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작에 이르기까지 구로사와 아키라는 일본 영화, 나아가 아시아영화를 대변하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그가 오리엔탈리즘의 아이콘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웨스턴적 활극이나 사무라이영화들로만 그를 기억하는 것도 편협한 일이다. 도스토예프스키에서 셰익스피어까지, 존 포드의 서부극에서 하드보일드 탐정물까지 그 다양한 참조점에서 떠나 그가 도착한 곳은 ‘구로사와적’인 영상 세계였음을 기억하자.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가 일본국제교류기금과 함께 개최하는 ‘구로사와 아키라 특별전’(6월20일~7월7일)은 그의 진면목을 확인하기에 좋은 기회다. 1940년대 초기작부터 죽음을 앞둔 노선생의 이야기를 다룬 유작 <마다다요>(1993)까지, 그의 대표작 14편을 만날 수 있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필모그래피를 살필 때 하나의 중요한 참조점은 문학이다. 우선 그는 청년 시절 러시아 문학에 깊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을 각색한 <백치>나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모티브를 따온 <이키루> 같은 심리적 휴먼 드라마들이 그 사실을 확인케 한다. 주제로 친다면 인도주의적 의사를 등장시킨 <조용한 결투>나 <붉은 수염>도 같은 세계 안에 존재하는 듯하다. 이들 영화는 박애와 순수를 옹호하고, 너무도 소심하여 악당조차 되지 못하는 인생들의 구원에 대한 윤리를 제시한다. 그런가 하면 <거미집의 성>은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각색한 작품이다. 조르주 심농이나 대시엘 해밋의 추리소설에 뿌리를 내린 <들개>와 <요짐보>는 원작을 전후 혹은 과거 일본사회를 배경으로 각색해 실감나는 영화로 만들어냈다. <라쇼몽>도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단편들을 바탕으로 하여, 귀신까지도 거짓말을 하는 진리의 모호함을 일본적 정서로 담아낸 작품이다.
문학적 참조점들만 훑어봐도 짐작할 수 있듯, 그의 영화 세계는 방대하다. 그는 영화사와 갈등을 빚거나 자금난에 시달리게 된 시기에 탁월한 오락성을 지닌 시대극을 만들었다. <7인의 사무라이>나 <요짐보> <숨은 요새의 세 악인> 같은 작품들이 대표적이다. 영화적 만듦새나 대중적 내러티브, 캐릭터의 제시 등에서 탁월한 성취를 보인 이들 중 앞의 두 작품은 각각 <황야의 7인>이나 <황야의 무법자>와 같은 영화로 리메이크 되기도 했다. 반면 그의 자의식이 보다 뚜렷하게 느껴지는 작품들도 다수 있다. 그중 주목할만한 것은 죽음을 주제화한 걸작 <이키루>와 유작 <마다다요>다. <마다다요>에서 그는 분신과 같은 노선생을 내세워 처음 영화를 만든 시절로 돌아간다. 영화의 후반부에 노선생의 꿈속에서 한 소년이 몽환적으로 하늘을 바라볼 때에는 그 응시에 감독의 욕망이 반영돼 보이기도 한다. <마다다요>의 전작 <꿈>에서 소년이 환상의 무지개를 바라봤던 것처럼 말이다.
그의 자의식이 녹아 있는 걸작으로 치면 초기작 <들개> <추문>과 그 연장선상에 있는 <천국과 지옥>도 빼놓을 수 없다. 1949년, 1950년에 만든 <들개>와 <추문>은 전후 미 군정기 일본사회를 파고든다. 급격히 물신화하는 인정세태, 선악이 교착된 인간의 내면 등의 주제의식은 <천국과 지옥>으로도 이어진다. 모두 열도의 여름 공기를 무드로 활용한 스타일리시한 장르영화들이지만 그 저변에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성찰이 깔려 있다. 그중 <추문>의 한 인상적인 장면은, 이 거장의 이름을 새삼 각인시킨다. 영화의 후반부, 쓰레기로 가득한 빈민가의 검은 늪에 밤하늘의 별이 비치는 장면이다. 그는 자신의 이름(黑澤明, 검은 늪의 빛)처럼 남루한 일상에 도래하는 그 찬란한 신비에 홀려 그토록 영화에 헌신했던 것은 아닐까. 그것은 여전히 구로사와 아키라를 보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좋은 영화는 유통기한이 만만년이며 그 신비는, 그의 영화 제목을 빌린다면, ‘마다다요’ (아직입니다)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