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을 향한 강렬한 욕구.’ <더 웹툰: 예고살인>(이하 <더 웹툰>)의 김용균 감독은 이시영에 대한 인상을 그렇게 정리했다. 그 변신의 핵심은 <더 웹툰>에서 철저히 혼자라는 점이다. <위험한 상견례>(2011), <남자사용설명서>(2012) 등 특유의 매력을 뽐낸 일련의 로맨틱코미디영화에서 사이좋게 액션과 리액션을 주고받던 상대가 졸지에 사라진 셈이다. 자신이 그린 웹툰대로 살인사건이 벌어지면서, 작업실에 홀로 남겨진 웹툰 작가 지윤(이시영)은 과거의 망령에 허우적댄다. 변신을 향한 욕망은 그렇게 온전히 자기 자신과의 싸움으로 남겨졌다. 돌이켜보니 얻은 것도 아쉬운 점도 많단다. <더 웹툰>을 통해 배우로서의 미래를 본격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이시영을 만났다.
이시영은 로맨틱코미디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커플즈>(2011)에서 돈 많은 남자가 최고라 믿는 꽃뱀 ‘나리’, <위험한 상견례>에서 전라도 남자와 결혼하기 위해 악전고투하는 경상도 여자 ‘다홍’, <남자사용설명서>에서 볼품없는 외모에 연애 경험도 없는 CF 조감독 생활을 청산하고 인생역전을 이룬 ‘보나’, 그렇게 하나같이 매력적인 캐릭터였고 주변의 평가도 좋았지만 가슴 한구석의 허전함을 떨쳐내기 힘들었다. “들어오는 작품의 90%가 로맨틱코미디였다. 처음에는 어떤 작품이건 배우로서 열심히만 하면 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어느 순간 ‘보여주지 않으면 관객이 모르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장르를 넘나드는 파격적인 변신’, 그런 걸 꿈꿨다기보다 ‘이시영에게 저런 면도 있네’ 하는 새로운 공감을 끌어내고 싶었다. 잘하는 걸 계속 잘하는 것도 힘들지만, 이번에는 더 욕심을 내고 싶었다”는 게 그의 얘기다. <더 웹툰>을 ‘나의 첫 번째 공포영화’가 아닌 ‘나의 첫 번째 진지한 정극 연기’라고 표현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이전 영화들이 진지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어쨌건 늘 유머 코드가 있는 영화들을 해왔다는 얘기다. 반면 <더 웹툰>의 지윤은 스스로 웃지도 않고 남을 웃기지도 않는다. 그게 가장 힘들었다.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는 것.
그러기 위해 이시영은 여러 작품을 참고했다. 표면적으로는 공포영화를 많이 봤을 거라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여주인공의 미묘한 심리를 다룬 영화들을 주로 봤다. 배우로서 어떤 영화와 배우를 참고했다고 얘기하는 게 이상한 일이라고 여길 사람도 있겠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 캐릭터를 잘 소화해내고, 관객을 효과적으로 납득시키는 게 중요한 것 아닐까”라고 반문한다. “<케빈에 대하여>(2011)는 그 어떤 순간에도 덤덤한 틸다 스윈튼의 표정이 좋았다. 사실 중요한 단점이기도 한데, 내가 그런 연기를 너무 못한다. (웃음) 힘을 좀 빼고 연기를 해야 하는데 내가 늘 오버하는 게 느껴진다. <멜랑콜리아>(2011) 역시 커스틴 던스트, 샬롯 갱스부르, 샬롯 램플링 등 좋아하는 배우들의 호흡과 긴장을 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한 영화였다. 그리고 유명한 영화는 아니지만 데미 무어가 베스트셀러 작가로 나온 <하프 라이트>(2006)도 관심있게 봤다. 데미 무어가 아들이 익사하는 사고를 목격한 뒤, 그 충격으로 글을 쓰지 못하게 되는데 그럴 때의 제스처나 이상한 행동을 많이 참고했다.”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고 나니
더불어 이시영은 지금도 배우로서의 ‘안전장치’를 크게 염두에 두는 편이다. 말하자면 <더 웹툰>은 연기 측면에서 부족한 부분을 CG나 영화 속 웹툰으로 메울 수 있으리라는 영악한(?) 기대가 컸다. 배우로서 부끄러운 일이기는 하지만 스스로 말하길 “아직도 연기에 대한 겁이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다 끝난 다음에 많이 아쉬워하는 스타일이다. 거의 모든 장면을 재촬영하고 싶다고 느끼니까. (웃음) 하지만 대부분은 일단 촬영한 분량에서 지지고 볶아야 한다. 앞서 촬영한 <남자사용설명서>는 그게 자유롭더라. 부족한 걸 CG로 채우고, 어떤 장면은 그를 통해 더 나아지기도 했다. 그래서 <더 웹툰>은 새로운 정극 스타일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지만, 그로 인해 부담감을 덜 수 있었다. 나도 영화도 업그레이드할 수 있다면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싶다.” 더불어 실사로 보여줄 때 잔인할 수 있는 장면을 CG와 웹툰으로 처리하면서 15세 관람가 등급을 받기도 했다.
이시영에게 또 다른 안전장치라면 바로 녹음기다. 결국 CG도 웹툰도 일시적인 눈속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복싱선수 이시영’에 대한 인상을 떠올려봐도 알겠지만, 그는 지독한 연습벌레다. 보통 배우들이 사투리 연기를 위해 녹음기를 쓰지만, 그는 매번 영화를 할 때마다 자신의 모든 대사를 녹음기에 저장해 듣고 또 들었다. “아직도 대사 연기를 할 때면 톤을 종종 놓친다. 그래서 늘 1신부터 100신까지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대사를 녹음해놓고 반복해서 듣는다. 촬영이 끝나도 혹시 재촬영이 있을까봐 불안해서 지우지 못한다. (웃음) 어차피 현장에서 여가 시간은 꽤 생기는데 그럴 때 음악을 듣느니 장면의 톤이나 감정을 놓치지 않기 위해 귀에 계속 꽂고 있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캠코더까지 동원했다. “나름 이번 영화는 개인적인 투자가 많았다. (웃음) 혼자 집에서 트라이포트로 캠코더 세워놓고 연기를 연습하며 매 장면 다 동영상을 남겨뒀다. 이런 게 결과적으로 나를 옭아매는 시도가 될 거라는 생각도 하지만, 뭐랄까 아직 불안하다. 연기라는 게 ‘정답’이 없지만 어쨌건 스스로 만족할 때까지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뭔가 찾을 때까지 계속 해보자고 생각했다. 아직 내가 많이 부족하다는 얘기겠지. (웃음)”
이시영은 내내 ‘부족하다’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동안 그나마 이런저런 안전장치로 버텨온 것뿐”이라며 웃었다. 이전 로맨틱코미디 속의 그를 보면서, 코믹한 ‘본능’이 대단한 배우라고 생각했지만, 실제 만나본 그의 말에 따르면 지극히 ‘스스로 훈련하고 만든 만큼 드러내는’ 배우였다. 말하자면 배우 이시영은 욕심 많은 ‘학구파’였다. <더 웹툰>을 택한 이유 중에는 과거 김희선(<와니와 준하>), 김혜수(<분홍신>), 수애(<불꽃처럼 나비처럼>) 등 자신이 좋아하는 선배들과 함께한 김용균 감독의 영화라는 이유도 컸다. 그래서 첫 미팅 때 자신에게 별로 눈길을 주지 않던 김용균 감독이 야속하기도 했지만, 촬영이 중반쯤 다다랐을 때 그가 “시영씨를 보고 있으니 너무 슬퍼”라고 툭 건넸을 때 주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더 웹툰>을 택했던 모험에 보상을 받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늘 부족하다고 느끼고, 안전장치가 없으면 불안한 이시영에게 자신감을 심어준 계기가 됐다. “영화가 끊임없이 남을 ‘설득’하면서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그동안은 나 스스로를 설득하기도 바빴는데 <더 웹툰>을 통해서는 배우로서 더 많은 ‘스킬’을 배운 것 같다.” 그래서 일련의 로맨틱코미디 장르를 지나 <더 웹툰>에 도전하기까지 꽤 힘든 과정이었다면, 이제는 그것이 독립영화든 또 다른 장르의 영화든 마음껏 시도해보고 싶은 자신감이 생겼다. 아직은 비밀에 부칠 수밖에 없는 차기작도 의외의 선택일 거라 귀띔하면서.
magic hour
이시영이 생각하는 <더 웹툰>의 서현
지윤(이시영)이 겪는 창작에 대한 스트레스는 거의 자매처럼 지내는 서현(문가영)에 대한 복합적인 감정으로 드러난다. 중요한 것은 서현에 대한 미움이, 지윤으로서 느끼는 감정과 시나리오를 읽은 나 이시영으로서 느끼는 감정이 같았다는 점이다. 마치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관계처럼, 서현과 비교하며 ‘나는 왜 이것밖에 안될까’라는 생각에 지윤으로서도 나로서도 너무 눈물이 났다. 그럴 땐 광기에 휩싸이기보다 오히려 차분해진다. 그런 나를 보면서 김용균 감독님이 “지윤을 보는데 참 슬프고 처량하다”고 하셨다. 그때 내가 느낀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뭔가 통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100%의 감정으로 연기한다고 해도, 그것이 내가 의도한 대로 온전하게 관객과 만나는 경우는 드물다. 연기란 게 나 혼자 몰입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는 연출자와의 약속된 테크닉이 필요하다. 그래서 서현과 충돌하는 신은 내 목소리도 잘 들리지 않고 역시 부족하다고 느끼지만(웃음), 감독님이 음질 보정이나 후시 녹음으로 손대지 않고 그 느낌 그대로 가고 싶다고 하셨다. 너무 감정적으로 위태로워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았던 건데, 그게 맞다고 보신 거다. 어쨌건 난 지금도 서현이 너무 싫다. 처음부터 싫었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