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디 아더스>, 아는 만큼 더 무섭다
2002-02-07
글 : 듀나 (영화평론가·SF소설가)
<디 아더스>에 영향준 공포문화, 공포영화

(다음부터는 스포일러 지뢰밭이니까 영화 결말을 알고 싶지 않으신 분들은 적당히 건너뛰길. <디 아더스>뿐만 아니라 이에 비교할 만한 다른 영화들의 결말까지 밝힐 테니 그것도 알아두시고….)

세상 어딜 가도 유령 이야기는 있다. 유령들의 어쩔 수 없는 초자연성과 그들이 불러일으키는 공포심 때문에,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무서운 이야기’는 유령 이야기다. 여기서 돌연변이 괴물과 미치광이 살인마가 나오는 현대 공포물로 가려면 한참을 걸어야 한다. 그만큼 유령 이야기들은 보편적일 수밖에 없다. 유령이 스코틀랜드의 고성에 나오건 한국의 초가삼간에 나오건 그들이 하는 일과 원하는 것은 대부분 비슷하다. 우리나라에서 장화와 홍련이 자길 죽인 원수를 찾아달라고 새로 부임한 사또에게 나타날 때, 스코틀랜드에서는 살해당한 잉글랜드 장교의 유령이 살인자를 잡아달라고 양치기 앞에 나타나는 식이다.

하지만 서구 예술에서 ‘귀신들린 집’은 다른 문화권보다 은근히 강한 힘을 과시한다. 왜일까? 유령들이 어디에나 있는 것처럼 ‘귀신들린 집’도 어디에나 있다. 아마 영국의 귀신들린 저택보다 한국의 귀신들린 초가삼간이 더 많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공간이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귀신들린 집은 어쩔 수 없이 주인공인 유령들이 설치는 배경으로 머물 수밖에 없다. 반쯤 개방된 구조에 공간폭도 좁은 터라 공간 자체가 주인공이 되기엔 모자람이 많다. 하지만 어느 정도 큰 서구의 저택들은 사정이 다르다. 일단 닫힌 구조이고, 미로 기능을 할 수 있는 어두운 복도들도 많으며, 숨을 구석도 많다. 이런 배경이 스코틀랜드나 잉글랜드의 컴컴한 환경과 결합하면 집은 어느 순간 유령을 밀쳐내고 무대 전면으로 등장하게 된다.

‘귀신들린 집’ 장르의 기원

18세기에 고딕소설이 유행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귀신들린 집 이야기는 서서히 장르의 중심으로 들어왔다. 고딕소설의 본격적인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오틀란트 성>만 해도 전형적인 귀신들린 집 이야기다. 영어로 쓰인 가장 유명한 유령 이야기인 헨리 제임스의 <나사못 회전>도 예외는 아니다. 그뒤로 셜리 잭슨, 스티븐 킹, 리처드 매서슨과 같은 현대 고딕작가들이 추가한 작품들의 양만 해도 상당하다.

1944년, 루이스 앨런이 도로시 매카틀의 소설 <언인바이티드>(The Uninvited)를 영화화하면서 이 장르는 영화로 넘어왔다. 다른 호러 장르에 비해 시작이 좀 늦은 셈이지만, 은근히 이 장르가 고도의 테크닉을 요구하는 부분이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런 늦은 출발은 오히려 당연하다. ‘귀신들린 집’ 장르는 구체적인 유령이나 괴물보다는 주인공들을 둘러싸는 환경을 공포의 대상으로 잡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약간 무리수를 두어 추론한다면, 이런 분위기의 작품은 40년대 RKO의 B급영화 제작자 발 루튼이 ‘보이지 않는 것의 공포’에 대한 이론을 제시한 뒤부터 가능했다고 할 수도 있다. 대부분 훌륭한 귀신들린 집 영화들은, 루튼의 공포영화들이 그런 것처럼 노골적인 폭로를 자제하고 분위기 위주로 흐르는 경향이 강하다.

자, 여기서부터 <디 아더스>를 끌어오기로 하자. 우선 우리가 이 영화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은 <디 아더스>가 장르 공포영화이며, 이 영화를 구성하는 블록 대부분이 모두 선배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장르물은 대부분 장르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관객이 본다는 것을 염두에 두는 법이다.

공식화된 반전 이 점은 꽤 중요하다. 예를 들어 현대 추리소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독자가 크리스티와 엘러리 퀸의 소설을 차례로 읽었다고 해보자. 우리가 설정한 가상의 독자는 두 번째 읽은 소설이 첫 번째 추리소설의 모방작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모두 이상한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수사가 벌어지다 끝에 가서 명탐정이 뜻밖의 범인을 잡는 내용이니까. 하지만 그들은 모두 같은 장르의 작품을 쓴 것에 불과하다. 물론 이렇게 엄격하게 고정된 장르도 어느 정도 세월이 지나면 이전의 단도직입적인 느낌을 잃게 된다. 현대 추리작가인 루스 랜들이나 P. D. 제임스는 여전히 뜻밖의 범인을 등장시키는 추리소설을 쓰고 있지만, 선배인 크리스티처럼 의외성을 대단하게 강조하지 않는다. 독자들이 범인을 눈치채지 못했으면 좋고, 그렇지 않아도 상관없는 것이다.

뜻밖의 결말을 가진 유령 이야기도 비슷한 경향이 있다. <디 아더스>에서 반전은 자기 자신을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주인공들이 사실은 유령이었다는 것이다. 비슷한 반전의 <식스 센스>가 몇년 전에 나왔기 때문에 사람들은 쉽게 이들의 연관성을 캐려 하고 둘의 의외성을 비교하려 한다.

하지만 이런 식의 반전은 거의 공식적이기까지 하다. ‘범인은 집사다!’처럼 구체적인 트릭을 넘은, ‘끝에 가면 명탐정이 사건을 해결한다’식의 공공연한 공식인 것이다. 물론 예는 수두룩하다. 가장 유명한 예는 허크 하비의 전설적인 컬트영화 <영혼의 카니발>(Carnival of Souls)이다. 이 영화에서 교통사고에서 살아남은 여자주인공은 마지막에 가서야 자기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멀리 가기 귀찮다면 이정애의 만화 <일요일 밤의 손님>을 보기로 하자. 여기서도 자기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남자주인공이 끝에 가서는 유령으로 밝혀진다. 심지어 이런 공식을 뒤집는 공식도 꽤 오래되었다. 자기가 남편에게 살해당한 유령이라고 믿었던 여자가 알고 봤더니 남편을 죽인 뒤 자살을 시도한 산 사람이었다는 것이 밝혀지는 리처드 휴즈의 단편 <유령>은 1920년대에 나왔다. 곧장 말해 이런 반전은 그 당시에도 그렇게 놀라운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장르 애호가들은 일반 관객보다 어느 정도 더 이득을 얻게 된다. 일반 관객이 끝에 붙은 반전에 목숨을 거는 동안 훨씬 여유있게 드라마를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디 아더스>도 루스 랜들 소설과 특별히 다를 게 없다. 관객이 눈치 못 채도 좋고, 그렇지 않아도 큰 상관은 없다.

이런 태도는 역시 소수의 가능성을 오가던 그의 전작 <떼시스>와 유사하다. <떼시스>에서 관객은 범인이 둘 중 하나라는 걸 알고 있으므로 어느 결말로 가도 특별히 놀랄 이유는 없다. <디 아더스>에서도 이미 익숙한 관객은 이런 이야기가 도달할 수 있는 몇몇 가능성을 알고 있다. 문제는 그 가능성 중 어느 게 사실이냐는 것이다. 당연히 서스펜스는 어느 정도 장르 특성을 알고 있는 관객에게 더 강하게 느껴지게 된다.

<디 아더스>의 인용과 독창성

독창성과 장르공식, 인용을 가려내는 과정에서도 장르 애호가들은 훨씬 유리할 수 있다. 영문학 애호가들은 일반 영화광들보다 <디 아더스>를 훨씬 여유있게 보았을 것이다. 귀신들린 집, 그 집에 사는 어린 두 남매, 그들을 보호하려는 여자주인공의 구도는 앞에서 언급한 헨리 제임스의 소설 <나사못 회전>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이것이 단순한 우연일 리는 없다. 심지어 영화는 <나사못 회전>에 대한 주석 역할까지 한다. 예를 들어 <디 아더스>가 가지고 있는 반전 도형의 구성은 <나사못 회전>에서도 그대로 발견된다. <나사못 회전>의 주인공 역시 아이들을 사랑하지만 그런 주인공의 행동은 아이들에게 위협이 될 수도 있다. 침입자와 주인의 위치가 정반대인 <디 아더스>에서처럼, <나사못 회전>의 유령들과 가정교사의 정체도 보는 시점에 따라 극단적으로 바뀔 수 있다. 한술 더 뜨는 것처럼 보이는 구석도 있다. <디 아더스>에서 두 아이를 창세기 우화와 결합시키는 방식은 <나사못 회전>을 원죄와 타락에 대한 성서적 우화로 이해하려는 고전적인 해석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내 생각엔 여기서부터는 노골적인 윙크 같다.

영화적 인용에 대해 떠드는 것은 <나사못 회전>과 영화를 비교하는 것보다 어렵다. 사실 꽤 쓸데없는 짓이기도 하다. 어떤 평론가들이 최근 영화를 앞에 두고 영향을 주었을 것 같은 과거의 영화들을 줄줄 읊는다면, 그건 그 평론가가 자기 지식을 과시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는 걸 증명할 뿐, 정작 감독의 의중과 별 상관이 없다. 하지만 다음 영화들과의 유사성은 짚고 넘어가야 인용과 독창성의 경계를 가릴 최소한의 기반이 서게 될 것 같다.

우선 조셉 L. 맨키비츠의 초자연적 코미디 <유령과 뮤어 부인>(The Ghost and Mrs. Muir)을 보자. 이 역시 남편을 잃은 고집 센 여자주인공이 아이와 함께 귀신들린 집에서 산다는 이야기인데, 어둠 속에 음산하게 떠 있던 남자의 얼굴이 초상화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장면이 그대로 인용되고 있다. 그레이스처럼 깐깐한 성격은 아니지만 상복을 입은 뮤어 부인의 이미지도 그레이스와 은근히 겹치는 구석이 많다. <디 아더스>의 다락방 장면은 <언인바이티드>의 귀신들린 스튜디오에서 빌려왔을 가능성이 크다. 피아노와 피아니스트의 활용은 아마도 <언인바이티드>와 피터 메닥의 <체인즐링>(The Changeling)에서 빌려왔을 것이다. 후반부에서 지금까지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세 사람의 묘비가 드러나는 장면은 루이스 길버트의 유령 영화 <에드브룩의 비밀>(Haunted)와 거의 같다. 자주 등장하는 거울의 활용이 로버트 와이즈의 <더 헌팅>(The Haunting)에서 온 것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하지만 그 영화의 영향이 은근히 크다는 걸 생각해보면 막연한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 <나사못 회전>을 영화화한 <공포의 대저택>(The Innocents)도 고유의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 크다. 아이들이 잘되기만을 바랐다는 데보라 카의 캐릭터 미스 기든즈의 절규는 그레이스의 절규와 쉽게 연결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들은 아메나바르의 직접 인용일까? 아니면 장르에 숨어 있다가 무의식적으로 기어나온 기억일까? 확신할 수 없지만 반반이 아닌가 싶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메나바르가 겉보기보다 야심이 적은, 작은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이고, 그 사실을 인식한 뒤에야 그가 의도한 드라마가 더 쉽게 들어온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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