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일이 전화를 걸어왔다. “다음주 금요일에 우리 밴드 홍대 클럽 공연이 있다.” “오랜만에 하네. 새 노래라도 썼어? 다들 바쁘다면서.” “와줄래?” 이 녀석이 이런 부탁을 하는 건 처음이다. “쪽팔리지만 이번엔 꼭 와줬으면 좋겠다.”
심상치 않은 느낌에 다음날 영화를 핑계 삼아 만났다. 극장 앞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우겨넣으며 태일이 말했다. “혜원이가, 너랑 나는 무슨 사이냐고 묻더라. 원수같이 보이다가도 다시 붙어 히죽거리고, 서로 죽일 것 같다가도 담에 만나면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굴고. 변태냐며.” “변태는 너지. 너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하는 거잖아.” “그런 거냐.” “<앤젤스 셰어: 천사를 위한 위스키>에 보면 술 먹고 죄 없는 청년을 구타해서 사회봉사형을 받은 주인공이 법원 명령으로 피해자와 그 가족들하고 대면하는 장면이 나와. 양쪽 다 죽을 맛이지. 한데 울고 화를 내고 하는 사이에 피해자쪽 증오도 좀 풀리고 가해자도 반성의 단초가 생기는 것처럼 비쳐. 너랑 나랑 만남이 그런 거야. 문제는 네가 늘 가해자고 내가 피해자라는 점이지만.” “지랄을 한다.” “<총, 균, 쇠> 썼던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어제까지의 세계>에서 그래. 그게 회복적 사법(restorative justice)이라는 프로그램인데, 범죄자와 피해자의 악감정을 해소하려는 전통사회식 접근이라고.” 그런데 다이아몬드도 썼듯이 이게 언제나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다.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않는 범죄자들도 많고, 범죄자를 대면하면 범죄 자체를 되살리기 때문에 만남에서 도움을 얻기는커녕 정신적 충격에 시달리는 피해자도 적지 않다.’ 나는 왜 태일을 만나는 걸까. “결국 나랑 너랑 가학-피학 성향이 맞는다는 거 아니냐. 이거 혜원이가 질투하겠는데.” 혜원은 이미 태일과 나의 관계 속에 자신이 기거할 틈을 만들고 있다. 나는 암묵적으로 공모하여 그 틈을 점점 넉넉하게 벌리고 있다. 태일이 대충 덮어놓은 뚜껑 밑에서 언제 무엇이 다시 끓어 넘칠지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우린 <월드워Z>를 보기로 했다. 극장에 앉아 상영 전 하염없이 계속되는 광고를 보며 얘기를 나눈다. “좀비영화 어지간히 많이 나온다. 요즘엔 스포츠영화나 동물영화보다 좀비영화가 더 많아서 마치 옆집에 좀비 한명 정도는 실제로 살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야. LG트윈스가 포스트시즌에 진출할 것인가에 대해 같이 토론해볼 수 있을 것 같은.” “매력 있잖냐. 뱀파이어도 그렇고. 오래 쌓인 장르적인 관습도 있으니까 설명이 없어도 되고, 비틀기도 쉽고. 총알에 대가리 터지는 거 통쾌해하는 게임취향에도 맞고. 이적 넌 게임 잘 못하지?” “별로 안 좋아해. 잘 못하는 게 아니라.” “새끼, 그게 그거지. 스티븐 킹 형님께서 <새벽의 저주>에 대해 논하면서 말씀하셨다. 요즘 좀비영화는 관객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깔린 두려움을 반영한 거라고.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테러리스트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과연 있을까?’” “9.11 이후의 서구인들에겐 그렇겠지. 방사능이나 전 지구적 역병에 대한 공포까지 더해져서. 결국 종말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보편적인 것 아닐까. 파국 이후에 민낯이 드러나는 인간의 추악한 본성을 다루기도 좋고. 좀비가 나오든 나오지 않든 <눈먼 자들의 도시>나 <더 로드>나 <나는 전설이다>나 <괴물>이나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 잘 쓰면 노벨문학상이나 퓰리처상도 받고.” “말 쉽게 하네. 네가 써보셔. 스티븐 킹 형님 발톱에 때만도 못한 새끼가.” “헤헤. 너 스티븐 킹이 작가들 밴드에서 기타 치고 노래하는 거 알지? 최소한 그건 내가 그 양반보다 좀 나은 것 같더라.” “나는 그 얘기도 자신있게는 못하겠다.” 태일의 얼굴이 잠깐 어두워진다.
영화를 보고 실내포장마차를 찾아 앉았다. 갈수록 한국식 주점을 찾기가 힘들어진다. 죄다 일본식 이자카야를 표방한 집들이다. 그렇다고 맛이 정말 일본풍도 아닌 것 같은데. 태일이 소주를 따른 잔을 든다. “영화가 스케일은 큰데, 왠지 싱겁다.” “원작 소설 <세계대전Z>는 사실 아기자기하고 좀 유머러스한데…. 원작자 맥스 브룩스가 <SNL> 작가 출신이거든. 워낙 다양한 인터뷰들의 모자이크라 영화화하긴 쉽지 않을 거라고 모두 걱정하긴 했지만.” “영화 보는데 원작 얘기 하지 마라. 영화는 영화로 보는 거야. 원작 소설이든 원작 웹툰이든 안 본 사람들한테는 영화가 원작이야. 모든 원작을 찾아 읽을 것도 아니면서 아는 척들은. 재수없게시리.” “그렇다고 원작을 아는데 아예 무시할 수가 있나? 예를 들어 <위대한 개츠비>란 제목을 달고 영화를 만들 땐 감독이든 관객이든 원작 소설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거지.” “<올드보이>도 있잖냐. 제목이랑 기본설정만 가져와서 만들었다며. 난 원작 안 찾아봤다. 그래도 영화 감상하는 데 아무 문제도 없더라.” 또 부딪힌다. 그러면서 잔도 부딪는다. 정말 나는 태일과의 부딪힘을 즐기는 걸까.
“근데, 이번 공연엔 왜 꼭 와달라는 거야? 엄청난 곡들이라도 나왔어?” 태일이 소주잔을 쭉 들이켜더니 한숨을 내쉬며 말한다. “나… 언제까지 음악을 할 수 있을까 두렵다. 이제 인디밴드 한다는 자부심만으로는 버티기가 힘드네. 이번이 마지막 공연이 될지도 몰라.” 우려하던 얘기가 나오고 말았다. “이적, 넌 두려움 없냐. 그래도 아직은 살 만하니까 나보다는 낫겠지. 난 씨발 요새 정말 벽에 다다른 것 같아 무서워. 청춘도 끝나가는 것 같고, 음악에서도 빛이 안 보이고. 그 잘났던 얼굴에 주름도 늘고. 킬킬.” 농담으로 무마하기엔 그의 웃음이 슬프다. 나는 말하고 싶다. ‘나도 두려워. 매일 두려워. 하루하루 발악하며 겨우 연명해가는 거야.’ 하지만 이 얘기가 위안이 될지 자신이 없다. 그때 태일이 숙였던 고개를 든다. “난 좀비보다 내 미래가 훨씬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