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x&talk]
[조지훈] 캠핑극장 개봉박두
2013-06-07
글 : 주성철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전주영화제 12년 지킴이에서 제1회 무주산골영화제 맡은 조지훈 프로그래머

‘숲에서 보는 영화’를 표방하는 무주산골영화제가 오는 6월13일부터 4박5일 동안 열린다. 보도자료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오래도록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일했던 김건 집행위원장과 조지훈 프로그래머라는 이름이었다. 지난해 전주국제영화제는 큰 내홍을 겪었다. 6월 유운성 프로그래머가 해임된 이후 민병록 집행위원장과 김건 부집행위원장이 사퇴했고 11월에는 조지훈, 맹수진 프로그래머, 홍영주 사무처장도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고석만 신임 집행위원장 체제로 올해 14회 영화제를 무사히 치렀다. 일단 규모와 성격 등 확연하게 차별화되는 두 영화제 사이의 연결지점을 굳이 찾으려 했다기보다, 그의 근황과 더불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다양한 직함으로 무려 12년이나 일했던 그의 새로운 영화제에 대한 생각을 듣고 싶었다. 그는 전주의 ‘삼인삼색’과 ‘숏숏숏’ 프로젝트의 핵심적인 매니저이기도 했다. 그렇게 ‘잘 쉬고 싶었지만 어쩌다보니 또 영화제’라는 그는 인터뷰 내내 영화제 예찬론을 펼쳤다.

-전주국제영화제를 그만둔 것이 지난해 11월이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영화제 그만둔 것을 여기저기 알렸지만 그래도 얼마간은 심사위원 제의 같은 게 계속 들어왔다. 시네마닐라국제영화제, 로테르담국제영화제 넷팩 심사위원 등을 맡다보니 몇 개월이 후딱 지나갔다. 그런 다음 이제 진짜 좀 쉬어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무주군으로부터 영화제를 제안받았다. 사퇴 이후 계속 영화제 일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아니면 나도 이제 여섯살 난 아이가 있는 마흔살의 가장인데 전혀 다른 뭔가에 도전할 것인가, 고민할 겨를도 없이 영화제 일을 맡게 됐다. 그래도 하겠다고 한 걸 보면 영화제 일에 아직 애착과 미련이 남은 듯싶다. (웃음)

-그렇게 새로 시작한 영화제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이 어떨지 궁금할 것 같다. 어떤 마음으로 참여하게 됐나.
=전주영화제를 나오고 새로운 영화제에 참여했는데, 그것이 과연 어떤 영화제일지 눈여겨볼 것 같다. 하지만 일반 관객은 그런 데 별 관심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건 역시 ‘좋은 프로그램으로 좋은 영화제를 만드는 것’이다. 무주로부터 제안을 받았을 때 어떤 프로그램이 맞을까, 고민이 많았다. 큰 극장이 하나도 없고 그나마 사람들이 모여 있는 큰 동네가 무주읍이다. 극장과의 접근성이 떨어지다 보니 일반 개봉 상업영화를 접할 기회가 거의 없는 주민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런 분들을 포함해 외지에서 오는 관람객에게도 좋은 영화들, 물론 기존 상영작들이 대부분이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다들 놓치는 일이 많았을 법한 영화들을 모아봤다. 멋진 자연에서의 휴양이랄까, 원래 리조트와 스키장이 있고 캠핑하러 많이 오는 곳이라 ‘영화 소풍’이라는 컨셉으로 접근했다. 카피가 바로 ‘영화야, 소풍 갈래?’다. (웃음)

-숲속의 상영관은 어떨지 궁금하다.
=무주덕유산리조트가 핵심 공간인데 개막식과 야외상영, 공연이 가능하다. 스키장이 있는 곳에서 상영하니 무척 멋질 거다. 역시 야외무대와 야외상영장이 있는 무주덕유산국립공원 내 덕유대 야영장도 있는데, 말하자면 ‘숲’에서 영화를 보는 거다. 실내상영관으로는 무주예체문화관이 활용되는데 일종의 다목적 체육관이다. 아래에 수영장도 있고 극장처럼 생겼지만 평소 결혼식장으로 쓰기도 하더라. 좌석 없이 나무 바닥에 그냥 돗자리를 깔까도 생각 중이다. (웃음)

-프로그램을 보니 기존 상영작들이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창’이라는 한국장편경쟁 부문 섹션도 있다.
=영화제는 보통 1년을 준비한다. 그런데 지난해 11월 전주영화제를 떠나 새로운 영화제를 꾸리며, 그 절반의 시간도 없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공식적으로 출품과 초청 과정을 거치는 데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그래서 ‘창’이라는 한국장편경쟁 부문을 마련하면서 강이관 감독의 <범죄소년>, 민병훈 감독의 <터치>, 강진아 감독의 <환상속의 그대>, 유지태 감독의 <마이 라띠마> 등 기존에 상영됐거나 지난해 서울독립영화제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한 홍재희 감독의 <아버지의 이메일>처럼 영화제에서 소개된 작품들 위주로 프로그래밍을 했다. 그런데 기분 좋은 일은 차기작 준비로 바쁜 <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2>의 오멸 감독 정도를 제외하고는 유지태, 강이관, 민병훈, 강진아 감독 등이 모두 영화제를 찾아와 관객과의 대화를 갖기로 한 것이다. 처음에는 초청작 감독들의 절반만 와줘도 성공이라고 봤는데 다들 오신다 해서 무척 들떠 있다. 신기해하고 재밌을 것 같다는 반응이었다. 무주산골에서 감독들과의 만남이라, 왠지 멋질 것 같지 않나? (웃음)

-기존 상영작 위주의 프로그래밍이어서 아쉬운 점도 있을 것이고, 한편으론 프로그래머로서 ‘발견’의 작품도 있을 것 같다.
=전주를 떠나며 한동안 이쪽 일을 하지 않을 것 같았고, 그저 쉬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역시 또 이 일을 하게 되니 프로그래머로서의 욕심이 생기는 건 당연하다. <비포 미드나잇> 개봉에 맞춰서 전작들인 <비포 선라이즈>(1995), <비포 선셋>(2004) 등을 한데 묶어 연속 상영하면 좋을 것 같았지만 사정상 이뤄지지 못했고, 올해 장국영 사망 10주기를 맞아 <아비정전>을 리조트 스키장의 야외상영장에서 보면 정말 멋질 것 같았지만 필름 영사준비가 되지 않아 아쉽게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발견의 작품도 있다. 장편경쟁 부문에서 상영되는 김이창 감독의 <수련>이다. 버려진 체육관에서 홀로 수련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가난한 무술사범의 이야기인데 전체 분량의 90% 이상이 셀프 다큐멘터리 형식인 독특한 영화다. 지난해에 우연히 발견한 것으로 정말 오묘한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관객의 반응이 어떨지 무척 궁금하다.

-비슷한 컨셉의 영화제로 올해로 15회를 맞는 정동진독립영화제가 떠오른다.
=맞다. 정동진영화제는 한편의 영화가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 것 같다. 맨 처음 모델로 삼은 영화제가 바로 정동진영화제와 일본의 유바리판타스틱영화제다.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유바리영화제 때는 동네 주민들이 밭에서 일하다가 보고 싶은 영화의 상영시간이 되면 곡괭이를 짊어진 채로 그냥 극장에 들어간다더라. (웃음) 너무 신기하고 멋진 일 아닌가. 사람들이 도시를 벗어나 자연을 찾아가는 게, 도시에서도 그 일상을 벗어나고 싶어 어두운 극장으로 들어가는 게 결국 같은 ‘일상으로부터 탈출’ 행위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우리 영화제는 ‘소풍’이다. 그리고 모든 영화가 선착순, 무료관람이다. 상영장 앞에서 옥수수나 감자를 삶아서 나눠줘도 좋을 것 같다. (웃음)

-아무래도 첫회 영화제라 설렘과 막막함이 공존할 것 같다.
=원래 무주는 반딧불축제로 유명하다. 올해도 6월1일부터 열리는데 전국 각지에서 정말 많은 사람들이 온다. 그렇게 알려진 무주라는 이름을 다시 영화로 알리는 게 목표인데, 관객 수를 예측하기가 힘들어 막막하기도 하고 겁나기도 한다. 영화제를 준비하며 만난 수많은 사람들이 재밌어하고 신기해하지만 과연 그들이 무주까지 올까, 하는 생각도 들고. 그래도 영화제를 맨 처음 제안한 쪽이 무주군이고, 단순한 홍보성 이벤트가 아니라 ‘시대에 화두를 던질 수 있는 영화들을 모아 축제를 해보자’는 홍낙표 무주군수님 얘기에 흔쾌히 함께하고자 했다. 영화제에 12년이나 참여해보니 영화제를 준비하는 과정이 한편의 영화를 만드는 과정과 비슷하다고 느낀다. 지금은 개봉을 앞두고 맹렬히 후반작업을 하는 단계다. 개봉 즈음이면 뭔가 확신이 생길 것 같다. (웃음)

-대안영화와 디지털이라는 명확한 컨셉을 견지했던 전주국제영화제에 몸담고 있던 때와 비교하면 어떤가.
=가장 큰 고민은 누군지 모르는 관객과의 교감을 일찌감치 상정하는 것이었다. 전주는 축적된 경험으로 매해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그 설정이 분명했다. 어떤 영화라도 좋으면 무조건 상영한다였다. 러닝타임 300분의 영화라도, 시작부터 끝까지 롱테이크로 창문만 보여주는 영화라도, 그것이 좋다면 믿고 봐줄 관객이 존재할 거라는 믿음이 가장 중요했다. 그런데 무주산골영화제는 그런 식의 접근법을 바꿀 수밖에 없다. 한 영화제에 12년이나 있었던 사람으로서 흥미로운 도전이다. 부산, 부천, 전주 등 특정 지역에서 열리는 도시영화제는 그 지역민들의 지지가 절대적이다. 유료관객의 30~40%가 그 지역민들이라야 영화제를 향한 자부심도 생긴다. 부산처럼 예술과 산업의 경계, 그러니까 이미 어떤 단계를 넘어선 대규모 영화제가 아니라면 기본적으로 ‘동네영화제’ 같은 친밀함과 아기자기함이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무주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과감히 무료상영을 택했고 다른 영화제들에서 볼 수 있는 엄격한 관람 원칙도 지양할 생각이다.

-전주국제영화제는 2000년 1회 때 자원봉사자로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홍보팀, 프로그램팀을 거쳐 2007년 프로그래머가 된 거의 입지전적 인물이다.
=1회 때 자원봉사자로 일했는데, 내가 사는 지역에서 국제적인 영화제가 열린다니 뭔가 좀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웃음) 그러다 2회 때 홍보팀 막내로 일하게 됐고 몇달 있다가 프로그램팀 일을 제안받고 옮긴 뒤로 주로 해외업무를 맡아 일했다. 영화제일이 마냥 재밌었는데, 그러다 계속 쭉 눌러앉게 된 계기가 있다. 2001년 즈음, 멀티플렉스가 없고 전부 단관상영관에서 영화제를 할 때였는데, 자정이 다 되어 매점 아저씨가 극장 문을 닫을 때가 됐고 자원봉사자들이 아저씨에게 사정사정하며 좀만 기다려달라고 했다. 그때 극장 안에서는 밖에서 어떤 실랑이가 있는지도 모르고 진지하게 집중하며 관객과의 대화 시간을 갖고 있었다. 불 꺼진 로비 너머로 극장 안의 그 광경을 보고 있는데 너무 멋진 거다. 이런 일이라면 오래해도 좋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물론 아버지는 지금도 돈 되는 일 좀 하라고 타박하시지만. (웃음)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나 작품이 있다면.
=솔직히 난 시네필도 아니어서 영화제에서 좋은 영화를 본다는 것 자체가 좋았다. 전주에서 미지의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공부였다. 어떻게 보면 영화제 일을 하면서 영화를 사랑하게 됐다. 그리고 영화제 기간 동안 집중적으로 서울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그땐 옷차림부터 ‘외지인’이라고 써붙인 서울 누나들이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운다는 것 자체가 컬처 쇼크였다. (웃음) 전북대문화관 길거리에서 여자들이 담배를 피우다가 할아버지한테 뺨을 맞는 일도 있었다. 그게 불과 10년 전 일이고, 전주영화제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풍경이었다. 딱 한편 기억에 남는 작품을 고르라면 단연 벨라 타르의 <토리노의 말>(2011)이다. 엄청난 작품을 보고 있다는 전율이 내 몸을 훑고 지나갔다. 그다음은 라브 디아즈의 작품들이다. 중요한 건 그 모두가 ‘극장의 스크린’이라는 체험이 아니고서는 진면목을 느낄 수 없는 작품들이라는 거다. 그래서 영화제가 중요하다.

-이제 관객과 만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영화제를 새로이 팀을 꾸려 준비한 느낌이 어떤가.
=아무튼 다시 영화제 일을 시작했으니, 현재 팀과 열심히 예쁘게 잘하고 싶다. (웃음) 그리고 이처럼 작고 의미있는 영화제는 여전히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보는 입장이다. 극장에서 보기 힘든, 빨리 간판을 내리는 좋은 영화들을 영화제가 지켜내야 한다. 한편의 영화를 만드는 것이 공동 작업이듯 영화제도 마찬가지다. 혼자 똑똑하고 잘났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 어쨌건 12년이나 한 영화제에서 일하고 다시 영화제를 준비하는 일을 시작한 경험에 비춰보자면, 결국 영화제 일이란 영화와 일하는 게 아니라 사람과 일하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 어떤 순간에도 영화보다 사람이 중요하다.

조지훈 프로그래머를 만나기 전에는 어쩔 수 없이 ‘리얼판타’가 함께 떠올랐다. 지난 2005년 열린 리얼판타스틱영화제는 그 전해인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일방적으로 해촉된 김홍준 집행위원장과 일부 스탭들이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었던 영화제다. 하지만 공개적으로 ‘항의’의 의미를 표방한 리얼판타와 달리 무주산골영화제는 그 시작과 컨셉 모두 별개의 새로운 영화제다. 그 역시 그와 관련한 얘기를 극도로 아꼈고, 자신과 다른 스탭들 모두 각자 의미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처음에는 ‘의식적으로’ 그런다고 느꼈지만 그와 대화를 나누다보니 “다시 바쁘게 일에 매달리니까, 지금 하는 영화제 일 외에는 엄두가 안 난다”는 그 얘기가 사실은 정답이었다. 정동진 같은 바닷가의 영화제와 달리 산골의 영화제는 어떨지 무척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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