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 과대평가받은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보다 <은밀하게 위대하게>를 개인적으로는 더 흥미롭게 보았다. 물론 <은밀하게 위대하게>는 뛰어난 영화가 아니다. 그러니 태작을 수작으로 둔갑시키고 싶진 않다. 다만 그 만듦새와 무관하게 이 영화의 어떤 부분이 ‘문제적’ 흥미를 유발하는지 말해보려는 것이다.
참으로 추상적인 웹툰 그리고 영화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을 독립영화 방식으로 만들어 세계 영화제를 순례한 감독 장철수가 웹툰을 원작으로 한 상업적 기획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를 만든 것이 의아하게 생각될 수도 있다. 하지만 장철수는 일단 미학적 기질상 이 영화의 적임자 중 하나였던 것 같다. 예컨대 김기덕을 포함하여 그에게서 영화를 배웠거나 그와 함께 일했던 감독들이 비교적 공유하고 있는 점들이 있다. 어떤 미학적 추상성에의 믿음이다. 추상성이란 사실 어떤 구체성도 그리 중시하지 않는다는 뜻이며 나아가 구체성이 전무한 방식으로 영화를 만드는 것에도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는 뜻이다.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의 서사와 캐릭터는 극도로 추상적이다.
물론 추상성은 그 자체로 비판이나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영화에도 추상적으로 걸작이 된 경우들이 있다. 어느 경우에는 그것이 매체 그 자체의 특성이기까지 하다. 말하자면 만화에서 그건 훨씬 더 자연스럽고 강력한 본령이다. 가령 만화는 동그라미를 그리고 그 안에 선 몇개만 그려도 ‘웃는 사람’이라는 함의를 전할 수 있는 경제적이고 특별하고 신묘한 매체다. 그게 공히 알려진 만화의 추상적 속성이다. 어쩌면 그건 그림 기법의 문제에만 국한되는 일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칸과 칸 사이를 넘기며 진행되는 만화적 서사의 문제에도 관여되어 있을 것이다. 특히 우리 시대의 웹툰은 인터넷 문화와 함께 발달했지만 적어도 스마트폰 문화와 함께 폭발했으니 전보다 훨씬 더 임시적으로 머무는 독자를 사로잡기 위해 강력한 기술이 필요해졌을 것이다. 웹툰은 손쉬운 터치로 넘겨버리려는 저 느슨한 독자의 행위를 붙잡는 굵은 속성, 즉 추상성이 강화된 측면이 없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영화가 되기보다 원작 만화에 가까워지려 한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는 영화인데도 불구하고 웹툰의 그런 속성에 주력하고 있는 것 같다.
<은밀하게 위대하게>는 말하자면 다분히 추상적인 영화다. 그중에서도 가장 굵은 추상의 선은 ‘바보 아니면 출중한 전사’라는 주인공에 대한 묘사에 집중되어 있다. 그가 무슨 임무 때문에 왔는지, 왜 하필 하고많은 것 대신 바보 역할을 하고 있는지 우린 모른다. 어떤 만화의 주인공은 앞칸에서는 작고 우스꽝스러운 난쟁이처럼 보이다가도 다음 칸에서는 빛나고 늠름한 영웅적 사나이로 환골탈태하는 경우들이 종종 있다. <슬램덩크>의 강백호. <은밀하게 위대하게>가 바로 그런 방식으로 두 인물, 바보 동구와 뛰어난 전사 원류환(김수현)을 오간다. 그런데 이 점은 한 가지 문제를 내포하게 된다. 만화가 아니라 영화가 된 경우, 그리고 그림의 화법이 추상적인 게 아니라 서사의 화법이 추상적인 경우, 영화로서는 그에 따른 단순화와 일반화의 오류에 빠질 위험이 크다는 사실이다. 바보는 착하고, 달동네는 행복하다 등등. 이 영화는 이미 얼마간 거기에 빠져있다.
따지자면 사실 <은밀하게 위대하게>의 서사는 어느 유서 깊은 쪽에 속해 있다. 감독은 원작 웹툰을 읽고 보고 난 뒤에 최인훈의 소설 <광장>을 떠올렸다고 말했는데, 그는 이 점에서 적어도 중요한 사안을 직감한 것 같다. 현재로서 그렇게 분류되고 있진 않지만 <은밀하게 위대하게>는 한국문학과 한국영화가 오랫동안 관심을 보여왔고, 특히 한국영화라면 최근 10여년간 지치지 않고 변주해온 어떤 서사적 측면을 상위로 두고 있다. 이를테면 ‘분단서사’다.
돌아보면 한국영화가 새롭게 부활하고 장르적으로도 활기차지던 10여년 전 무렵부터 분단서사는 지치지 않고 주요하게 작동했다. <쉬리>(1999)와 <공동경비구역 JSA>(2000), <실미도>(2003), <태극기 휘날리며>(2004) 등. 그런데 이때의 분단서사는 분단이라는 문제를 적어도 토론의 화두로 삼아본 적이 있는 창작 주체들이 그 주제를 영화적 장르 또는 서사로 취하였던 것이고, 그 때문에 구체적인 핍진성이나 개연성을 구성하여 공감대를 형성하거나 호소력을 발휘하는 것이 자주 그 영화의 기본 자질로 지적되었다. 그 양식으로서 남성멜로드라마나 동성사회적 주제들이 적지 않게 내장되었던 것도 그러한 공감이나 호소의 측면 때문이었을 것이다. 상당한 변형이기는 하지만 장르적 추상성 안에 있으면서도 현실적 구체성과 긴장을 일으킨 엄청난 변종 영화 <괴물>(2006)도 결국 분단서사가 낳은 것이었다.
그런데 <은밀하게 위대하게>는 그 서사를 활기차게 하는 방식에 있어서 앞서 말한 내용보다는 다른 무엇들의 영향을 확실히 더 받은 것 같다. 따지고 보면 여전히 분단서사이지만 추동력이다르다. 분단서사라는 거대 내용물 그 자체가 핵심이 아니라 그걸 담는 작은 틀의 변화가 더 지대하게 영향을 미친 건 아닐까.
미소년과 미소년의…
두 가지를 말하고 싶다. 첫 번째는 2000년대 초반 즈음 시작되어 중반이 넘어설 때까지 힘을 미쳤고 그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시들해진 인터넷 소설의 영향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인터넷 소설의 본령은 인터넷 시대의 기형적 ‘사소설화’였던 것 같다. 멋진 미남자(이를테면 <늑대의 유혹>의 강동원, <그놈은 멋있었다>의 송승헌)들이 등장했고 소녀들은 내내 고민했고 미남자들은 소녀들에게 그들만의 남자로 등극했다. <은밀하게 위대하게>는 분단서사의 구조 안에서 인터넷 소설에 등장할 법한 그들 미남자를 등장시키고 있다. 오랫동안 간첩이자 괴뢰로 불려왔던 그들은 이젠 이국적 장르적 용어로 스파이이며 미소년들이다. 간첩은 분단의 역사가 고정시킨 낱말이고 스파이란 영화가 섭렵해버린 추상적이고 장르적인 낱말이다. <은밀하게 위대하게>의 세 소년은 후자다.
또 하나 이 영화에 은근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건 어떤 청춘동성물이다. 영화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 중 하나가 원류환을 향한 리해진(이현우)의 마음이다. 리해진이 원류환을 조금만 덜 사랑했어도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를 일이다. 앞서 추론한 인터넷 소설의 영향과 더불어 이러한 청춘동성물의 흐름이 이 영화의 소년들을 역사적 강박으로부터 벗어나도 된다고 부추기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상의 내용은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가 아니라 원작 만화 <은밀하게 위대하게>에 적용한다 해도 무리가 없다. 그렇다면 궁금해진다. 이 영화가 이 만화를 받아들이며 새롭게 작동시키고 있는 것은 과연 없는 것인가. 아니 있는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영화이기 때문에 그리고 얼마간은 전략적이기도 한 그것이 작동한다.
<은밀하게 위대하게>에서 인물의 중요도 순은 원류환, 리해진, 리해랑(박기웅) 순이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건 그들의 의복 기호의 중요도 혹은 환복 기호의 중요도 순과도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로커 리해랑의 의복은 기호적으로 거기서 거기다. 그의 능력치를 특별하게 대변하거나 바꾸진 않는다. 리해진은 사복과 교복을 주로 번갈아 입는데 그때마다 그의 의복의 기호는 두개의 층위, 귀여운 소년 또는 귀엽지만 무서운 킬러의 상반된 이미지를 전하려 한다. 반면에 동구/원류환은 약간은 비대칭적으로 세개의 층위에 놓여 있다. 환복, 즉 옷을 갈아입는다는 행위가 영웅의 조건이라는 걸 못 느끼는 관객은 이제 거의 없다. 슈퍼맨도 아이언맨도 옷을 갈아입어야만 영웅 노릇을 할 수 있다. 혹은 <스타트렉 다크니스>의 주인공들은 은근히 저 유명한 제복을 벗고 싶어 하는 제스처들을 갖고 있다. 할리우드의 그 영웅담 영화에서 그들이 옷을 갈아입을 때 그들은 패션을 바꾸는 게 아니라 기호를 바꾸는 것이며 능력과 힘을 갈아입는 것이다. 그들이 대개 만화에서 왔다는 사실이 중요하고 이 영화도 만화에서 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최대한 만화가 되고자 하는 <은밀하게 위대하게>에서 캐릭터의 중요도 및 관심도를 가늠케 하는 이 추상적 기호, 의상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동구의 제복은 우선 초록색 트레이닝복이다. 그는 사실상 신분을 숨긴 군인이고 그는 지금 임무수행 중이니 그 옷은 일단 그의 제복인 셈이다. 그 옷을 입고 있을 때 그는 동구이며 동네의 바보다. 그가 종종 정신을 차린다고는 해도 그 옷을 입고 있는 동안 사람들은 그를 바보로 안다. 또 그러기를 바라며 입는 것이다. 하지만 가게 할머니를 괴롭힌 자들을 처단하기 위해 동구가 나타났을 때 그는 주황색 트레이닝복을 멋지게 차려입고 와 있다. 리해진에게 일을 맡기고 돌아가며 그는 말한다. “피 튈까봐 옷까지 갈아입고 왔구먼…”이라며 악당들을 혼내주지 못한 걸 아쉬워한다. 하지만 이건 단지 잠깐의 신호에 불과하다. 초록색과 주황색의 트레이닝복을 거쳐 본격적으로 동구가 원류환이 되어야 할 때 동구는 머리를 정돈하고 근사한 정장으로 갈아입은 다음 원류환이 되어 마을 사람들에게 한 마디씩 영웅적 훈계를 하거나 선처를 베푼다.
동구가 옷을 갈아입으면 그는 동구가 아니고 원류환이라고 말해야 맞을 것 같지만, 만화에서는 온전히 적용되어야 할 그것이 영화에서는 좀 다르다. 영화는 이 지점에서 무의식적으로 개입한다. 동구가 마지막 사태를 앞두고 정장으로 갈아입는 건 물론 원작 웹툰에도 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동구에서 원류환이 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바보 동구를 연기하던 김수현이 평소와 같이 멋진 청년 김수현으로 돌아오는 것이 된다. 이 캐릭터에서 저 캐릭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캐릭터에서 저 실제 배우’로 바뀌는 순간이다. <은밀하게 위대하게>는 의상의 환복이라는 서사적 일이 벌어질 때 바로 여기를 보세요, 라고 외치는 전시의 국면이 열린다. 여기에 바로 김수현이 있습니다, 라고.
말하자면 <은밀하게 위대하게>라는 영화는 김수현이라는 배우가 연기하는 동구/원류환의 서사와 더불어 후반부에 이르면 김수현이라는 전시물이 핵심이라고 말해져야 할 것 같다. 즉, 이 영화는 ‘바보 서사’와 ‘김수현 전시’라는 이중의 전략을 취하고 있다. 어쩌면 김수현의 팬들이 이 영화에 부정적인 생각을 비추는 평자들에게 유독 극성스럽게 구는 건 이 변신의 단계 그리고 그를 이용한 전시성과 관련이 있는 것도 같다.
멜로드라마의 기본은 연민이며 특히 자기 연민이라고 한다. 인터넷 소설 역시 그와 유사한 동일화의 과정을 거쳤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주인공 중 한명에게 자기를 입힌 다음 동일시를 통해 교감과 충만을 얻으려 한다, <은밀하게 위대하게>도 그럴 것이다, 라고 우리는 생각하게 될 것이지만 그건 오해인 것 같다. 의복을 갈아입고 김수현이 전시되는 그 순간에 이르면 동일시의 과정은 거의 무용해진다. 바보의 서사를 벗어나 김수현이라는 육체로 돌아설 때, 눈앞에 전시된 그는 공감의 대상이기보다 객석의 주인이 소유하는 소유의 대상이 되는 것 같다. 여기엔 공감이나 동일시 같은 이중의 구조를 넘어서버리는 직접적 소유의 환상이 훨씬 강력하게 지배적인 듯싶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 대한 반론은 저 인물의 공감을 깨는 것을 넘어서거니와 나의 소유에 대한 훼손으로 여겨지므로 그 전시에 흠뻑 빠진 누군가는 더욱더 극성스럽게 분노하게 되는 건 아닐까.
강력한 추상을 지향하는 연출자가 분단서사를 하위 장르화한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를 만들되 당대의 스타성을 전시적으로 내세웠다는 사실까지 이르다보니 지난 10여년간 한국영화사에서 출몰하고 사라지고 다시 출몰해온 몇 가지 것들이 이 영화 안에서 웅성거린다는 것을 우린 알게 됐다. 이 국면들을 하나로 묶어내고 싶진 않다. 그건 또 언젠가 기회가 올지도 모를 일.
정작 달동네는 모르는 유능한 바보
지금은 한 가지 문제를 지적하며 끝내는 게 좋겠다. 공동체와 바보의 문제 아니 공동체와 바보로 조장될지도 모르는 일반화와 단순화의 문제에 대한 우려다. 그걸 위해 많이 다르지만 바보와 공동체라는 걸 열쇳말로 한편의 영화와 비교하며 말해볼 순 있겠다. <은밀하게 위대하게>는 장르의 외피를 썼으면서도 극한의 미학으로 불안함을 끌어안고 현실을 가격한 <마더>의 반대편에 위치한 쓰디쓴 대당처럼 보인다. <마더>가 장르에서 시작해 현실을 가격했다면 <은밀하게 위대하게>는 현실의 문제들을 끌어안고 있으나 장르적으로 일반화 및 단순화시키는 면모가 심하다. <마더>는 바보와 그 이상의 바보로 어느 한 마을의 공동체를 산산조각내어 실상을 대면케 했다. 그런데 여기 <은밀하게 위대하게>에는 도준도 종필이도 없고 북한의 전사가 뛰어나게 위장한 바보 동구가 있다. 중요한 차이는 그의 바보 행세가 유능한 위장이라는 것이며 더 중요한 건 그가 위장을 마치고 떠날 때 이 허름한 마을의 일원들에게 한마디씩 진리를 일러주는데 그것이 이 공동체의 허황된 공고화를 마치 실현 가능한 것처럼 일반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개별의 특수성을 무시하는 것이 바로 그 유명한 일반화의 오류 아니던가. 원류환에게 말하건대, 그리고 그를 창조한 이들에게 말하건대, 달동네는 그렇게 만만하게 행복해지는 곳이 아니다. 바보는 본래 직업이 아니라 인간의 상태라서 그것이 등장할 때 지독한 공동체의 기형적 얼룩이 되곤 했던 것인데 지금 이 바보는 너무 유능한 척하며 공동체를 끌어안고 있어서, 그래서 좀 근심스러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