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나이를 먹지 않을 것 같은 배우들이 있다. 때문에 우리는 말콤 맥도웰의 백발이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두꺼워진 하관, 그리고 에드워드 펄롱의 다크서클을 보며 새삼스레 무정한(?)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된다. 윌 스미스도 그런 배우 중 하나다. 아이같이 해맑은 얼굴과 짱짱하게 힘이 들어간 팔다리로 계속 악당과 외계인을 쫓아다닐 것만 같던 이 악동은 어느새 훌쩍 큰 십대의 아들을 데리고 우리를 찾아왔다. 직접 만나본 윌 스미스는 <애프터 어스>를 촬영하며 배우로서, 아버지로서 그가 느낀 여러 가지 감회들을 넌지시 들려주었다.
“죽으면 원없이 쉴 텐데, 지금 무엇하러 쉬나?” 작곡가 퀸시 존스가 했던 이 말을 윌 스미스는 평생의 신조로 삼아왔다. 정말 죽은 뒤 한꺼번에 몰아서 쉬기라도 할 듯이, 데뷔한 지 20여년을 훌쩍 넘긴 그는 지금까지도 스크린 안팎에서 왕성한 활동을 계속해오고 있다. 윌 스미스는 피부색의 흑백을 가리지 않고 폭넓은 대중의 사랑을 받아왔다. 그는 래퍼, 영화배우, 제작자로서 할리우드와 미국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종횡무진 누비면서 동시에 한 여자의 남편이자 세 아이의 아버지로서 제 역할을 든든하게 해내고 있는 흔치 않은 거물급 스타다.
이런 사실은 대중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그의 이미지가 ‘유쾌한 악동’이라는 점을 떠올려본다면 더욱 희한한 일이다. 거침없는 행동거지와 시도 때도 없이 터뜨리는 가벼운 유머는 윌 스미스의 트레이드마크다. 덴젤 워싱턴이 흑인답지 않은 우아함으로, 모건 프리먼이 연륜과 중후함으로, 그리고 웨슬리 스나입스가 동물적인 야성으로 대중에 어필하고 있을 때, 혜성처럼 나타난 윌 스미스는 젊음과 경쾌함 그리고 사소한 즐거움을 활력으로 삼아 할리우드와 전세계를 사로잡았다. 그는 흔히 흑인에게 덧씌워지곤 하는 경박한 이미지를 애써 피해가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것을 기꺼이 뒤집어썼고, 피부색에 새겨진 약점을 자신의 매력으로 변용시켜냈다.
아버지가 된 악동
그리고 약 스무해를 정신없이 달려오는 사이에, 악동은 어느새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마흔 네살의 윌 스미스는 중년이 된 자신의 모습을 스크린에 투영시키며 연기에 새로운 스펙트럼을 더하고 있다. <애프터 어스>는 <더 로드>의 SF 판타지 버전이라 할 만하다. 윌 스미스와 제이든 스미스는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생명을 위협할 때, 서로에게 기대어 고난을 헤쳐가는 아버지와 아들을 그려낸다. <행복을 찾아서> 이후 스미스 부자(父子)의 두 번째 동반 출연이다.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생일에 전화를 걸었더니, 축하고 나발이고 새로운 이야기나 던져달라고 하더라. 그래서 오래 전부터 생각해온 이야기를 들려줬더니 ‘이거 영화 되겠다’고 해서 바로 제작에 착수했다.”
우주 항해 중 오래전에 인류가 떠나온 지구에 불시착한 신인류의 영웅 사이퍼 레이지(윌 스미스)와 그의 아들 키타이 레이지(제이든 스미스). 착륙 여파로 다리를 크게 다친 사이퍼 레이지는 부서진 잔해 속에 앉아서 미숙한 아들 키타이 레이지를 이끌 수밖에 없다. 그동안 쉴 새 없이 뛰어다니며 직접 사건을 해결했던 윌 스미스가 가만히 앉아 미지의 세계로 달려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보는 것은 묘한 감흥을 준다. “그게 양육의 미학인 것 같다. 어느 순간에는 자식이 스스로의 힘으로, 책임감을 가지고 걸어나갈 수 있도록 부모는 가만히 있어야 한다. 물론 나는 가만히 있고 아이가 열심히 뛰어다니면서 돈을 벌어오는 것도 좋고.(웃음)”
제이든 스미스에게 윌 스미스는 좋은 아버지임과 동시에 엔터테인먼트의 세계속에서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주는 훌륭한 스승이다. 그 자신이 십대 무렵부터 성공적인 연예인으로 살아온 윌 스미스는 철저한 자기 관리와 도전을 겁내지 않는 대담함, 그리고 엔터테이너로서 다양한 관객층을 아우르는 타고난 균형감각으로 세계를 매혹시켰다. 그는 자유분방하면서도 목적이 뚜렷한, ‘깨어 있는 악동’이었다. 1980년 ‘프레시 프린스’(Fresh Prince)라는 이름을 내걸고 힙합 듀오로 활동을 시작한 그는 래퍼로서 최초로 그래미상을 수상했고, TV시트콤 <프레시프린스 오브 벨 에어>로 대중적인 인지도를 얻은 뒤 곧 당시 역대 박스오피스 2위에 오른 블록버스터 <인디펜던스 데이>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어떠한 역경에 직면해도 능수능란함과 유머를 잃지 않는 윌 스미스의 이미지는 이러한 도전과 성공의 반복을 통해 형성되었다. 그는 <맨 인 블랙>과 <나쁜 녀석들> 시리즈로 최고의 인기를 얻은 뒤 <알리>를 기점으로 배우인생의 제2막을 성공적으로 열었다. 제 머리 못 깎는 데이트 코치(<Mr. 히치: 당신을 위한 데이트 코치>), 인류를 파멸시킨 질병의 해약을 연구하는 군인 과학자(<나는 전설이다>), 그리고 어린아이처럼 심퉁맞은 슈퍼 히어로(<핸콕>) 등으로 변신을 꾀하며 믿음직한 주연배우로서 스스로의 이미지를 거듭 쇄신하고 있다.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
그는 자신이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자립심, 긍정적 사고, 노력의 가치 등을 아들에게 고스란히 물려주려고 노력했다. 물론 애착을 떼어내는 것은 어느 부모에게나 마찬가지로 힘든 일이다. 그러나 키타이가 내린 결정을 존중하고, 아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날아오를 수 있도록 묵묵히 뒤에서 응원하는 사이퍼의 원숙한 표정에는 우리가 흔히 엿볼 수 없었던 인간 윌 스미스의 얼굴이 서려 있다. “어릴 적부터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권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나는 내 아이들에게 그 누구의 판단에도 기대지 말고, 스스로 내린 결정에 대한 대가를 감내하라고 가르친다. 나는 이렇게 말한다. ‘너에게 있어 무엇이 최선인가 생각하고 알아서 결정해라.’”
하지만 윌 스미스의 성숙한 모습을 혹여나 은퇴의 준비로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그는 여전히 연 기라는 즐거운 고행을 그만둘 생각이 없다. 가정을 꾸리면서 “보다 내밀하고 복잡한 인간관계의 감정들을 이해하게 됐다”고 즐거워하는 윌 스미스는 “배가 나와서 말론 브랜도풍의 연기를 해야 할 때까지” 연기를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말하며 유쾌하게 웃었다. 중년이 됐어도, 아버지가 됐어도, 윌 스미스는 여전히 대단한 악동이다.
윌 스미스가 말하는 제이든 스미스
제이든 스미스는 1998년 윌 스미스와 <매트릭스> 2, 3편에서 니오베 함장 역을 맡았던 배우 제이다 핀켓 스미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모의 재능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제이든은 여덟살이던 2006년 아버지와 함께 출연한 <행복을 찾아서>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네 편의 장편 극영화에서 연기를 펼쳐왔다.
대스타도 자식 자랑은 어쩔 수 없는지 여러 인터뷰에서 윌 스미스가 빼놓지 않고 언급하는 일화가 있다. “<행복을 찾아서>를 촬영할 때였다. 선착순으로 입실하는 빈민용 숙소에 들어가기 위해 버스를 꼭 잡아야하는 장면이었다. 대본에 버스를 타다가 제이든이 손에 들고 있던 캡틴 아메리카 인형을 떨어뜨리고 울음을 터뜨리는 대목이 있었다. 처음에 제이든은 ‘다시는 구할 수 없는 장난감’이라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그냥 다시 사면 안돼요?’라고 나에게 물었다. 나는 이 가족은 아주 가난해서 그럴 수 없다고, 그리고 인형을 줍기 위해 차에서 내리면 그날 하루는 바깥에서 자야한다고 차근차근 설명해줬다. 이야기를 듣던 제이든은 곧바로 감정을 잡더니 차분하게 말했다. ‘준비됐어요. 카메라 돌리죠.’”
윌 스미스의 말에 따르면 제이든은 “감정이 풍부하고, 어린 나이에도 휴머니티를 잘 이해하는” 배우다. 신작 <애프터 어스>에서 제이든은 뛰어난 영웅을 아버지로 둔 미숙한 생도(生徒)의 고뇌를 진솔하게 그려낸다. 윌 스미스는 “평소에 차마 말로 꺼내지 못했던 감정이 배역을 연기하면서 우회적으로 해소되는 느낌이었다”며 “아들의 마음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실제로 스미스 부자에게 <애프터 어스>는 ‘심리드라마’ 같은 역할을 했다. 아버지와 아들간의 관계에 대한 밀도있는 드라마를 통해 제이든은 아버지와의 갈등을 해소하고 더욱 성숙하게 거듭났다. “촬영 중에 제이든의 몸과 마음이 쑥쑥 성장했다. 처음에는 영화 전체의 느낌을 깨뜨릴까봐 걱정했는데, 찍어놓고 보니 더 좋더라. 소년의 내적 성장이 육체적인 성장을 통해 더욱 효과적으로 표현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