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날 일기에 <테이크 쉘터>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4월22일 아동문학작가 E. L. 코닉스버그가 83살로 타계했다. 뉴베리상 수상작인 그녀의 1968년작 <클로디아의 비밀>은, 집을 나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멀쩡히 숙식한 남매의 모험담으로, 나를 포함한 많은 어린이들에게 가출에 대한 꿈과 희망을 심어주었다. <로얄 테넌바움> <문라이즈 킹덤> 같은 웨스 앤더슨 영화에도 이 책의 그림자가 아른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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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영화의 결말에 무엇을 바랄까. 아마도 당신이 방금 본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길 즐기는 사람인지, 아니면 영화는 영화대로 고이 둔 채 현실로 복귀하고 싶은 사람인지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극장을 나와 더이상 인물들을 염려하지 않고 개운히 귀가할 수 있게 해주는 엔딩을 바랄 수도 있고 장엄한 종합을 기다릴 수도 있다. 그도 아니면, 영화는 끝나지만 그게 다가 아니라고 슬쩍 암시하는 아이러니를 선호하는 관객도 있으리라. 아무튼 해피엔딩이라고 무조건 단순하란 법은 없고 열린 결말이라 해서 예술적이라는 보장은 더더욱 없다.
<테이크 쉘터>의 엔딩은 근래 보기 드문 골칫거리다. 하도 성가셔서,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라면 끝나기 5분 전에 극장을 나오는 편이 좋았을 텐데, 말도 안되는 후회가 들 지경이다. <테이크 쉘터>의 관객을 상영시간 내내 끌고 가는 미스터리는, 주인공 커티스(마이클 섀넌)의 생생한 악몽이 외부에서 온 계시냐, 내면의 공포가 그려낸 환각이냐의 질문이다. 전자가 맞다면 영화는 묵시록이 되고 후자면 임상기록이 된다. 이상하게도 제프 니콜스 감독은 한쪽으로 거의 결론을 내리는 듯 보이다가, 그것을 (적어도 표면적으로) 배반하는 라스트 신을 내밀어 관객을 다시 혼돈에 빠뜨린다. 마지막 장면이 현실일 경우 영화는 초자연적 요소를 포함한 현대 미국판 <노아의 방주>가 되고 라스트 신이 새로운 악몽이라면 커티스가 영영 분열증에서 놓여나지 못하리라는 예고가 된다.
영화를 본 관객의 중론은 전자로 기운다. 후자가 감독의 의도라기엔 의미도 재미도 없는 도돌이표로 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장면은 앞서 나온 커티스의 악몽 신들과 다르게, 아내 사만다(제시카 채스테인)의 시점숏이 포함돼 있으므로 현실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 한편 제프 니콜스 감독은 <테이크 쉘터>의 엔딩이 결코 면피용이거나 심오해 보이려는 제스처가 아니라 영화의 나머지 부분과 조화로운 마침표라고 인터뷰에서 단언했다. 잠시 고민 끝에 나는 니콜스 감독이 택한 엔딩을 “커티스는 사실 선지자였다. 놀랐지?”라는 반전이라기보다 영화의 본질을 방어하기 위한 최소한의 마지노선으로 이해하기로 한다. 즉, 감독은 커티스가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과 연결돼 있는 인간이며, 그가 본 비전이 곧 우리의 불안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다짐해두고 싶었던 것 같다. “그는 환자였어”라고 선을 긋고 관객이 커티스를 잊는다면 낭패이므로. 제프 니콜스 감독은 그저, 마지막 순간 아내 사만다가 커티스에게 보내는 “이제 알겠어요”라는 수긍의 신호에 관객이 동조하길 원했던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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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하나를 독파(讀破)하려고 작심한 영화들이 줄을 잇고 있다. <홀리모터스>의 파리에 이어 <로마 위드 러브>의 로마, 그리고 다시 오늘 시사를 가진 <새 구두를 사야 해>의 파리다. 누이동생의 성화에 못 이겨 파리 여행에 동행한 젊은 포토그래퍼 센(무카이 오사무)은 애인과 둘만의 시간을 누리려는 동생에게 따돌려져 졸지에 센 강변의 미아가 된다. 구두굽이 부러지는 우연으로 센과 엮인 독신녀 아오이(나카야마 미호)는, 곤경에 빠진 이방인 센의 길잡이 역을 맡는다. 둘의 식사는 당연히 와인이 있는 대화로 이어지고, 3일간의 로맨틱한 조우로 확장된다. 하필 숙취에 신음하면서 보러 간 영화에 과음으로 인한 해프닝이 등장하니 만감이 교차했다. 물론 영화 속 음주가 낳은 결과는 현실과 딴판이었지만.
그곳에 가고 싶다는 충동을 펌프질하는 영화를 가리켜 “관광엽서 같다”는 비유가 오래 통용됐는데, <새 구두를 사야 해>를 보고 있으려니 “구글 어스(Google Earth) 같은 영화”라는 표현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친절한 아오이는 개선문 근처에서 방향을 잃은 센을 전화 통화로 아바타마냥 움직여 샹젤리제 끄트머리의 호텔까지 깔끔히 인도한다. 중간중간 관광 가이드까지 결들인 그녀의 길 안내는 너무나 세세해 이 시퀀스를 휴대폰이나 태블릿에 저장해놓고 그대로 따라하는 관광객이 있을 법하다. 냉정한 비평가라면 이 영화를 보고 <비포 선라이즈>가 여러 영화 망쳤다고 독설을 날릴 것이다. 어쨌거나 <새 구두를 사야 해>는 기타카와 에리코 감독과 파리에서 생활해온 배우 나카야마 미호의 실제 경험에서 나온 게 분명한 조촐한 세부를 포함하고 있다. <새 구두를 사야 해>는 상품화된 도시 이미지와 사적인 에세이 사이에서 한들한들 흔들리는 영화다. <버라이어티>는 <새 구두를 사야 해>에 대해 “아시아 여성에게 페라가모 구두처럼 팔릴 영화”라고 평했는데 그것은 심술궂은 극언이고, 한번쯤 파리를 방문했던 아시아 중년 여성 관객에게 특별히 소구할 거라는 점만큼은 동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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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서는 통할 리 없는데 영화에서만 허용되는 시간이 있는데, 택시를 불러 세워놓고 하염없이 길어지는 연인의 인사가 대표적이다. <새 구두를 사야 해>의 아오이와 센도 예외가 아니다. 만사가 조급한 도시에서 남들에게 거치적거릴까봐 노심초사하는 버릇이 몸에 밴 나는 영화인데도 불구하고 매번 초조해진다. 왜, 대화부터 마무리짓고 택시를 잡지 않는 걸까, 자못 극중 인물들이 원망스럽다. 하기야 파리의 택시 기사들에게는 늘 있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전혀 다른 경우지만 영화에서만 통하는 시간감각이 나를 겸연쩍게 하는 경우로 미국영화 속 수업시간의 길이가 있다. 분명 방금 수업을 시작한 것 같은데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종이 울리는 일이 다반사다. 혹은 영화 속 수업은 종치기 5분 전부터라는 규칙이 어딘가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교실장면을 마무리하는 방식에 대해서 더 많은 아이디어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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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가 매년 한편씩 <스타워즈>를 내놓겠다고 발표했다. 2015년 여름 개봉할 J. J. 에이브럼스 감독의 7편부터 3부작이 만들어지고, 요다나 한솔로처럼 주요 캐릭터를 중심에 둔 스핀오프도 제작된다. 마블 코믹스 슈퍼히어로 연작과 동일한 방식의 ‘스타워즈’ 리그를 운영할 모양이다. 반응은 갈린다. 한솔로의 명언을 빌려 “느낌이 좋지 않다(I have bad feeling about this)를 외치는 진영이 있는가 하면, 어차피 프리퀄 세편이 오리지널 3부작의 영화사적 아우라를 훼손시킨 마당에 조지 루카스보다 재주있는 감독에게 연출을 맡겨 마블 시리즈처럼 활력을 찾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의견도 있다. 1999년 <스타워즈 에피소드1: 보이지 않는 위험>이 나왔을 때 특집기사를 위해 조지 루카스가 구상한 은하계 연대기를 정리했던 기억을 돌아보면 <스타워즈>의 우주는 스무편 정도 영화는 수용하고도 남을 만큼 광활하다. 그러니 미리부터 수선을 피울 생각은 없다. 다만 영화잡지 직원으로서 소박한 바람이 있다면 좀더 개성있는 부제를 붙여줬으면 한다. 나는 아직도 ‘보이지 않는 위험’인지 ‘보이지 않는 위협’인지 매번 확인하고 ‘클론의 전쟁’과 ‘클론의 습격’을 헛갈린다. <다이하드4.0>과 <다이하드 굿 데이 투 다이>도 구두점이 맞는지 불안해 번번이 검색하고, 최근작 <트론>과 <혹성탈출>의 부제는 ‘새로운 기원’인지 ‘진화의 시작’인지 쓸 때마다 흐릿하다. ‘내 남자의’, ‘내 여자친구는’ 돌림자 제목의 로맨틱코미디 홍수를 잇는 두 번째 시련이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007>과 <아이언맨> 시리즈는 대동소이한 부제로 마감에 쫓기는 기자를 괴롭히지 않는 점 하나만 해도 고맙다는, 오늘의 엉뚱한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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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저는 죽어야 한다>의 오디션
셰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에 출연할 배우를 뽑기 위한 오디션이 교도소에서 열린다. 주어진 과제는 아내를 뒤에 남겨두고 국경을 넘으며 관리에게 신원을 밝히는 대사. 말의 내용과 말하는 이의 감정을 분리해서 표현해야 하는 연기다. 둘을 종합해 슬픔을 감지하는 건 관객의 몫이다. 다같이 완전한 아마추어인데도 어떤 죄수는 본능적으로 연기의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누군가는 그렇지 못한 광경이 흥미진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