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말을 이미 알지만 계속 보고 싶을 때가 있다. 대개 궁금함이란 단어로 두루뭉술하게 묶어서 이야기하곤 하지만 우리는 이 단어를 좀더 세밀하게 사용할 필요가 있다. 결과가 궁금하기도 하지만 결과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이 궁금한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편하고 익숙해서 어떤 땐 이웃집 아가씨 같다가도 다시 돌아보면 엉뚱한 얼굴을 보여주는 천진난만한 배우, 최강희는 결과보다 과정이 궁금한 배우다. 그녀는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오죽하면 동안의 아이콘이겠는가. 데뷔 이래 다양한 역할을 소화해왔지만 개성 넘치는 캐릭터들은 모두 최강희라는 배우의 이미지에 녹아들어 귀엽고 사랑스러운 얼굴로 탈바꿈한다. <미나문방구>로 찾아온 그녀는 다시 한번 우리에게 익숙한 모습으로 작품에 신뢰를 준다. 아마도 포스터 속 그녀를 마주하는 순간 대략의 그림이 그려질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왠지 그녀의 이야기를 좀더 들어보고 싶었다. 예측가능한 결과에 대해 듣고자 함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늘 이렇게 안정된 모습으로 기대를 충족시켜주는지 그 비결이 궁금해졌다.
보통 사람
대체 불가능의 존재감으로 영화를 지배하는 배우는 아니다. 하지만 어떤 옷으로 갈아입고 어떤 역할로 들어간다고 할지라도 영화는 항상 그녀라는 존재감을 머금고 있다. 작품의 중심에서 작품을 지배하기보다 편하게 옷을 갈아입듯 작품의 중심으로 훌쩍 들어가버리는 배우. 그래서인지 그녀가 출연한 영화 속 모습들은 모두 최강희의 연장처럼 보이기도 한다. 우리는 최강희가 성장하고(<행복한 장의사>), 최강희가 연애를 하고(<달콤, 살벌한 연인>), 최강희가 엄마랑 싸우고(<애자>), 최강희가 시골로 내려가는(<미나문방구>) 모습을 쭉 보고 있다.
“기분 좋다. 알고 보면 캐릭터마다 다르지만 관객이 모두 아는 사람 같은 느낌을 받는다는 말이니. 영화 외적으로는 4차원이라는 말을 종종 듣지만 극적으로는 가장 보통의 사람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가 아는 걔가 짝사랑을 하고 취업난으로 고민도 하고 가끔 사람을 죽이기도 하는? (웃음) 내 모습을 통해 관객이 각자의 인생을 한번쯤 돌아보게 있다면 그만큼 신나는 일도 없지 않을까.” 그녀의 대답에서 일말의 자부심이 느껴지는 건 평범하고 친숙한 ‘최강희스러움’이 의식적으로 만들어낸 결과물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시나리오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면 그 작품은 한다. 대신 뭔가 부끄러워진다든지 해서 한번 브레이크가 걸리면 잘 못 보는 편이다. 데뷔 때부터 쭉 그랬다. 읽다보면 머릿속에 그려지는 그림이 있다. 완성된 영화를 보고 예상과 달랐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느낌이 오는 대로, 할 수 있는 만큼 자연스럽게. ‘자연스럽게’라는 수식어가 이만큼 어울리는 배우를 찾기도 힘들 것이다.
책임감
그렇다고 그녀가 마냥 마음 편하게 연기했냐 하면 그렇지 않다. 오해하기 쉽지만 적절한 역할을 선택하는 것과 하기 쉬운 것을 고르는 건 다르다. 게다가 최강희는 2차원적인 캐릭터에 자신의 색깔을 입혀 캐릭터의 부피를 더하는 쪽에 가까운 배우다. 예를 들어 <달콤, 살벌한 연인>의 미나는 사실 공감하기 힘든 만화적인 캐릭터지만 최강희가 그 옷을 입었을 때 별다른 설명을 더하지 않아도 왠지 설득이 된다. 그녀는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과장된 캐릭터에 현실감을 부여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의외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난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다. 내 주변에 나만큼 성실하고 책임감 강한 사람도 없다. (웃음) 내가 이 작품에 손해를 끼치면 안된다는 강박이 있다. 그래서 그동안 손익분기점 을 잘 맞춘 건지도 모르지만. (웃음) 스스로 판단할 때 사실 좀 애매한 위치다. 소위 말하는 잘나가는 스타도 아니고 그렇다고 압도적인 연기력으로 인정받은 것도 아니고. 내 입장에서는 고군분투할 수밖에 없다. 누구는 여러 테이크 가는 걸 싫어한다고도 하지만 나는 ‘여기서 좋은 게 걸릴 수도 있으니 한번 더 가시죠’라고 먼저 제안하는 편이다.” <미나문방구>는 국내에서 보기 드물게 여배우가 이끌고 가는 영화인데 부담이 없었는지 물어보자 배시시 웃으며 답한다. “연기할 때는 별 부담이 없었다. 그때는 최근 한국영화 중 여배우가 온전히 끌고 가는 영화가 많지 않았다는 걸 몰랐는데 막상 물어보니 부담된다. 책임감도 생기고. 하지만 <미나문방구>에는 든든한 아이들이 있으니 괜찮지 않을까? (웃음)”
보물찾기
한편으로 그녀는 참 성실한 배우다. 작품 속 맹하고 헐렁한 이미지 때문에 쉽고 편하게 간다는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1995년 데뷔 이래 늘 꾸준한 호흡으로 쉬지 않고 작품에 출연해왔다. 그런 그녀에게 최근 변화가 생겼다. 정확히는 변화에의 갈망이 생겼다. “<미나문방구>를 하면서 여기까지다 생각했다. 아빠와 갈등, 엄마와 갈등, 취업에의 고민, 짝사랑, 매력적이고 특이한 캐릭터는 물론 심지어 소외된 귀신 역할까지 ‘평범한 내’가 대변할 수 있는 건 다 해본 것 같다. 그래서 이제 다른 모습을 보여줘도 좋지 않을까 하는 욕심이 난다.”
이제는 또 다른 자신을 발견해줄 자신만의 대표작을 만들고 싶다고 말하는 그녀의 눈빛은 어린 시절 보물찾기를 앞둔 어린아이 같다. “얼마 전 마리온 코티아르가 주연한 <러스트 앤 본>을 봤는데 예고편에 ‘마리온 코티아르의 대표작’이라는 문구가 있더라. 내가 생각하는 그녀의 최고 영화는 <러브 미 이프 유 데어>지만(웃음), 그 문구를 보는 것만으로도 설레고 두근거렸다. 이젠 손해를 끼치면 안된다는 책임감은 잠시 내려놓고 남들이 뭐라 하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 될 수 있는 영화를 만나고 싶다.” 그간 우연에 우연을 거듭하여 주로 입봉 감독들과 함께 작업해왔던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자기의 모습을 발견해줄 거장 감독과의 만남에 대한 기대도 조심스레 풀어놓았다. 그동안 최강희는 맡은 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최강희’로서 할 일을 다 했다. 이제는 이 성실한 배우 안에 숨겨진 또 다른 보석을 발견해야 할 때가 온 것 아닐까. 그녀도, 그녀를 즐겨온 우리도, 새로운 그녀를 맞이할 준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