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월11일치 일기에 <월드워Z>, 6월12일치에 <버니>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맨 오브 스틸>에는 켄트씨네 외동아들이 붉은 천을 망토처럼 두르고 강아지와 뛰어노는 회상장면이 있다. 아련해지는 대목이다. 동생과 나도 꼬마였을 때… 하고 추억에 젖다 어리둥절해진다. 가만, 우리는 슈퍼맨 흉내를 낸 건데 슈퍼맨이 아직 오지 않은 우주에 속하는 어린 클라크는 어디서 영감을 얻은 걸까? 모태 기억?
6/10
영화 상영 10분 전. 극장에 입장하기도 커피를 마시러 가기도 애매한 시간이다. 요행히 로비에 빈자리가 보여 걸터앉았다. 같은 처지로 추정되는 옆 커플은 벌써 팝콘을 절반 이상 동내고 있었다. 콜라 한 모금과 팝콘 한 움큼 사이의 짧은 침묵을 깨고 여자가 문득 말했다. “지난번에 이 극장에 혼자 왔었거든. 근데 영화 끝나고 앞줄에서 누가 일어나는데, 우리 엄마인 거야. 엄마도 영화를 혼자 보러 왔더라고. 나, 그날 아침에 엄마랑 싸우고 나왔거든….” 그녀는 남자친구가 뭔가를 물어주길 기다리는 양 가만히 말을 줄였다. 하지만 여자 친구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던 청년은 귀기울이지 않았는지, 적당한 대꾸가 없었는지 “어, 우리 들어갈 때 됐나?” 하며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고 여자도 재론하지 않았다. 공연히 아쉬웠다. 영화에서 충분히 멋질 법한 장면이 흐지부지 디졸브되어 다음 컷으로 넘어가는 걸 구경할 때처럼. 누군가와 방금 나눈 대화가 얼마나 내밀한 것이었는지, 얼마나 중요한 찰나를 공유했는지 우리가 그때 그 자리에서 제대로 측량할 수 있다면, 인생은 훨씬 적은 후회를 남길 거다. 그러나 깨달음은 예외없이 뒤늦게 온다. 영화의 쓸모 중 한 가지는 이 간극을 메우는 기능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극중 인물보다 많이 아는 자의 시점에서 그들의 대화와 상호작용을 지켜보며 인생에서 부지불식중에 놓쳐버린 숱한 비밀과 기회에 인사를 보내는 게 아닐까?
6/11
여러모로 <월드워Z>는 애매한 영화다. 제목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부터 <8마일>과 비슷한 고민을 준다. ‘월드워 제트’로 읽건 ‘월드워 지’로 읽건 일정한 시간이 흐른 다음 대다수 관객에겐 “그 뭐지? 브래드 피트 나온 좀비영화”라고 기억될 확률이 높지만. 브래드 피트가 직접 제작한 첫 블록버스터급 영화 <월드워Z>는 훨씬 허술한 영화 <지.아이.조2>와 증상 하나를 공유한다. 영화의 호흡이 고르지 않아, 개축으로 내부 동선이 뒤틀린 건물을 보는 것 같다는 점이다. 제작과정을 뒤져보니 시나리오 수정과 7주간의 추가 촬영을 거쳤다 한다. 이 영화는 동시에 여러 가지를 가지려다가 스텝이 꼬인 예다.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컨테이젼>처럼 다큐멘터리적 실감을 살리려고 애쓰는 한편, 무시무시하게 빠른 좀비들이 등장하는 <28일후…>식 공포와 여름영화다운 액션 스펙터클도 놓지 않는다. 다행스럽게도 영화는, 꼬인 스텝이긴 하지만 넘어지는 최악의 사태는 면하고 목적지까지 간다. 도중에 군데군데 개성있고 신실한 터치도 보인다. 결국 우리 손에 쥐어진 결과물은 딱 떨어지는 여름 블록버스터를 암시한 예고편과는 상당히 다른 본색의 영화, 미워할 수 없는 실패작이다.
평화롭게 차를 몰고 외출한 4인 가족이 도시 중심가에서 원인을 미처 파악하지 못한 채 군중의 패닉에 휩쓸리는 <월드워Z>의 도입부는 관객의 주의를 효과적으로 휘어잡는다. 사태의 실체를 적시하지 않고도, 민간인이 보행자 눈높이에서 체감하는 재난을 생생히 구현한 이 대목은 바람직하게도 <우주전쟁>의 초반을 상기시킨다. 브래드 피트가 분한 제리 레인은 국제연합(UN)의 최고 조사관이었지만 가정에 충실하기 위해 사직하고 전업주부로 살고 있다. 그러나 세계를 덮친 좀비 전염병은 아내와 어린 자매의 피난처를 보장받는 조건으로 제리가 일선에 복귀하게 만든다(게다가 할리우드영화의 관습법에 따라 제리의 딸 중 한명은 아동천식을 앓고 있다). 영화 초반 제리는 도움의 손 길을 내밀어준 낯선 남자에게 “내가 이런 위기를 겪어봐서 아는데 움직여야 산다(Movement is life), 함께 피난을 가자”라고 전문가로서 권한다. 이 대사를 신호탄 삼아 <월드워Z>는 역병의 원인과 치유책을 조사하는 제리를 따라 남한에서 이스라엘 예루살렘으로, 다시 세계보건기구(WHO)가 있는 웨일스로 끊임없이 움직인다. 한데 이상하게도 주인공이 본격적으로 움직이면서 영화는 추진력을 잃어간다. 제리의 여정이 실마리와 답, 새로운 과제를 통해 전진하는 문제 해결 과정이라기보다 생지옥의 스케치로서 나열된 탓이다. 이 선택 자체는 나쁠 게 없지만 선택의 결과로 영화의 서론, 본론과의 연결이 어색해졌다. 단, 북한과 이스라엘이 좀비의 난으로부터 살아남게 된 경위는 흥미롭다. 특히 장벽에 둘러싸인 예루살렘의 군중 신은, 일본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의 대표 이미지를 빼닮아 눈길이 머문다.
<월드워Z>의 다른 난점은 가족과 헤어진 뒤 유일하게 지속적으로 화면에 등장하는 인물인 제리가 장거리를 이동하기 바빠 관객이 감정을 이입할 만한 내면을 거의 드러내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마크 포스터 감독은 중반 이후부터 제리를 캐릭터라기보다 <월드워Z>를 진행시키는 에이전트로서 거의 사무적으로 다룬다. 브래드 피트는 여전히 매력적이지만 그 매력은 영화 내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6/12
폐쇄 공간의 좀비 호러로 변신하는 <월드워Z>의 마지막 장에서 제리와 WHO 연구원들은 좀비들이 모여 있는 구역에 숨어들기 위해 간단히 무장을 갖추는데 이때 보호 장구로 잡지가 등장한다. 브래드 피트가 잡지를 팔뚝에 단단히 두르고 청테이프로 고정하는 광경을 보며 흐뭇(?)했다. 그러니까 종이 잡지도 쓸모가 있다고!(이내 더 슬퍼진다)
6/13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 작품이 두편이나 개봉되다니 흔한 여름은 아니다. <비포 미드나잇>에 이어 극장에 걸리는 <버니>는 링클레이터가 사는 텍사스에서 1996년 11월 발생한 기상천외한 실화를 다룬 영화다. 마을에서 가장 사랑받고 공동체에 이바지해 온 남자 버니(잭 블랙)가 살인을 저질렀다, 는 사실이 놀라움의 몸통이 아니라 범인의 성격과 주민들의 반응이 경이롭다. 신앙이 지배하는 공동체의 보수적인 구성원들이 마음을 모아 살인범을 위해 기도하다니. 아무리 피해자가 밉상이었다지만 흥미로운 현상이다.
링클레이터 감독은 사건을 보도한 저널리스트의 수첩을 기초로 기자와 공동으로 <버니>의 각본을 썼고 실제 주민을 배우들과 섞어 인터뷰이로 등장시킨다. 일부 평자는 “아예 다큐멘터리로 만들었다면 더 힘있는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라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버니>가 완전한 다큐멘터리였다면 만만찮은 논란을 자아냈을 거다. 링클레이터 감독이 은근하지만 분명하게 버니 편을 들고 있기 때문이다(실제로도 감독은 버니의 구명운동을 지지했다). <버니>에는 비슷한 시골 살인극 <파고>의 서늘한 냉소나, 병적인 거짓말쟁이의 일대기 <캐치 미 이프 유 캔>이 견지하는 극적 거리감이 없다. 영화에 드러난 단서만 놓고 보아도, 살인 직후에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이 트롬본을 연주하는 버니에겐 말하지 않은 비밀과 심리적 역사가 있다. 그러나 링클레이터 감독의 주요 관심사는 윤리적 책임이 아니라 가십을 통해 그려진 버니라는 인간의 실루엣과 마을 주민의 정서가 작동하는 양상에 있고, 재현하는 과정에서 본인의 우호적 태도를 숨기지도 않는다.
<버니>는 1996년부터 링클레이터 감독이 마음에 둔 프로젝트다. 잭 블랙은 지난해 관객과의 대화에서 “리처드는 2025년 영화를 이미 구상 중이다”라고 농담 반 진담 반 일러바치기도 했다. 확실히 시간을 취급하는 링클레이터의 방식은 유난스럽다. <비포 선라이즈> 시리즈로 그는 동일 배우의 성장을 수십년간 추적한 ‘앙트완 드와넬’ 연작의 프랑수아 트뤼포 이래 이 분야에서 가장 집요한 인물이다. <슬래커> 등 링클레이터의 초기작 네편은 모두 24시간 동안 벌어진 일을 그렸고 <비포 선라이즈> 연작도 마찬가지다. 차기작 <소년시절>(Boyhood)은 16년 동안 한 소년을 찍은 작품이라고 한다. 버니 티드가 감형이 가능한 89살까지 살아서 풀려난다면, 형무소 밖에서 링클레이터가 카메라와 두부를 들고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건 기분 탓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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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워Z>의 음료 자판기 장면
<월드워Z>는 불균질한 영화다. 상업영화로서는 불운이나 덕분에 보통 블록버스터영화에 결여된 잔재미는 있다. 목숨 건 카드로 좀비를 따돌린 주인공이 여봐란 듯 자판기에서 음료 깡통을 쏟아지게 하는 삽화도 한 예다. 생뚱맞은 PPL이라고 욕할 관객도 있겠지만 브래드 피트의 개구진 이미지에 어울릴뿐더러 <오션스 일레븐>의 작전 종료 뒤 맥주 한캔을 마시는 장면을 추억하게 해서 좋았다. 이 밖에 극장 휴대폰 매너 광고로 안성맞춤인 장면도 있으니 찾아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