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하의 날씨]
[영하의 날씨] 이별에의 희망
2013-07-15
글 : 김영하 (소설가)
일러스트레이션 : 김현영 (일러스트레이션)
왜 나쁜 아버지와 나쁜 연인은 예술의 소재가 되는 것일까, <마스터>

아이는 자기를 덜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에 들려고 애쓴다고 한다. 자기를 사랑하는 게 확실한 부모의 마음에 들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자기를 마뜩지 않아 하는 부모의 마음에 드는 게 생존에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혹은 그녀)가 자기를 버리지 못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바로 그것 때문에 아이에게 힘을 갖게 된다. 나쁜 부모는 아이를 사랑하지 않음으로써 아이를 움직일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아이는 끝없이 노력하고 부모는 “너는 영원히 내 사랑을 가질 수 없다”고 암시하고, 아이는 또 노력하고 부모는 또 암시하고…. 그러는 동안 어느새 아이의 얼굴에는 주름살이 생기고 허리가 굽고 눈이 침침해진다. 어느 날 자기를 끝내 사랑하지 않던 부모가 죽으면 아이는 부모의 관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통곡을 한다. 아이가 자신의 평생의 노력이 무의미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고 통탄할 때, 사람들은 그 속도 모르고 ‘불효자는 웁니다’라고 말한다.

심리학자 크리스 프레일리와 필 셰이버는 공항에서 이별하는 연인들의 행동을 관찰하고 분석했다. 보세구역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연인들은 키스하고 포옹하고 손을 잡았다. 어떤 연인은 보세구역으로 들어갔다가 돌아나와 다시 키스하고 포옹했다. 어떤 연인들은 마치 영원한 이별이라도 하듯 눈물을 흘렸다.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보세구역으로 사라지기 직전까지도 남겨진 연인을 돌아보았다. 키스하는 시늉을 하며 차마 눈을 떼지 못했다.

그들은 공항에서 이별하는 연인들의 행동을 수집하고 분석한 뒤 이런 행동의 기원이 모자간의 애착에 있다고 주장했다. 연인이 서로에게 하는 행동은 어렸을 때 엄마에게 했던 행동을 모방한다는 것이다. 어린아이들은 눈앞의 놀이에 열중하면서도 늘 엄마가 어디 있는지 확인한다. 엄마와 잠시라도 헤어지게 되면 울며불며 난리를 친다.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인 뒤에도 잡은 손을 놓지 않으려 하고 마지막까지 엄마쪽을 돌아본다. 사이가 좋은 연인들은 서로에게 유치한 애칭을 붙이고 혀짤배기 소리를 한다. 그들은 서로에게 칭얼거리고 서로를 귀찮게 하면서 애정을 시험한다. 여기서 우리는 부모와의 애착 관계가 건강한 사람이 연인과도 원만한 관계를 형성하리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어려서 부모의 사랑과 관심을 충분히 받지 못했던 사람은 연인의 사랑을 끝없이 확인하려 들 것이다.

인간사가 정의와 무관하다는 걸 발견하게 될 때마다 씁쓸하다. 아이가 자기를 덜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에 들려고 더 노력한다거나 어릴 때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이 연인과의 관계에서도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은 정의롭지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반대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이를 사랑하지 않은 부모는 아이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어려서 불행하게 자란 사람일수록 연인과의 관계가 더 원만하다면 얼마나 바람직할까. 그런데 불행히도 인간사는 정의에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기독교나 불교 같은 종교들은 정의의 실현을 사후로 또는 내세로 미룬 게 아닐까.

폴 토머스 앤더슨의 <마스터>는 부모와 자식간의 이런 관계에 대한 비유로 가득하다. 주인공 프레디는 아버지는 없고 어머니는 정신병원에 있는 남자다. 그가 제대로 된 부모를 갖지 못했다는 배경은 영화 중반에야 밝혀지지만 관객은 영화의 첫 장면에서부터 그가 ‘후레자식’임을 알게 된다. 그는 부끄러움을 모른 채 욕망에 충실하다. 해군 병사들이 모래로 만들어놓은 여자 모형 위에 올라타 민망한 방아질을 하는 남자다. 그의 행동에 젊은 동료 병사들마저 눈살을 찌푸린다. 또한 그는 자기만의 술을 제조하고 그 술에 늘 취해 있는 디오니소스적인 인물이다. 프레디를 연기하는 와킨 피닉스의 눈에서는 언제나 광기가 번뜩인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백화점에서 사진사로 일하지만 살아 있는 진짜 여자와는 정상적인 관계를 맺지 못한다. 그는 여전히 자신이 제조한 술을 마시고 세상을 향해 패악을 부린다. 역시 술에 만취한 어느 날, 그는 ‘마스터’ 랭카스터와 만난다. 신흥 종교의 교주로 세력을 키워가던 이 남자는 모든 면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는 가족과 신도들을 거느리고 군림한다. 프레디가 랭카스터를 만나는 곳이 태평양의 배 위라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배 위의 랭카스터의 모습은 마치 구약의 노아처럼 보인다. 노아는 야훼라는 신을 믿은 유일한 가장이었고 그 신을 믿지 않은 당대의 다수의 눈에는 랭카스터와 같은 신흥종교의 교주로 보였을 것이다. 20세기 노아의 방주 위에서 프레디는 ‘아버지’이자 ‘마스터’인 랭카스터에게 빠져들고 랭카스터도 프레디를 받아들인다. 프레디는 랭카스터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한다. 랭카스터가 경찰에 체포될 때에는 충실한 개처럼 주인(마스터)을 보호하기 위해 경찰에게 달려든다. 프레디는 랭카스터가 시키는 모든 것을, 비록 그의 본성에 반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충실하게 따르려 노력한다.

프레디에게 랭카스터는 전형적인 나쁜 아버지, 나쁜 연인이다. 그들은 처음에는 매력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아이와 연인이 정말 원하는 사랑은 주지 않는다. 그들은 끝없이 상대방이 자신이 사랑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암시를 주고 이를 통해 사랑과 애착에 굶주린 아이와 연인을 움직인다.

프레디는 해군 갑판수였다. 예로부터 배를 타고 떠난다는 것은 가족에게서 벗어난다는 것, 어른이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모비딕>의 이스마엘은 포경선에 오르는 것으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대부>의 마이클 콜레오네는 해군에 입대해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함으로써 아버지와 가족의 뜻을 거슬렀다. 그러나 배를 타고 떠나는 것만으로는 진정한 어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모비딕>과 <대부>는 보여준다. 이스마엘은 광기에 사로잡힌 아버지 에이헙 선장을 극복해야 하고 마이클 콜레오네는 ‘대부’가 되어 가족을 지키는 운명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프레디가 진짜 어른이 되는 것은 랭카스터라는 아버지가 실은 약점으로 가득 찬, 그 자신이 타인의 사랑을 갈구하는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다. 랭카스터는 프레디가 제조한 정체를 알 수 없는 술을 좋아한다. 밀주에 대한 중독적 탐닉은 이성과 과학으로 자신을 포장한 ‘마스터’ 랭카스터의 숨은 약점이었고 가족들은 그것을 눈치채고 경계한다.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일방적이지만은 않다는 점을 포착했다. 아버지들도 한때는 누군가의 아들이었고 그들 역시 언제나 아버지를 찾고 그 아버지는 때로 자기를 숭배하는 자들 속에 있을 수 있다. 영악한 아들들은 아버지들의 그 약점을 파고든다.

우리 모두는 한때 부모의 사랑과 보살핌이 절실한 나약한 어린아이였다. 한번도 그 사실이 변한 적이 없다. 요즘 광화문 교보문고 빌딩 정면에는 “한때 나였던 그 어린아이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라는 시구가 적힌 대형 플래카드가 붙어 있다. 그 어린아이는 영원히 우리 안에 있다. 성장은 끝나지 않는다. 모든 비극과 희극이 여기에서 시작된다. 배를 타고 고향을 떠나는 것, 술을 만들어 먹는 것만으로 온전한 성인이 될 수 있었다면 아마 문학과 연극, 영화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 날 랭카스터는 프레디를 데리고 사막으로 간다. ‘마스터’ 랭카스터는 프레디에게 오토바이를 타고 정해진 지점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시험을 부과한다. 오토바이를 타고 사막을 달리던 프레디는 반환점을 돌지 않고 그대로 달려가버린다. 탁 트인 바다에서 제멋대로 살던 디오니소스적 인간이 끝내 길들여지지 않은 채 아버지가 정한 선 밖으로 탈출하는 장면은 통쾌하고 짜릿했다. 비록 우리가 나약한 어린아이로부터 비롯되었다 해도 부모가 우리에게 부과한 그 굴레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는 희망을 나는 거기에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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