 출연을 결심하게 된 마음의 동기가 됐다. “인모가 처한 여러 상황들에 대한 연민도, 관심도, 애정도 있었다. 그리고 인모에 들어가면 어떤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궁금함도 있었다. 형제간의 과오가 있지만 그걸 털고 넘어가야 하는 점도 실제로 겪어보지 못한 삶이라 해볼 만하겠다 싶었다.” 캐릭터가 매력적인 이유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인모에 들어가기로 마음을 먹은 순간 박해일은 인모라는 가시밭길을 피해갈 수 없었다. 인모의 삶을 고스란히 살아가야 하는 게 배우의 숙명이니까. 앞에서 나열한 여러 면모를 복합적으로 보여줘야 하는 캐릭터인 데다가 시나리오 순서대로 촬영한 까닭에 연기의 톤 앤드 매너를 처음 잡는 게 중요했다. “크랭크인 때 송해성 감독이 예상하고 뽑아내고 싶어 하는 연기의 톤이 뭔지 모르겠더라. 그래서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격하게도 해보고, 가볍게도 해봤다. 여러 방식으로 조율을 하면서 톤을 잡아나갔다.” 시작이 반이라고 했던가. 어렵게 찾은 인모의 톤 앤드 매너는 박해일에게 이 영화를 헤쳐나가는 길라잡이가 되어주었다.

<고령화가족>의 시작과 끝은 인모가 열고 닫는다. 서사를 이끌고가는 인물이다보니 때로는 가족 깊숙이 들어가기도 하고, 또 때로는 한 발짝 물러서서 가족의 다른 구성원을 관찰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상처를 추스르기도 하고, 형 한모를 비롯한 가족들에게 자신의 부채의식을 슬그머니 드러내기도 한다. 간단하지 않는 역할인 까닭에 박해일은 촬영현장에서 그 어느 때보다 많은 대화를 나눠야 했다. “촬영이 없는 날에도 현장에 출근했”다. “한번은 송 감독님이 ‘오(인모) 감독, 이거 어떤 것 같아?’라고 묻더라. 홍경표 촬영감독도 ‘오 감독, 오늘 컨디션 어때?’라고 그러고. 다들 오 감독이라고 부르니까 당황스러웠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거들고 있더라.” 박해일이 인모에, 영화에 더 수월하게 들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송해성 감독과 홍경표 촬영감독의 배려인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신인배우 김고은을 데리고 반나절 이상 걸리는 노인 분장을 하며 고군분투했던 <은교> 때와 달리 이번에는 윤여정, 윤제문, 공효진 등 든든한 원군이 옆에 있었다. “누구는 ‘가족 <어벤져스>’라고도 하더라. 아무래도 묻어가기 좋은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 생각해야 하는 지점이 A부터 Z까지 있다면 이 작품은 K부터 R까지만 해도 걱정거리가 없는 현장이었다. 물론 이런 조합도 나름 고충이 있다. 다들 기가 세다보니 무지막지하게 자신을 드러내려다보면 화합이 깨질 수 있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스탭들의 배려와 동료 배우들과의 호흡 덕분에 박해일은 때로는 <고령화가족>이라는 버스의 운전기사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여러 가족과 부딪치며 인모의 기운과 가족의 캐릭터를 함께 터트릴 수 있었다.

올해로 30대 중반을 넘어선 박해일은 <고령화가족>이라는 또 하나의 인장을 자신의 필모그래피에 박아넣었다. 매 작품 최선을 다할 뿐이지 일일이 거창하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그도 배우의 나이듦을 조금씩 의식하게 되는 나이가 되었다. 그래서일까. “송강호, 최민식 등 선배 배우들이 그렇듯이 보폭을 보다 넓고 길게 가고 싶다”고 말한다. “그게 왜 그러냐면, 정말 선배들은 그런 보폭으로 움직이고 계신다. 선배들과 달리 나는 이렇게 할 거야 그러기보다는 선배들의 활동에 주목하고 싶은 거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 나도 그렇게 될 것 같아서. 선배들도 나와 같은 과정을 밟고 가신 거니까. 이게 흐름이구나 싶다.” 자신에게 일어날 변화를 예의 주시하고 있지만 당황스럽진 않다. “선배들이 그 길을 닦아놨기 때문에 나는 그 맵을 따라갈 수 있다. 한편으로는 아주 유쾌하고, 다행스럽다.” 차기작이 정해지지 않은 까닭에 다음 행보가 무엇인지 아직 알 수 없지만 그의 말을 들으니 기쁜 마음으로 배우 박해일의 변화를 지켜보고, 응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은교>의 이적요, <고령화가족>의 인모가 그랬던 것처럼 다음에도 그는 예측 불가능한 캐릭터를 가지고 나타나 우리를 놀라게 하리라 믿는다.

magic hour

박해일이 뽑은 <고령화가족>의 한 장면

“한 장면은 아니고 연속되는 신이다. 이혼할 위기에 처해 있는 인모가 아내를 커피숍에서 만나 이혼하자는 얘기를 들은 뒤, 그곳에서 담배를 물고 나와 횡단보도를 또 건넌다. 집으로 가는 길이지. 걸으면서 혼자서 무언가를 생각한다. 그리고 다시 길을 걷던 중, 엄마의 뒷모습을 우연히 보았는데, 엄마가 낯선 남자를 만나 그 남자의 가게 안으로 들어가네? 그래서 언제 나오는지 기다렸지. 그리고 집에 들어오니 한모는 뻘짓(자위)을 하고 있고. 커피숍 신부터 집에 들어오는 장면까지 연속으로 이어지는 장면은 인모의 고민이 겉으로 드러나기 시작하는 장면이다. 물론 나중에 오해라는 게 밝혀지지만 가족에 대한 인모의 상상이 여러 상황을 거치면서 극에 달하는 시퀀스라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그런 경험을 살면서 겪어본 적이 없어서 인모를 통해 대리경험을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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