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보여주지 않는 그래서 알게 되는
2013-07-26
글 : 김혜리

프란시스코 데 고야의 <거인>(1808∼12. 고야의 제자 작품이라는 주장도 있다)은 일본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 방영에 이어 <퍼시픽 림>이 개봉하면서 부쩍 눈에 밟히는 그림이다. 도시를 부수는 거대 로봇과 괴수야 여름마다 보는 화상들이지만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 특유의 짐승 냄새나는 스펙터클은 고야가 그린 몇몇 무서운 그림의 직계로 보인다.

6/17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이 출연한 팟캐스트 <필름메이커와의 만남>(Meet the Filmmaker)을 듣다 귀를 쫑긋했다. <코스모폴리스> 개봉 즈음인 2012년 8월 크로넨버그 감독과 주연배우 로버트 패틴슨이 함께 뉴욕 증권거래소를 찾아 개장을 알리는 종을 울렸다는 일화가 언급된 대목이었다. “유령이 세계를 홀리고 있다. 자본주의의 유령이”라는 슬로건으로 시작하는 영화로서 확실히 특이한 홍보 이벤트 아닌가. 나와 비슷한 의아함을 표하는 사회자에게 크로넨버그 감독은 <코스모폴리스>는 반(反)자본주의 영화가 아니라 자본주의가 원래 상정한 메커니즘을 어기며 돌아가는 금융 자본주의의 현황에 관한 영화이며 ‘월스트리트를 점거하라’ 시위자들이 주장한 바도 마찬가지라는 요지의 답을 돌려줬다. 더 재미있는 대목은 크로넨버그 감독의 증권거래소 견학 소감이었다. “나로서는 어째 ‘범죄현장’을 방문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거래소에서 일하는 분들은 정말이지 한 무리의 유쾌하고 호감 가는 자본주의자들이었다. 주식의 역사와 중요성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아주 친절했고 <코스모폴리스>를 환대했다. 내가 여태 왜 주식을 안 샀을까 싶더라.”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인터뷰를 모아보면,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은 고대 이집트 학자에게나 어울릴 법한 느릿하고 우아한 특유의 말투로, 놀랄 만큼 솔직하고 실용적인 생각과 엄연한 현실들을 이야기한다. <코스모폴리스>에 관한 다른 인터뷰에서도 그는 청춘스타 패틴슨을 캐스팅한 동기를 “일단 극중 인물과 나이대가 맞고 제작비 조달을 가능하게 해서다. 이 점은(<폭력의 역사>와 <이스턴 프로미스> <데인저러스 메소드>의 주연) 비고 모르텐슨도 다르지 않았다. (중략) 내 영화의 제작비는 아주 구하기 힘들어 이들과 같은 배우들의 캐스팅은 중요하다”고 웃음기를 보태지 않고 말한 적이 있다(패틴슨의 소속사가 자신에게 뇌물을 줬다는 농담도 던지긴 했다). 처음에는 ‘저렇게 말하면 옆에 앉아 있는 배우가 서운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그래, 사실인걸 뭐. 그것도 배우를 이루는 능력이잖아?” 하고 납득하게 된다. 간혹 감독의 실제 ‘말투’가 그의 영화 세계를 채운 공기와 세상사에 접근하는 태도를 이해하는데 보탬이 되는 경우가 있다. 결과물인 영화만 보았을 때는 세상의 상식에 비추어 창작자의 취향과 의도를 짐작하지만, 오디오/비디오 인터뷰나 직접 인터뷰로 ‘사람’을 접하고 나면 그 감독의 상식을 기준으로 영화를 다시 바라보게 돼서다. 평범하고 자동적인 묘사로만 여겼던 장면에 숨어 있는 용기를 알게 되기도 하고 반대로 도발로 보였던 대목이 감독에겐 그저 당연한 순리였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한다. 물론 영화는 감독 한 사람만의 창작품이 아니며, 예술적 선택의 의도와 효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감독의 성격에 관한 이해는, 내게 확실히 도움이 된다. 비록 더 나은 평자가 되게 해주진 않을지언정 더 즐거운 관객이 되는 일에는 확실히 도움을 준다.

6/19

서울의 대로와 이면도로, 골목을 가상의 모눈종이에 그리고, 인물들을 장기의 말처럼 움직여가는 미행 스릴러 <감시자들>은 나처럼 길치에다 방향 감각도 둔한 사람에겐 마술쇼나 진배없는 영화다. 고로 감시반 요원들도 마술사 내지 ‘준(準)초능력자’에 해당된다. 그러고 보니 공교롭게도, <감시자들>을 김병서 감독과 공동연출한 조의석 감독의 전작 <조용한 세상>에도 비슷한 설정이 있었다. <조용한 세상>의 주인공 류정호(김상경)는 보기만 해도 상대의 사연을 알아차리는 비범한 능력 때문에 남을 구하기도 하고 고통받기도 한다. 제스처에 그치긴 하지만, <조용한 세상>에는 류정호의 능력을 현실적으로 바라보려는 몇몇 대목이 있다. 초자연 현상이라기보다 타인을 향한 인간의 관심과 관찰이 불러올 수도 있는 결과라고 암시하는 것이다. 홍콩영화가 원작인 <감시자들> 역시, 온갖 하이테크 감시 장비의 시대에도 현장에 뛰어든 인간의 감각 기관으로만 감지할 수 있는 정보와 단서가 있다고 전제한다. 그럼으로써 초능력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건드리는 인간의 잠재력을 재미의 원천으로 삼는다. 길거리 장삼이사(張三李四)에게 잠재된 괴력을 그린 <아라한 장풍대작전>이나 주성치 코미디, M. 나이트 샤말란의 <언브레이커블>도 전례가 있지만, 이와 같은 ‘긴가민가’ 초능력은 CG 판타지뿐 아니라 카메라와 인물, 드라마의 힘으로 설득해볼 여지가 많다는 점에서 언제나 영화적으로 구미가 당기는 게임이다.

6/24

“난 모든 걸 보고 빠짐없이 기억하는 사람을 원한다.”

<감시자들>의 황 반장(설경구)이 신참 하윤주(한효주)에게 놓는 엄포를 들으며, 무심코 생각했다. ‘우와, 영화기자하면 대박이겠는걸?’ 모든 것을 보고 빠짐없이 기억하기는커녕 어제 본 영화의 캐릭터 이름도 곧잘 잊고 괴로워하는 나는 오늘도 <감시자들>을 다시 보기 위해 시사회가 열리는 지하철 1시간 거리의 대학 캠퍼스를 찾아갔다.

“영화 보는 동안 메모를 하나요?”라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축구 골대 그물 수준의 성긴 기억력을 가진 나는 불운하게도 2시간 내내 펜을 쥐고 있어야 하는 부류다. 필기에 정신을 분산하지 않고 스크린에 집중한 다음 시사 뒤 생각을 정리하는 동료들을 보면 부럽기 그지없다. 잊어도 될 만한 내용이니 잊었으려니 대범하게 마음먹고 기억에만 의존해보려고 시도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앞서 지나간 솔깃한 대사와 장면이 머리에 잘 저장됐나 신경 쓰다가 당장 진행 중인 신을 흘려버리는 사태가 반복돼 포기했다. 나와 같은 필기형 영화기자에게 수첩이나 이면지 묶음과 펜 외에 필요한 도구로는, 스크린에 바늘을 비춰 몇분 경과시점에 주요한 전개가 이뤄지는지 확인할 수 있는 손목시계가 있다(액정에 불이 들어오는 디지털 시계나 휴대폰은 민폐이므로). 본격적인 평을 쓰기 위해 볼펜은 목에 걸고, 숏을 세는 카운터와 초시계를 양손에 쥐고 영화를 보기도 한다는 평론가 정성일 선배를 생각하면 단출하다. 메모가 안전을 보장한다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쓴 위에 겹쳐 써서 수첩 군데군데 웬 엉겅퀴 덤불만 우겨져 있는 일은 다반사고, 내가 쓴 글씨를 해독 못해 끙끙거리다 필적 감정도 배워야 하나 자학하기도 한다. 중간에 볼펜이 닳은 걸 모르고 신나게 휘갈겨 적는 바람에 펜촉 자국이라도 읽어보겠다고 연필로 덧칠해본 적도 있다. 그래도 바보짓을 포기하지 못하는 건, 그나마 영화를 보는 동안 뇌가 제일 부지런히 움직이고 이미지와 소리를 근접하게 표현할 단어가 떠올라서일 거다. 관람 중 기억과 아이디어를 곧장 블루투스로 입력할 수 있는 기기가 발명되는 SF영화적 미래를 기대할 수 밖에. 그러면 또 배터리가 방전되겠지.

7/1

인물의 내면과 상황을 관객에게 감각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보통의 영화들이 구사하는 형식으로 1인칭 주인공 시점 내레이션과 주관적 시점숏, 주관적 사운드 등이 있다.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의 <마스터>는 훨씬 은근하면서도 담대한 방법으로 주인공 프레디 (와킨 피닉스)의 피부 밑에 관객을 밀어넣는다. 우선, 전쟁 트라우마를 다루는 영화치고 <마스터>는 현실로서든 악몽으로서든 완강할 만큼 전장의 경험을 극중에서 재현하지 않는다. 한참이 지나서야 우린 짐작하게 된다. 영화가 전쟁터로 돌아가길 거부하는 프레디에게 복종하나보다, 라고. <마스터>의 ‘시계’도 이중적이다. 종전 뒤 프레디가 랭카스터 도드(필립 세이무어 호프먼)를 만나 커즈 연합회의 일원이 되는 이야기의 본론은 시점(時點)의 전후 관계가 또렷한 반면, 전쟁 이전의 고향 이야기가 끼어들 때는 연도가 명시되지 않는다. 심지어 사랑한 이웃 소녀와의 추억장면에서는 프레디가 현실의 모습 그대로 과거에 뛰어든 것처럼 보인다. 하긴,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은 항상 그랬다. “영화에선 무엇을 보여주느냐만큼 무엇을 보여주지 않느냐가 중요하다”는 명제를 앤더슨만큼 절감시키는 작가는 좀처럼 없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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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 레인저>의 이중 기차 액션

고어 버빈스키 감독이 세편의 <캐리비안의 해적>을 연출한 일은 팔자로 보인다. 버빈스키에겐 놀이공원 탈것 설계자의 재주가 있다. <론 레인저>의 마지막 20여분은 주요 인물 전원이 나란히 질주하는 두 열차의 내외상하전후좌우를 바느질하듯 누비는 고밀도 액션을 과시한다. 타고 나면 다시 줄 서고 싶어지는 시퀀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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