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역경을 이겨내고 성공한 여성화가’ <마리 크뢰이어>
2013-06-12
글 : 김보연 (객원기자)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활동했던 덴마크 출신의 화가 마리 크뢰이어(비르기트 요르트 소렌슨)의 삶을 그린 영화 <마리 크뢰이어>는 그녀의 남편인 세버린 크뢰이어(쇠렌 세터-라센)와의 갈등에서부터 시작한다. 이미 유명한 화가였던 세버린은 예술계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지만 가정에서는 망상증 때문에 제대로 된 남편, 아버지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현실과 상상을 구분하지 못해 수시로 마리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딸에게까지 안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결국 마리는 남편을 두고 스웨덴으로 잠시 여행을 떠나고, 이곳에서 작곡가인 휴고(스베리르 구드나슨)를 만나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다.

<정복자 펠레>(1987) 등으로 익숙한 덴마크 감독 빌 어거스트의 최신작 <마리 크뢰이어>는 ‘여성화가’로서의 마리의 모습보다 그녀의 내밀한 개인사에 초점을 맞춘다. 여성의 사회활동이 자유롭지 못하던 당시, 그녀는 남편에게 헌신적인 아내이자 사랑스러운 딸의 어머니였으며 그럼에도 갑자기 다가온 사랑에 모든 것을 던질 수 있는 열정을 간직한 여성이었다. 또한 동시에 이 모든 것을 뒤로하고 홀로 자신을 찾아 떠난 용감한 인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그녀의 삶이 순탄치 않았으리란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마리는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여성에 대한 사회의 편견과 맞서고 주위 사람들이 떠나가는 아픔을 견뎌내며, 자아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다한다. 이때 감정을 과장하지 않고 차분하고 담담하게 그녀의 내면을 묘사하는 것은 영화의 큰 미덕이다. 눈물을 억제함으로써 그녀의 복잡한 내면을 헤아려볼 여지가 더 커지는 것이다. 이를 통해 영화 속 마리 크뢰이어는 ‘역경을 이겨내고 성공한 여성화가’라는 단편적인 묘사를 넘어 자신의 모순과 결점까지 드러내는 입체적인 캐릭터로 자리매김한다.

또한 끊임없이 몰려오는 불행의 연속에 슬픔 이상의 감정적 생동감을 불어넣는 것은 마리를 연기한 비르기트 요르트 소렌슨의 얼굴이다. 한 인물이 겪는 어려움을 에피소드들로 설명하는 것은 가장 쉬운 방법이지만 이 배우는 흔들리는 눈빛과 굳게 다문 입술만으로도 마리가 통과했을 법한 고통을 형상화하며, 나아가 그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삶에 대한 의지를 조그맣게 남겨둔다. 너무나 쓸쓸한 마지막 장면에서도 여전히 사그라지지 않은 희망의 기운이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녀가 훗날 남긴 아름다운 그림들을 다시 찾아보게 만드는 힘이 있는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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